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2월 15일 밤 9시 40분. 쿠바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의 최신예 전함 USS-메인(Maine)에서 2차례의 폭발이 발생한다. 351명의 승조원 중 무려 261명이 사망하고 함선은 침몰한다. 위험을 무릅쓰고 함장을 비롯해 생존자를 구해 낸 것은 쿠바 독립 세력과 교전 중이던 스페인 해군이었다. 미국은 전쟁 중인 쿠바에서 자국민 안전 확보와 보호를 이유로 메인 함을 급파했었다.
미국과 스페인은 별도로 사고 원인을 조사했다. 양측의 조사 결과가 전혀 달랐다. 스페인은 자연 발화에 의한 탄약고 폭발, 미국은 스페인이 설치한 기뢰가 원인이라고 각각 밝혔다. 미국은 이전부터 쿠바의 독립을 암암리에 지원했었다. 남북전쟁 이전 미국은 쿠바 매입까지 추진하다 스페인이 응하지 않아 무산됐다. 메인 함 침몰 두 달도 안 된 4월19일 미국이 스페인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이 발발한다.
미국은 전쟁(美西戰爭)에서 압승을 거둔다. 이미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를 빼앗아 태평양 진출로를 확보한 미국은 이때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리핀까지 차지한다. 유럽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406년 만에 아메리카 통치권을 모두 잃는다. 이 전쟁으로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되레 유럽 열강과 식민지 경쟁을 시작하게 된다. 미국이 세계 패권 도전을 시작한 이때 대통령이 윌리엄 매킨리(William MacKinley)다.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 시작이 꼭 일주일 남았다. 중국을 압박하고 우방들을 몰아세우던 첫 임기 때보다 더 거친 정책이 예상된다. 트럼프는 최근 캐나다가 미국의 51번째 주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를 무력으로라도 확보하겠다고 발언했다. 트럼프의 최측근인 일론 머스크는 재력과 영향력으로 독일과 영국의 극우 정당을 옹호하며 동맹국의 내정에까지 간여할 태세다.
트럼프의 정책들을 보면 19세기 말 매킨리 대통령과 맥락이 통하는 부분이 많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식민지로 이뤄진 세계화의 끝자락이다. 열강들이 충돌하고 정치체제 혁신이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던 때다. 매킨리 정부 이후 미국과 세계 정세의 행보를 되짚어 보면 오늘날 트럼프 정책이 가져올 파장을 가늠하는데 적잖은 단서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유럽 열강들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한다. 이때 미국은 북아메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한다. 당시 철강은 곧 국력이었다. 남북전쟁 후 재건이 활발해지면서 미국의 철강 생산능력은 유럽을 넘어섰다. 철도가 확장되며 경제 효율도 높아졌다. 석유산업도 발달해 전 세계 수요의 80%를 감당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급격한 생산의 팽창은 과잉의 부작용을 낳았다. 1873년과 1893년 금융공황이 발생하고 투자를 통해 경제적으로 연결된 유럽도 큰 타격을 입는다. 그 결과 1873~1893년 미국과 유럽은 ‘장기불황(Long Depression)’을 동시에 겪었다. 1890년 하원의원이던 매킨리는 최고 50% 세율인 관세법을 발의한다. 수입을 제한해 미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관세로 인해 물가가 급등하고 통화가치가 하락한다.
관세 정책은 실패했지만 매킨리는 오하이오 주지사에 당선되고 1896년에는 대통령 선거에까지 출마한다. 대선에서 매킨리는 강력한 통화정책(금본위제)과 친기업 정책으로 월가와 대기업 총수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다. 대통령에 당선된 매킨리는 역대 최고 수준의 보호무역 법령인 딩글리 관세법을 시행한다. 매킨리는 1900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하지만 1901년 암살당한다. 매킨리 때 시작된 미국의 보호무역은 1947년 관세 무역 일반협정(GATT) 체제 성립 때까지 계속됐다.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미국은 잇따른 비약적 영토의 확장으로 자국 내에서 충분한 수요를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에 맞서 유럽도 관세를 높였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매킨리의 뒤를 이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반독점법을 시행해 보호무역의 장벽 아래에서도 미국의 산업이 경쟁력을 잃지 않도록 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신대륙의 종주국을 자처하며 비(非)아메리카 국가들의 침략이나 진출을 철저히 경계했다. 미국은 19세기 먼로 대통령의 고립주의 선언으로 유럽과 정치적 분리를 선언한다. 유럽의 신대륙 개입을 막겠다는 목적에서다. 19세기 말 미국은 이를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패권 선언과 유럽의 불간섭 명분으로 재해석한다. 자국 우선 제국주의를 세계 경찰로 포장한 셈이다.
덴마크령인 그린란드는 지리적으로 북아메리카로 분류된다. 2차 대전 때에는 미국이 독일에서 탈환해 잠시 점령하기도 했다. 트럼프 당선 이전에도 미국이 덴마크에 구매 제안을 하기도 했다. 덴마크는 이를 거절한다. 트럼프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그린란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미국이 직접 그린란드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군사기지 설치는 충분히 가능하다. 트럼프의 그린란드 도발은 경제적 가치를 독차지하려는 시도일 가능성이 크다. 파나마운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운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때 미국이 건설했다. 파나마 운하는 미국 해군뿐 아니라 글로벌 물류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이 남미 동쪽으로 접근하는 데 중요한 통로다. 캐나다 역시 마찬가지다. 캐나단 1909년, 1926년 영국에게서 외교권과 군사권을 가져오며 완전히 독립한다. 그런데 경제 구조가 미국 의존적이다. 최근 그린란드와 파나마 운하, 캐나다와 관련된 트럼프의 주장들은 매킨리 정부 때 미국의 행보를 떠올리게 한다.
보호무역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초 미국의 경제력은 줄곧 유럽 대비 우위를 보인다. 특히 세계 1차대전으로 미국의 산업은 엄청난 호황을 맞이한다. 전후 엄청난 자본과 유동성이 미국으로 유입됐다. 미국의 자산 가격이 급등했다. 전후에는 유럽의 복구가 지연되면서 미국에서 만든 물건을 소비할 여력이 충분하지 않게 됐다. 독일에 대한 과도한 배상금 요구 탓이다. 미국의 생산 과잉은 유럽의 소비위축과 맞불려 자산 가격 하락으로 이어졌다. 1929년 대공황의 원인이다.
대공황 이후에도 미국은 최고세율 59%의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으로 보호무역을 오히려 강화했다. 유럽도 보복관세로 맞섰고 글로벌 무역이 퇴조했다. 패전 배상에 허덕이던 독일은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경제난에 빠진다.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에 성공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미국의 대공황은 대규모 유효수요가 만들어진 2차 세계대전으로 극복됐다. 전후 미국은 보호무역 대신 자유무역으로 선회한다. 소련에 맞서기 위해서다. 마셜플랜으로 유럽의 경제 발전을 지원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막대한 방위비 부담도 대부분 짊어졌다. 반세기 가까이 진행된 미국의 이런 정책은 소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끌어냈다.
미국의 보호무역 전환은 80여년 만의 대전환이다. 돌아보면 130여년 전 미국의 자국 최우선주의와 팽창주의는 결국 경제전쟁과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글로벌 질서가 대결과 갈등으로 치달으면 결국 약육강식이다. 한바탕 야만의 대결이 끝나면 결국 경쟁자를 이긴 승자의 패권이 공고해진다. 매킨리 이후 미국은 유럽을 꺾고 글로벌 패권을 차지한다.
미국의 정책변화가 우리 역사에 미친 영향도 크다. 매킨리의 후임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일전쟁을 정리한 포츠머스 조약(Treaty of Portsmouth)을 주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는다. 이 조약 체결 과정에서 미국은 필리핀 점령을 확실히 하기 위해 일본의 조선 강제 합병을 사실상 용인했다. 일본은 조선을 발판으로 제국주의를 본격화하고 이후 미국과 태평양전쟁까지 벌인다.
미국과 미국의 변화가 미칠 영향을 그 어느 때보다 잘 살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