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산다고 대학 입시 불이익이라니…양극화 키우는 고교학점제 [세상&]

개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하고 맞춤형 교육과정을 시행하겠다는 고교학점제가 역설적으로 양극화를 부르고 있다. 현장에서는 고교학점제의 완전한 개편이 이뤄지지 않으면 지역별 과목 개설 여건과 수업의 질 차이로 격차가 극심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서울 관악구 당곡고등학교에서 고교학점제 ‘스마트콘텐츠 실무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연합]


[헤럴드경제=김용재·안효정 기자] #1. 서울 송파구 A여자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지안(17·가명) 양은 고교학점제 3개년 교육과정 편성 과목 97개 가운데 본인이 원하는 수업을 골라 들을 수 있다. 원하면 인근 B학교의 수업을 온라인으로도 들을 수 있다. 심지어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강의를 열어달라’고 학교에 요구할 수도 있다.

#2. 강원도 C고등학교에 다니는 송영찬(17·가명) 군은 선택할 수 있는 고교학점제 과목이 71개다. 이 학교의 학생 수는 250명, 교사는 28명뿐이다. 송군은 지방에서 상대적으로 도심에 속하는 지역에 다니는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인근에 원하는 수업을 개설한 학교도 없다. 온라인 수업도 송군에겐 기회가 없다.

이양과 송군은 교육부가 마련한 고교학점제 정책의 첫 적용 학년이지만, 환경은 크게 다르다. 제도의 취지는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고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것이지만 지역·학교마다 사정이 제각각이어서다. 올해 고등학교로 진학한 학생들은 졸업하기 전까지 192학점 이상을 취득해야 한다. 본격적으로 선택과목을 골라 듣게 되는 2학년부터는 수업 선택의 폭에서 격차가 커질 수 있단 지적이다.

개설된 수업 수 평균, 도심 98개 vs 지방 86개


25일 교육부 등에 따르면 고교학점제가 시행된 이후 도시와 지방의 선택권 불균형이 크게 발생했다. 도시에 평균적으로 개설된 수업은 평균 약 98개에 달하지만 지방에 개설된 수업 개수는 평균 86개에 불과하다.

헤럴드경제 취재를 종합하면 실제로 학교별 고교학점제 편성과목의 격차는 학교 규모·교사 수·도심과 비도심 여부 등에 따라 크게 났다. A여자고등학교의 경우 3년 동안 97개 수업을 편성할 수 있었으나 C고등학교는 개설할 수 있는 과목을 65개로 제시하는 등 일부 군 단위 지역에선 수업이 70개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지방일수록 교사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서 선생님 한 명이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경우가 있어 수업의 양과 질 모두 도시와 지방 간의 격차가 크다. 교육통계서비스에 따르면 2025년 서울·경기 등 수도권의 교원수는 5만2743명인데 반해 강원도는 4250명·세종시는 1450명·제주도는 1778명에 불과하다.

교실이 텅 비어있는 모습. [게티이미지 뱅크]


지방 교사들 “수도권 교사 양·질 모두 지방보다 우위…이동수업도 허상에 불과”


고교학점제를 수행하는 교사들 역시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원도 내 고등학교에 재직 중인 한 교사는 “교육에 관심이 떨어지는 지방권일수록 교육 환경이 잘 갖춰진 서울 같은 지역에 비해 고교학점제 운영 환경이 아주 부족하고 열악하다”면서 “최근 온라인 등 비대면 교육 환경이 갖춰지고 발달했다 하더라도 수도권과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교사 수도 압도적으로 부족하다. 수도권의 경우 교사의 수와 질 자체가 두텁고 좋지만 지방은 다양성도 덜하다”면서 “(지방은) 학생 선택 비율이 적은 과목의 교사를 수급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아이들의 수업 참여율과 적극성도 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전라북도에 재직 중인 다른 교사 역시 “5년간 준비를 했다고 하는데 현재 시행되고 있는 고교학점제는 격차를 부른다”며 “자기가 원하는 과목을 듣는 게 아니라 대입에 유리한 과목을 고르는 제도가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이어 “교사들이 맡게 되는 수업도 기존에 2개에서 4개 이상으로 늘어났는데, 취지만 좋지 모순이 가득한 셈”이라면서 “이동 수업이나 온라인 수업 역시 지방에서는 허상과 같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학교마다 과목 선택권이 제한되면서 지방에서는 택시비를 지원하는 등 학생들의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이 역시 일부 학교로 제한됐다. 학생 수와 교사 수가 적은 지방 소규모 학교에서는 고교학점제 개설 과목을 늘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열린 ‘고교학점제 폐지 촉구 양육자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


대학 입시에도 영향 주는 고교학점제 격차…원하는 과목 ‘수강 불가’


개설 과목의 격차는 ‘대학 입시’에도 영향을 주기에 학생들의 불만도 크다. 지방 학생일수록 정시가 아닌 수시를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수시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학생부 전형은 지원 학과에 맞는 과목 수강 이력 등을 기재해야해 과목 선택권이 적은 지방이 불리해지고 상대적으로 과목 선택권이 많은 수도권 고등학교·자율형 사립고 등이 유리해진다는 것이다.

경남 지역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정이현(17) 군은 “원하는 과의 가산점을 주는 과목이 학교에 없는데 온라인이나 비대면으로 해당 과목을 들을 수도 없다”면서 “입시 정책이라는 것이 수도권에 있는 학생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는데 이게 맞느냐”라고 꼬집었다. 실제로 올해부터 특정 학과에서 지정 과목을 수강하면 가산점을 주는 경우가 생겼다.

최근 대치동 등 일부 학원가에서도 ‘자녀가 공부를 잘 하면 자사고나 특목고를 보내라’는 말이 거론된다. 내신 경쟁이 상대적으로 치열해도 일반고 대비 교사와 특색있는 과목이 많다는 이유에서다. 고교학점제 시행 이후로는 특색있는 과목을 수강할수록 학생부를 잘 준비할 수 있어 입시에 유리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최교진 교육부 장관이 16일 청주 엔포드호텔에서 열린 시도교육감들과의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교육부 제공]


전문가 “온라인 실시간 수업 확대”…교육부 “대학생 멘토링·온라인 학교 강화”


전문가들은 지역 간 격차를 줄이려면 온라인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교원 수를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여러 과목을 개설할 수 없는 학교에 외부 강사의 ‘온라인 실시간 수업’을 늘려야 한다”라면서 “온라인으로 실시간 수업이 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학생들이 자기가 원하는 과목을 모두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조언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육감은 “고교학점제 안착을 위해선 우선 교원 정책부터 수정해야 한다. 현재는 학생 수 대비 교사 수가 너무 적은 것이 문제”라면서 “수업 수요 중심으로 교원 정책을 수정하고 필요에 맞는 맞춤형 교사를 늘려야 한다”고 했다.

교육부는 이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교사 정원을 늘리는 등 인프라 개선에 나설 계획이다. 최교진 교육부 장관은 지난 21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지방 읍면 지역 학생들도 충분히 원하는 과목을 수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온라인 학교를 강화할 생각”이라면서 “예산 지원과 함께 도시보다 열악한 환경을 보완하기 위해서 자기주도 학습센터도 만들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대학생과 일대일 멘토링 사업을 하는 등 지역의 학습 인프라 개선에도 나설 예정”이라면서 “추가적으로 고교학점제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국가교육위원회와 긴밀하게 협의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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