‘성인실종’ 알리려 30시간 ‘셀프 실종’했던 사람[사라진 어른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이회창 후보자의 홍보물 뒷면에 인쇄된 실종아동 정보. 나주봉 전국 미아·실종 가족찾기 시민의 모임 회장이 제안한 아이디어였다. [박준규 기자]

[헤럴드경제=박준규 기자]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건너편에 있는 ‘전국 미아·실종 가족찾기 시민의 모임’ 사무실은 가로 6m, 세로 3m짜리 컨테이너에 마련됐다. 29일 찾은 4~5평쯤 되는 공간에는 행운목과 금전수 화분이 놓여 있었다. 이 모임 나주봉 회장이 실종된 딸 ‘송혜희’를 25년 간 찾아 헤맨 송길용 씨에게 선물하려고 며칠 전에 마련해둔 것이다. 송씨가 최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며 화분은 끝내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1999년 2월 13일, 막내딸 송혜희(당시 17세)가 평택의 집 근처에서 사라졌다. 아버지는 딸을 찾겠다고 전국을 헤맸다. 수년을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지만, 소득은 없었다. 몇 년을 술과 담배에 의지해 살던 송씨는 2004년 나 회장을 처음 만났다.

나주봉 회장 [박준규 기자]

“청량리 사무실을 찾아와서 ‘회장님 저좀 도와주세요’ 하더라고요. 보따리를 싸서 전자밥솥 하나 들고서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지내겠다고요. 제가 ‘여긴 수도와 화장실이 없으니 안 된다. 여인숙이라도 잡아서 지내면서 천천히 얘기해보자’고 했어요. 그렇게 인연이 닿은 거죠.”

두 사람은 송혜희 양의 인적사항을 담은 전단지를 낡은 트럭 적재함에 테이프로 빽빽하게 붙여 전국을 누볐다. 매주 수천장의 전단지를 뿌리고 사거리마다 현수막을 내걸었다. 지역신문에 기사가 나고, 방송까지 타면서 실종된 소녀 ‘송혜희’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졌다. 정치권과 지자체가 관심을 보내기 시작했다. 평택시청의 도움으로 임대주택을 얻고 기초수급자로 등록됐다. 나 회장이 평택의 임대주택을 찾아올 때면 송씨는 라면이든 빵이든 대접했다.

송 씨의 빈소에서 나 회장은 영정 앞에서 절을 올리고 읊조렸다. “형님, 나를 두고 먼저 가시면 어떡해요. 나랑 한 약속 안 지키고.”

나주봉 회장이 실종된 딸 ‘송혜희’를 25년 간 찾아 헤맨 송길용 씨에게 선물하려고 준비한 화분들 [박준규 기자]
5평짜리 컨테이너, 실종자들의 상징

청량리역 사거리에 있는 컨테이너 사무실 자리엔 2000년대 초반까지 경찰 초소가 있었다. 의경들이 근무하고 초소장은 침대 하나 두고 휴식하던 공간이었다. 2001년, 경찰이 초소를 없앤다는 소식을 들은 나 회장은 경찰에 “모임에서 쓰고 싶다”고 제안했으나 어렵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 길로 동대문구청장을 찾아가서 “실종부모들이 모여도 마땅히 이야기 나눌 공간이 없다. 컨테이너를 하나 세워서 쉼터로 쓰겠다”고 설득해 승낙을 얻어냈다. 그 뒤로 2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동 유괴나 미아가 워낙 많았다. 소셜미디어(SNS) 같은 수단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 나 회장은 전국 600여곳의 아동보호시설을 하나씩 뒤지면서, 실종아동들을 찾아내 부모에게 돌려보냈다. 틈만 나면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줬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는 노무현·이회창 후보자들의 홍보물 뒷면에 실종아동의 사진을 넣자는 아이디어도 냈다. 이렇게 발품, 손품을 팔면서 찾아낸 아이들과 청소년, 성인이 800여명이다. “수도 없이 집을 떠나서 산으로 강으로 헤매고 했어요.” 나 회장의 말이다.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는 전국 미아·실종 가족찾기 시민의 모임 사무실 벽면엔 수많은 실종아동의 얼굴이 있다. [박준규 기자]

세월이 흐르면서 청량리의 컨테이너 사무실은 실종의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때론 실종자 가족들이 둘러앉아 서로를 위로하는 사랑방이었고 실종아동이 이슈가 될 때마다 정치인들이 꼭 들르는 공간이었다. 2019년 개봉한 영화 ‘나를 찾아줘’ 촬영 장소로 내주기도 했다.

나 회장은 정치인들이 방문하면 “항상 숙제를 줬다”고 했다. 실종아동법제를 제정 의견을 강력하게 냈다. 2002년 9월 이른바 ‘개구리 소년’들의 유골이 실종 11년 만에 대구 와룡산에서 발견되면서 법 제정 논의에 탄력이 붙었다. 아동실종법이 필요하단 강력한 여론 속에서 국회, 정부가 논의를 이어간 끝에 2005년 비로소 ‘실종아동등의 보호 및 지원사업에 관한 법률(실종아동법)’이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었다.

‘실종 체험’ 시도했던 이유
2013년 나주봉 회장이 스스로 실종되는 실험을 했을 때, 실제 가족이 만들어 배포했던 전단지 [박준규 기자]

2013년. 조울증을 앓던 20대 남성이 사라진 일이 있었다. 부모가 신고했지만, 성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은 실종자가 아닌 가출인으로 접수했다. 도움 요청을 받은 나 회장은 트위터에 행방불명인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올렸다. 인천 영종도의 한 택시기사가 얼굴을 알아보고 결정적인 제보를 했다. 실종 75시간 만에 무사히 귀가했다.

나 회장이 부모로부터 근사한 저녁을 대접받고 돌아오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없어져도 경찰이 날 찾아줄까.”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해마다 7만 건이 넘는 성인 실종(가출인)이 접수된다. 그간 무던히 애를 써서 탄생시킨 실종아동법인데, 성인까지 아우를 수 있어야 비로소 온전하겠다는 생각이 피어났다.

“실종 시나리오를 마련해서 스스로 실종되는 실험을 했어요. 경찰의 수사력을 테스트하면서 성인실종법에 대한 필요성을 환기하려고 했죠. 원래 계획은 5일 잠적해 있다가 나타나려 했는데 하루 만에 청량리에선 난리가 난 거에요. 아내가 울고 불면서 전단지 돌리고 경찰은 CCTV 뒤져보고요. (일이 커졌다) 겁이 덜컥 나서 30시간 만에 관뒀죠.”

실종 체험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성인들의 실종까지 우리 법 체계가 포용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대 국회서부터 21대까지 성인실종법안이 발의됐으나 결실을 맺진 못했다. 이번 22대 국회서도 성인실종에 관한 법안이 발의됐다. 중요한 건 꾸준한 관심과 고민이라는 게 33년이란 긴 시간을 실종 문제에 쏟아부은 나 회장의 생각이다.

“실종은 인류가 멸망 전까지 발생할 거예요. 대책을 어떻게 강구하냐는 우리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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