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으로 무너진 집안 가장 연기
“섬세한 감정, 파도처럼 밀려와”
“연습하며 두 아들 모습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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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강우가 연극 ‘붉은 낙엽’에서 열연하고 있다. 그는 이 연극을 통해 9년 만에 무대로 돌아왔다. [라이브러리컴퍼니 제공] |
연극은 에릭 무어의 대사로 시작한다. “처음 내가 이 집을 살 때 간절히 원했던 건 단단한 집, 아주 단단하고 바위처럼 튼튼한 집을 짓고 싶었다.”
어떤 바람은 삶을 지탱하는 동력이자, 살아가는 이유가 된다. 아무리 거센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안전한 집처럼 견고하고 아늑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그에게 그날의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의심, 그로 인한 균열과 붕괴를 불러온다.
에릭 무어를 연기하는 김강우는 최근 헤럴드경제와 만나 “첫 독백을 통해 ‘내 말 좀 들어보세요’라고 말하듯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관객에게 시선을 주고, ‘내 감정에 따라와 달라’며 연극의 문을 연다”고 말했다. 관객이 연극 내내 그의 심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김강우는 미국 작가 토머스 쿡의 동명 소설 ‘붉은 낙엽’(3월 1일까지·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을 무대로 옮긴 심리 추리극을 통해 무대로 돌아왔다. 연극 ‘햄릿-더 플레이’ 이후 9년 만이다. 오랜만에 서는 무대에 대해 그는 “하프 마라톤을 뛰는 기분”이라며 “4막에 접어들 때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릴 만큼 체력 소모가 크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 할 정도로 심리적으로도 지친다”고 말했다.
보통의 연극과 비교해 두 배에 달하는 대사량, 퇴장 한 번 없이 이어지는 무대, 쉴 새 없는 장면 전환은 물론 무대와 객석을 휘몰아치는 감정의 파고를 110분 동안 풀어내는 주인공이 바로 에릭 무어다. 그는 “연습 때마다 산봉우리를 하나씩 넘는 느낌이었다”며 “관객도 무대 위 배우도 기진맥진하게 되는 잔인한 연극”이라고 했다.
‘붉은 낙엽’은 옆집에 사는 여덟 살 여자아이의 실종 사건에 휘말린 가족에게 찾아온 비극을 그린다. 2021년 초연 당시 연극계 주요 상을 휩쓸며 호평을 받았다.
“‘의심이 의심을 낳는다’는 것이 제겐 가장 큰 주제였어요. 무대에선 사건이 파도처럼 밀려오니, 작은 의심이 확신으로 넘어가는 단계를 잘게 쪼개 표현하고자 했어요.”
에릭 무어를 만나며 김강우가 더한 그만의 ‘장치’가 있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의심하게 된 결과,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더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극초반 분위기를 띄우려 노력한다”고 했다.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누구든 어떤 아버지든 어떤 상황에서든 자식을 의심할 수 있고,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극초반 더 다정하고 평화로운 가정을 그리고자 했어요.”
김강우 역시 중학교 2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 두 아들을 둔 아버지다. 그는 “연습 중 머릿속으론 아이들의 모습이 연결됐다. 사춘기가 되며 점점 예전과는 다른 모습에 ‘내 아이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을 만큼 낯설고 놀라는 순간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이 연극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면 좋은 연극”이라고 덧붙였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그는 오랜만에 무대에서 처음 연기를 할 때의 설렘과 다시 마주했다. 그간 무대에서 꾸준히 러브콜이 왔지만 “한 번에 한 작품밖에 못 한다”는 그와 무대의 만남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대에선 늘 시험대에 선다는 느낌이 있어요. 100m 달리기를 하기 직전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 같은 느낌예요. 가장 행복할 때는 머리 위로 조명이 딱 떨어져 막이 오를 때예요. 그때 매우 많은 생각이 들어요. 아직도 20대 대학 시절 연극을 할 때의 그 느낌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평생하고 싶죠.”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