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발은 이제 그만~” …‘한한령 해제’ 기대에도 문화계 차분한 이유

시진핑 방한 후 고개 든 ‘한한령 해제’ 기대감
가요계도 한한령 동향 예의주시 ‘신중 접근’
대형 K-팝 그룹일수록 민감…그래도 ‘매력적’

 

가수 지드래곤이 31일 경북 경주시 라한셀렉트호텔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환영 만찬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연합]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016년 사드 배치 이후 ‘한한령 해제’ 기대는 가요계 최대 설레발이었죠.”

한중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중음악계에서도 다시 한한령 해제에 대한 기대감이 고개를 들었다. K-팝은 물론 드라마, 영화, 예능을 아우르는 K-콘텐츠의 최대 시장이었던 중국의 문이 막힌 이후, 지난 9년간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 동향은 내내 업계의 최대 관심사였다.

중국은 지난 2016년 주한미군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보복 조치의 하나로 중국 내 한국 영화, 드라마, 게임, 대중문화 공연은 물론 한국 연예인의 방송, 광고 등을 일절 금지했다. 중국 측은 ‘정부 차원의 한한령은 없다’는 것이 공식 입장이지만, 지금까지 중국 내에선 각 지방정부와 민간 차원에서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K-콘텐츠를 알아서(?) 제한해 왔다.

올해 한한령 해제 기대감은 유달리 컸다. 올 초 우원식 국회의장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문화 교류 관련 이야기를 주고받은 이후, 변화의 기류가 감지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난 5월 중국 IT 대기업 텐센트가 SM엔터테인먼트의 지분 약 10%를 인수하며 업계엔 긍정적 전망이 나왔다. 심지어 블룸버그에서도 “이번 인수는 중국이 거의 10년간 유지해 온 K-팝 공연 금지령(한한령)을 해제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뤄진 것”이라며 “SM엔터테인먼트와 같은 한국 기업이 텐센트와의 관계를 통해 음악 배급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지난 5개월 사이 전망과는 다른 상황들이 등장했으나, 11년 만에 한국을 국빈 방문한 시 주석이 정상회담 이후 만찬에서 박진영 대중문화교류위원회 위원장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공개되자, 한중 양국에서도 관심이 쏠렸다.

지난 1일 경주에서 진행된 국빈 만찬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박진영 대중문화교류위원장이 대화하고 있다. [박진영 소셜 미디어 갈무리]

박 위원장은 지난 2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시진핑 주석을 만나 뵙고 말씀을 나눌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경청해 주시고 좋은 말씀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대중문화를 통해 양국의 국민들이 더욱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적었다.

만찬장에서 오간 이야기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나,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여당 간사인 더불어민주당 김영배 의원이 ‘한중 정상회담 만찬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K-팝 가수들의 중국 베이징 공연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내용의 글을 올리며 양국 문화수교가 대전환을 맞지 않겠냐는 기대가 높아졌다.

다만 대중문화교류위는 이후 보도자료를 통해 “이에 대해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성급하다는 판단”이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가요계 역시 지난 9년간 한한령 해제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실망을 붙들고 지냈다. 지금은 모든 상황을 차분히 예의주시하고 있다. 섣부른 기대나 호들갑도 떨지 않는다.

트와이스·아이브 팬미팅, 인디밴드 공연 허가와 취소 사이

한한령이 이어지는 동안에도 업계에선 현지 진출과 관련, 크고 작은 변화가 해마다 있었다. 특히 올해는 두드러진 움직임이 많았다. 가요계에 따르면, 올초 한한령 해제 기대감이 일며 중국의 엔터테인먼트와 공연기획사 프로모터들이 한국을 찾아 국내 가요기획사 관계자들과 만나기도 했다.

K-팝 빅그룹인 트와이스를 비롯해 아이브, 김재중이 팬미팅과 팬사인회를, NCT드림이 팝업스토어까지 열자 업계도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 5월엔 보이그룹 이펙스가 전원 한국 국적인 K-팝 그룹 최초로 중국 푸저우에서 단독 콘서트를 연다는 소식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연은 결국 취소됐다.

이 밖에도 걸그룹 케플러가 10곡 이상의 무대를 더한 팬콘(팬 미팅)을 예고했으나 ‘불가피한 현지 사정’을 이유로 연기했다.

K-팝 그룹이 다수 소속된 기획사 관계자는 “노래를 하지 않는 팬미팅이나 팬사인회 정도는 허가가 됐는데, 최근엔 현지 여건에 따라 수락과 취소가 반복되고 있다”며 “중국 시장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열리기도 하고, 기대하면 빗장을 걸어 잠근다”고 토로했다. 덕분에 국내 기획사들은 중국 시장에 대해 마음을 비우고 지켜봐야 한다는 내성이 생겼다고 말한다.

트와이스 [JYP엔터테인먼트 제공]

K-팝 그룹이 아닌 인디 밴드의 경우 한한령에도 불구, 만리장성의 문을 더 쉽게 넘었다. 지난해 재즈 음악가 마리아킴이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공연했고 미국 국적의 한국계 인디 가수 검정치마가 지난해 12월 말 후베이성 우한에서, 올해 1월 초 허난성 정저우에서 공연을 성사했다. 한국 국적의 3인조 힙합 그룹 호미들도 지난 봄 중국 투어를 가졌다.

중국에 글로벌 아티스트를 초청하는 공연 프로모터인 아이 징(Ai Jing) 헤이즈 사운드 설립자이자 타이허 뮤직 그룹 쇼스타트의 시니어 컨설턴트는 “지역마다 허가 기준과 요건이 각기 다르다”며 “북경, 상해, 광저우의 문화부에 똑같이 한국계 DJ 예지와 밴드 세이수미의 공연 신청서를 넣어도 광저우에선 승인되지 않았는데 북경에서 난데없이 허가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중국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조차 한국 가수들의 ‘허가 기준’이나 허가 이후 공연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한 답을 확실하게 내놓지는 못한다. 다만 아이 징 대표는 “소위 말하는 빅그룹, 인기가 많고 영향력이 큰 가수일수록 중국 내 활동 가능성이 더 작다”며 “이는 K-팝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팝 스타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즉 중국 당국에선 ‘대형’ K-팝 공연일수록 더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2021년 8월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은 과도한 팬덤 활동을 규제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중국판 ‘프로듀스 101’으로 불린 ‘청춘유니3’ 당시 스폰서 회사인 멍뉴유업이 우유 뚜껑의 QR코드를 찍어 복수 투표를 할 수 있게 하는 이벤트를 열자, 팬들이 우유를 잔뜩 사서 투표만 하고 버렸다는 논란이 일며 시작됐다. 그 숫자가 무려 27만 병이나 됐다. 현지에선 중국의 팬덤 문화가 K-팝에 기반한다고 보며, K-팝 문화와 시스템까지 암암리에 금지가 됐다. 팬덤 문화가 사회적 박탈감을 주고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미친다고 봤기 때문이다.

아이 징 대표는 “중국 내 혐한을 불러오거나 사회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끼치는 정서적 민감도 역시 현지에서의 활동 가능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며 “그 때문에 한한령 해제 이전부터라도 중국 관련 발언에 주의하고, 중국향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사용해 현지 팬들과 친밀하게 다가서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K-팝 영토 넓어졌지만 中은 여전히 ‘매력적인 시장’

K-팝은 2016년 이후 방탄소년단 블랙핑크와 함께 동아시아를 넘어 미국, 유럽 시장으로 영토를 확장한 상태지만, 중국 시장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K-팝 음반 판매량이 2023년 1억장을 넘어서며 최고점을 찍은 이후 서서히 꺾이고 있어서 중국 대륙은 새로운 수출 창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공연의 규모 역시 말할 것도 없다.

다만 K-팝 기획사 관계자는 “K-팝 그룹의 공연을 성사하려면 최소 3000석 규모에서 1만 석 이상은 가야 한한령 해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이브 두 번째 월드투어 [스타쉽 엔터테인먼트 제공]

현재 K-팝 기획사들은 여전히 중국을 겨냥한 전략을 세우고 있다. 하이브는 소속 아티스트의 중국 활동 지원과 현지화 그룹 데뷔를 위해 하이브 차이나를 설립했고, JYP에선 지난 8월 두 번째 현지화 보이그룹 뻔푸소년(奔赴少年)CIIU의 데뷔를 알렸다. SM은 텐센트와 향후 2~3년 내 중국 현지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키겠다는 계획이다.

한한령 해제와 무관하게 APEC 홍보대사로 정상 만찬에서 무대를 꾸민 가수 지드래곤은 중국 항저우에서 ‘위버멘시’ 미디어 전시를 앞두고 있다. 앞서 지난 5월 상하이 전시와 함께 월드투어를 계획했으나 돌연 연기됐던 일정을 오는 15일부터 내달 7일까지 여는 것이다. 턱밑으로 다가온 일정인 만큼 지드래곤의 전시가 ‘한한령 완화’의 신호탄이 되지 않겠냐는 기대도 나온다.

익명을 요청한 대형 기획사 관계자는 “한한령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에도 중국 시장은 늘 미지수와 물음표 같은 시장이었다”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예기치 않은 문제와 결과가 공존했고 지금도 변수가 많고 예측하기 어려운 시장이라는 점이 적극적 투자보다는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다. 다만 한한령이 완화된다면 다시 K-팝 산업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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