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이 ‘그 피아노’를 선택한 이유 [백스테이지]

4억원 짜리 스타인웨이 D-274

따뜻하고 맑은 소리·정교한 표현

“임윤찬의 음악적 취향 나타나”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도이치캄머필의 쇼팽 피아노협주곡2번을 연주 모습 [빈체로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새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느낌의 소리라고 해야 할까요.”

스타인웨이 D-274, 피아노 넘버 623975. 비범한 재능의 피아니스트 임윤찬(20)이 도이치캄머필과 쇼팽 피아노협주곡 2번을 연주하기 위해 선택한 피아노에 대한 스타인웨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의 설명은 딱 들어맞았다.

임윤찬의 쇼팽은 어둠을 밝히는 찬란한 빛이었고, 심연을 가로지르는 눈부신 길이었다. 그의 음악이 우주라면 그 안엔 이름 모를 제각각의 별들이 반짝이고, 그의 음악이 바다라면 수만의 윤슬 아래로 낯선 생명들이 살아 숨 쉰다. 단 하나의 음도 허투루 다루지 않는 그의 피아노는 ‘대비의 미학’을 그린다. 뜨겁게 끓어오르면서도 섬세한 서정을 채색하고, 거스를 수 없는 중력으로 빨아들이면서도 명징한 음을 찍는다.

올 한 해도 임윤찬은 다양한 음악가들의 세계를 탐닉하듯 여행하고 있다. 2022년 미국 밴클라이번 국제 음악 콩쿠르 결선에서 연주하며 그의 이름을 세상에 각인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비롯해 바흐, 리스트, 쇼팽을 연이어 만났다. 지난 봄 한국에서의 리사이틀에선 차이콥스키의 ‘사계’와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으로 ‘역사적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다.

쇼팽은 임윤찬이 그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였다. 그는 한국을 비롯해 세계 투어 일정에서 쇼팽이 약관에 쓴 피아노협주곡 2번을 연주하고 있다. 지난 4월엔 데카 레이블을 통해 첫 스튜디오 앨범 ‘쇼팽:에튀드’를 냈다.

단 “두 마디를 위해 7시간을 연습”하고, “첫 음을 누를 때 심장을 강타해야 다음 음으로 넘어간다”는 임윤찬의 연주는 무수히 많은 연습과 고민, 타고난 음악성의 결과이나 무대에 오르기 전 그는 자신과 가장 잘 맞는 단짝 같은 피아노를 찾기 위해 고심한다.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도이치캄머필의 쇼팽 피아노협주곡2번을 연주 모습 [빈체로 제공]

클래식 음악계에 따르면, 임윤찬은 공연은 물론 음반 녹음을 위해 피아노를 고를 때에도 신중한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릴 소리, 자신의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할 음색을 찾기 위해서다.

최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파보 예르비가 이끄는 도이치 캄머필과 함께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연주에서 임윤찬이 선택한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D-274, 피아노 넘버 ‘623975’다.

현재 국내 공연장 피아노의 99%, 전 세계 공연장 피아노의 98%는 스타인웨이 앤 선즈(Steinway & Sons)의 제품이다.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세계에서 콘서트 피아노로 명성이 높은 것은 모든 공정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정교한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피아노의 전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아르투로 미켈란제리, 크리스티안 짐머만은 스타인웨이를 사랑해 공연 때는 자신의 피아노를 비행기에 싣고 다닐 정도였다.

예술의전당엔 총 12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마련돼 있다. 연주자들은 자신이 연주할 곡과 개인의 성향에 따라 피아노를 선택한다. 임윤찬이 선택한 스타인웨이 D-274는 그랜드피아노 중에서도 가장 큰 콘서트그랜드피아노다. 몸값은 4억원에 달한다.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는 크기에 따라 A부터 D로 구분한다. 알파벳 뒤에 붙은 숫자는 피아노 향판(피아노의 현선(絃線) 밑에 댄 널빤지. 소리를 울려 크게 하는 장치)의 길이를 의미한다. D 모델의 경우 향판 크기가 274㎝로 보통 ‘풀사이즈 피아노’라고 부른다. ‘미니 콘서트홀’에서 많이 쓰는 C모델의 향판은 227㎝로, D모델과는 길이 차이만 있을 뿐 같은 품질과 특징을 가진다.

‘살롱 피아노’로 불리는 B모델은 주로 학교나 스튜디오에서 많이 쓴다. 211㎝다. 1878년 개발된 오랜 역사를 지닌 A-188은 학원, 가정집에서 많이 쓴다.

예술의전당의 피아노 셀렉트 룸에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고르는 모습 [스타인웨인 앤 선즈 제공]

예술의전당 클래식 공연장 중 가장 큰 음악당, 롯데콘서트홀 등에서는 보통 D 모델을 쓴다. D-274라야 객석의 가장 뒷좌석까지 피아노 소리가 선명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 피아노는 압도적 위용을 자랑한다. 전문가들은 “핸드메이드로 만든 스타인웨이는 연주자의 개성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피아노”라며 “특히 D-274는 연주의 뉘앙스와 터치에 민감하게 반응해 연주력이 뛰어날수록 빛을 발한다”고 말했다.

반면 연주력이 뒷받침하지 않는다면 피아노의 진가도 살아나지 않는다. 한 음악계 관계자는 “연주실력이 뛰어날수록 더 잘 칠 수 있는 피아노”라고 귀띔했다.

물론 뛰어난 연주일지라도 악기가 따라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D-274의 중요한 특징은 연주자가 “디테일하고 정교하게 표현하고 싶은 모든 것을 섬세하게 담아낸다”는 점이다. 실제로 피아니스트 블라디미스 아쉬케나지는 스타인웨이에 대해 “피아니스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피아노”라고 했다.

D-274라고 해도 모두가 같은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음악가들만이 간파하는 차이가 ‘선택의 요인’이 된다. 연주할 곡의 특성과 색채, 자신이 그리는 음악적 방향성에 따라 선택은 달라진다.

임윤찬이 선택한 D-274 ‘623975’는 예술의전당이 가지고 있는 D-274 중 가장 최신 모델이다. 피아노는 ‘타건하는 악기’라 해머가 치면 칠수록 닳기에, 연식이 오래될수록 처음 만들어질 때의 색채와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게 피아노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물론 그렇다고 연주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의 선택은 언제나 연주자들의 영역이며, 그것은 자신의 색깔과 개성을 보여주기 위한 결정이다. 스타인웨이 앤 선즈 코리아 관계자는 “새 피아노일수록 부드럽고 맑은 소리, 따뜻한 소리를 낸다”고 했다. D-274 ‘623975’는 그 정점에 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임세준 기자

‘쇼팽:에튀드’의 탄생에도 스타인웨이 D-274가 있었다. 임윤찬은 영국 런던의 헨리우드 홀에서 이 음반을 녹음했다. 당시 그가 찾은 사람은 ‘피아노 조율 명장’인 울리히 게르하르츠 영국 스타인웨이 지사장이었다. 그는 영국 전역의 모든 대형 공연장의 피아노를 조율한다. ‘피아노 전설’ 알프레드 브렌델의 ‘전속 조율사’이기도 하다.

임윤찬과 만난 게르하르츠 지사장은 런던에서 이뤄지는 모든 피아니스트의 연주와 녹음에 사용하는 스타인웨이 D 모델 6대를 보여줬다. 게르하르츠 지사장은 “임윤찬은 6대 중 1, 2번 피아노로 쇼팽 에튀드를 녹음했다”고 귀띔했다. 게르하르츠 지사장은 10년 이상된 피아노는 다루지 않는다.

두 대의 피아노가 가진 특징은 임윤찬이 추구하는 음색과 피아노 연주에서 중요하게 바라보는 지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따뜻한 소리’를 들려주면서도 ‘디양한 캐릭터’를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유달리 반짝이는 음색을 품고 있다.

게르하르츠 지사장은 “대부분의 젊은 피아니스트들은 화려한 소리를 원하는 반면 임윤찬은 여러 가지 소리를 만들어 갈 수 있는 피아노, 따뜻함과 반짝거림이 두드러진 피아노를 선호했다”고 들려줬다.

임윤찬의 확고한 선택의 배경엔 그가 “자신만의 유파, 음악세계를 만들어가는 연주자”(류태형 음악평론가)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약관의 피아니스트가 추구하는 음악세계는 과거 회귀적이다. 그는 이그나츠 프리드만, 디누 리파티, 마크 함부르크, 블라디미르 소프로미츠키를 자신의 ‘우주’로 꼽는다. “자유롭고 노래하는 톤으로 완전히 심취한 사람처럼 홀려서 치는 음악”이라는 것이 임윤찬의 설명이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피아노의 선택에선 임윤찬의 음악 취향을 볼 수 있다”며 “한 세기 전 음악과 피아니스트를 선호하고, 현대에 와선 보기 드문 전설적 거장의 음악에서 받은 영감이 쇼팽 앨범 작업에서 물질화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 [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실제로 임윤찬의 음악엔 그가 품어온 세계가 임윤찬만의 색깔로 드러난다. 고요한 격정과 팔팔한 생기, 웅혼한 정신이 독창적인 개성으로 표현된다.

특히 쇼팽 음반은 한 단계 도약한 임윤찬을 보여줬다. 이 음반은 전 세계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디아파종 황금상’, 영국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즈 피아노 부문, 미국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024년 최고의 클래식 음반에 선정됐다. 음악평론가인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이 음반에 대해 “생동감 넘치는 빈틈없는 해석이 담겼다”고 했고,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임윤찬의 취향과 높은 수준의 음악을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구현한 음반”이라고 평했다.

임윤찬의 쇼팽 음반과 그에 대해선 “젊은 연주자에게선 만나기 쉽지 않은 깊이와 품격을 담았다”는 공통의 평이 나온다. 임윤찬이라는 피아니스트가 가진 독보적인 특질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색을 담기 위한 임윤찬의 음악적 지향점이 피아노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류태형 평론가는 “젊은 피아니스트들은 대체로 튀어 보이고 도드라져 보이는 피아노를 선택하지만 임윤찬은 스토리텔링을 하는 연주자”라며 “피아니시시시시모(pppp보다 여리게)부터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 pp)까지 팔레트에 채색하듯 표현의 폭이 넓기에 다양산 색채를 가진 피아노를 선호할 것”이라고 봤다.

황장원 음악평론가 역시 “임윤찬은 생각이 깊고 시야가 넓은 피아니스트로 아이디어가 많아 다양한 색깔을 담을 수 있는 해석 방향을 고민한다”며 “특유의 열정적인 몰입감을 바탕으로 이를 효과적으로 일관성있게 담아낼 수 있는 피아노를 선택하는 것이 임윤찬에겐 굉장히 중요한 부분일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젊은 감각보다는 올드 취향을 가졌고, 발산하고 드러내기 보다는 내면에 집중해 깊이 응시하기에 자신의 음악을 온전히 표현할 피아노를 선택, 튀기보다 다양한 표현과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는 피아노를 고려한다는 점에서 노련한 피아니스트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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