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계 손기정’ 연덕춘, 광복 80주년에 한국 국적·이름 되찾았다

대한민국 1호 프로골프 선수
1941년 일본오픈대회 우승
당시 日 국적·이름으로 기록
84년만에 韓 국적·이름 정정
분실된 우승 트로피도 복원
트로피는 독립기념관에 기증

대한민국 1호 프로골프 선수 연덕춘이 1941년 일본오픈 우승컵을 들고 있다. [KPGA 제공]

[헤럴드경제=조범자 기자] 1941년 5월 10일 일본 요코하마 호도가야 골프장. 스물여섯살의 한국 선수는 마지막 퍼트를 홀컵에 떨어 뜨린 뒤 두 팔을 번쩍 들었다. 일본 최고 권위의 대회인 일본오픈 골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인 첫 우승을 거머쥔 순간이었다. 4라운드 최종합계 290타. 2위와는 3타 차이였다. 하지만 일본 골프 역사에 새겨진 이 대회 챔피언은 일본의 노부하라 도쿠하루(延原德春)였다.

‘골프계 손기정’으로 불린 대한민국 1호 프로골프 선수 연덕춘(1916∼2004)이 광복 8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일본 골프 역사에서 사라졌던 자신의 국적과 한국 이름을 되찾았다.

한국프로골프협회(KPGA)는 12일 일본골프협회(JGA) 공식기록에 표기된 1941년 일본오픈 우승자 노부하라 도쿠하라의 국적과 이름을 ‘한국의 연덕춘’으로 수정했다고 발표했다.

KPGA는 이날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대한민국 1호 프로골프선수 고 연덕춘 역사와 전설을 복원하다’ 행사를 열고 “지난해 10월부터 대한골프협회(KGA)와 손을 잡고 JGA와 연덕춘의 국적과 이름 수정에 대한 협의를 이어왔다”며 “올해 4월 JGA로부터 국적과 이름을 공식 변경하기로 결정했다는 공문을 받았다”고 밝혔다.

JGA는 4월 홈페이지를 통해 “일본골프협회는 대한민국 골프협회와 협의하여 1941년 일본오픈 골프선수권에서 우승한 노부하라 도쿠하루의 표기를 본명인 연덕춘으로 수정하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골프 선수 연덕춘은 태평양전쟁 전 마지막 일본오픈에서 우승했고, 후배 육성에 힘썼으며 한국프로골프계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현재 JGA 홈페이지 역대 우승자 명단에는 1941년 대회 챔피언으로 연덕춘(延德春)의 이름이 정확한 영문 발음과 함께 명시됐다.

일본골프협회 홈페이지에 1941년 일본오픈 우승자 연덕춘의 이름이 본명과 정확한 발음으로 표기돼 있다. [JGA 홈페이지]

이와 함께 KPGA는 한국전쟁 당시 유실된 연덕춘의 일본오픈 우승 트로피도 복원했다고 밝혔다. 복원된 우승컵엔 연덕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김원섭 KPGA 회장은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국적·이름 수정과 함께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트로피도 복원했다”며 “우승컵은 향후 독립기념관에 기증할 예정”이라고 했다.

야마나카 히로시 JGA 최고운영책임자는 “한국 측 요청을 받고 심도있게 논의한 결과 만장일치로 수정을 결정했다. 연덕춘 본인도 천국에서 기뻐할 것”이라며 “올해는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한일 스포츠 교류의 초석을 다져준 이가 바로 연덕춘이다. 앞으로도 양국이 함께 발전하며 좋은 라이벌과 친구로서 세계 무대에서 빛나길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현재 추진 중인 일본골프 명예의 전당에 한국인 최초로 일본오픈에서 우승한 연덕춘을 명예의 전당 헌액 후보로 올리는 방안을 논의중”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전쟁 당시 유실된 연덕춘의 1941년 일본오픈 우승 트로피가 복원됐다 [KPGA 제공]

연덕춘은 한국 골프의 선구자다.

KPGA가 매년 그 해 가장 적은 평균 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주는 ‘덕춘상’으로 잘 알려진 최저평균타수상 이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6세인 1932년 한국 최초의 골프장인 경성골프클럽에 조카를 만나러 갔다가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캐디 보조로 일하며 골프에 흥미를 느낀 그는 한 일본인이 준 아이언 하나로 밤새 연습하며 프로 골퍼의 꿈을 키웠다.

1934년 일본으로 골프 유학을 떠난 그는 그 해 12월 도쿄 가나가와현에 위치한 후지사와골프클럽에서 본격적으로 수업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타고난 재능과 연습으로 일본 프로 자격을 획득했다. 1935년 첫 출전한 일본오픈에서 컷오프의 고배를 마신 그는 매년 일본오픈을 두드린 끝에 1941년 마침내 첫 우승의 꿈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챔피언 기록에는 일본 국적의 일본 이름으로 새겨졌다. 그러나 그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당시에도 널리 알려졌고, 5년 전 손기정(1912~2002)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과 함께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긍지를 알리기에 충분했다.

1958년 42세 나이로 은퇴한 뒤엔 후배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의 레슨을 받은 한장상은 연덕춘 이후 31년 만인 1972년 일본오픈에서 정상에 올랐다. 1963년 친목단체 성격의 프로골프회 결성을 주도했고, 이때 프로골퍼 자격 규정과 골퍼가 지켜야할 의무 조항을 명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1968년 후배들과 KPGA를 창립한 연덕춘은 1호 회원으로 등록했고 2대 협회장을 맡아 한국 골프 발전에 앞장섰다. 최경주가 한국인 최초로 PGA 투어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본 뒤 2004년 5월 향년 8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1호 프로골프 선수 연덕춘이 1956년 런던 월드컵 때 플레이하는 모습 [KPG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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