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들 축하할 것”…트럼프 대외원조기구 해체에 신난 스트롱맨들

푸틴 측근 “똑똑한 조치”…오르반 “이보다 행복할 수 없어”

“시진핑 일대일로 확산”…서방식 민주주의·인권 보루 직격

활동조직 토대 붕괴 시작…“유럽 나서더라도 많이 늦을 듯”

 

지난 2023년 10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포럼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회담 중 대화를 나누고 있다. [AP]

[헤럴드경제=김영철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DOGE) 수장을 앞세워 단행한 국제개발처(USAID) 해제 작업을 진행하자 전 세계의 ‘스트롱맨’(권위주의 통치자)이 환호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국제원조기구인 USAID는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증진하려는 외국 단체들을 지원해왔는데, 해당국의 지도자들은 이 기관을 눈엣가시처럼 여겨왔다.

5일(현지시간) 미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급진적 미치광이들이 USAID를 운영해왔다”면서 해체를 선언하고 머스크가 USAID를 ‘범죄조직’으로 규정하며 직원들에게 휴직·해고를 통보한 후 러시아, 헝가리, 엘살바도르 등에선 일제히 환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보도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똑똑한 조치”라고 응원하고 나섰고, 뱌체슬라프 볼로딘 러시아 하원 의장도 USAID는 “범죄조직”이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조치를 환영했다.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가 지난 3일(현지시간) 브뤼셀의 에그몬트 궁전에서 EU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한 모습. [AP]

‘헝가리의 트럼프’로 불리는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도 페이스북 글을 통해 USAID를 통한 미국의 자금 지원 중단을 축하하면서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갱단 폭력을 단속하기 위해 권위주의 전술을 채택한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도 한 게시물에서 “자금이 야당 단체, 정치적 의제를 가진 NGO, 불안정한 운동에 흘러들어갔다”면서 USAID 지원프로그램을 비판했다.

USAID 예산, 해외선 상당한 영향력…러시아 투표 부정 포착하기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2022년 7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해군의 날 기념 퍼레이드에 참석한 모습. [로이터]

USAID 예산 중 민주주의 증진 예산은 전체 예산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해외에선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러시아에선 골로스라는 선거 감시단체가 미국의 지원을 받아 2011년에 치러진 의회 선거 과정에서 광범위한 투표 부정을 포착했다.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는 푸틴 대통령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상 최대의 시위로 이어졌고, 지난해 옥중 사망한 러시아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가 이끌었던 반체제 운동도 탄력을 받았다.

푸틴 대통령은 당시 외국에서 지원금을 받은 사람을 예수를 박해자들에게 팔아넘긴 유다에 비유했고, 이듬해에 USAID 자금이 러시아 단체로 들어오는 것을 완전히 차단했다.

이란은 미국이 자국 언론매체와 인권단체에 자금을 지원해 이란 지도부를 전복하려는 비밀 작전을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자금을 받은 단체를 ‘CIA(미 중앙정보국) 요원’으로 부르며 신뢰도를 떨어뜨리려고 했다.

“USAID 해체, 독재자들 축하하고 민주주의자들 한탄할 것”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5일(현지시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 파키스탄 대통령과의 회담에 참석한 모습. [AFP]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민주주의 프로그램 담당자인 토머스 캐로더스는 “USAID 해체 소식에 전 세계 독재자들은 축하하고 전 세계 민주주의자들은 한탄할 것”이라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벌이는 소규모 조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이것은 정부의 도둑질을 폭로하려는 반부패 활동가들이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독립 언론사들이 그 일을 할 자원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뉴욕에 본부를 둔 중국 내 노동자 인권 감시 단체 ‘중국노동감시’(China Labor Watch) 설립자인 리창은 “트럼프 행정부와 머스크의 행동은 중국과 다른 권위주의 정권에 상당한 기회를 창출했다”며 “미국이 대외 원조를 줄이고 경제 개발에 집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권, 환경 보호, 노동권을 소홀히 하면서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는 중국의 성공 모델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중국 내에선 USAID 폐쇄가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져 미중 패권다툼에서 중국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세력확장 전략으로 집중하는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육상·해상 실크로드)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나온다.

싱가포르 싱크탱크 동남아시아연구소(ISEAS)-유소프 이샥 연구소의 자얀트 메논 수석 연구원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인터뷰에서 “미국 영향력이 줄어 다른 국가가 공백을 메울 것”이라며 “분명히 중국이 그중 하나”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그간 일대일로가 경제협력, 동반성장 수단을 넘어 중국식 권위주의 체제를 세계에 확산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해왔다.

USAID 원조는 미국의 소프트파워를 세계에 확산하는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은 기관이다. 2023년에 USAID 예산은 미국 연방 예산의 0.7% 정도였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는 0.4% 정도였다.

USAID 대체? 실현 가능성 낮아

 

지난 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본부 밖의 국기가 펄럭이는 모습. [AFP]

미국이 USAID 해체에 나서면서 서방에선 유럽이나 민간 기부자가 미국이 빠진 자리를 메꿔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지만 실현 가능성이 크진 않다.

망명 중인 러시아 석유 재벌이자 푸틴의 정적인 반미하일 호도르콥스키는 지난 3일 텔레그램을 통해 자신과 동료 사업가인 보리스 지민이 “러시아어 미디어, 인권 및 분석 프로젝트, 우크라이나에서 운영 중인 인도주의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할 것이라고 했으나, 모든 지원금 수혜자에게 전액을 지원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싱크탱크 유럽개혁센터의 젤리케 크사키 수석연구원은 미국이 직접적 민주주의 증진 프로그램에 연간 약 20억달러(약 2조9천억원)를 지출하고 유럽이 약 40억달러(약 5조8000억원)를 지출하고 있다고 계산했는데, 유럽이 미국의 지출을 대체하기 위해 예산을 50% 추가 배정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전망했다.

그는 당장의 문제는 USAID 해체 속도라며 “지금 당장 이런 일이 일어났고, 문을 닫아야 할 조직이 많을 것”이라며 “유럽 국가들이 대응할 때쯤이면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한 생태계가 많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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