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점수 900점 시대…이용자 모두 ‘금리 산정 불이익’[현실과 동떨어진 금융계급제]

평가점수 인플레, 900점 이상 47%
대출 승인점수↑…고신용자도 거절
신용인정 힘든 중·저신용자 타격 커
“시장 왜곡·소비자 신뢰 하락” 지적
“상환능력 반영 신평모델 개발 시급”


국민 2명 중 1명이 1000점 만점에 900점 이상을 받을 정도로 신용평가점수가 상향 평준화해 있다. 이를 기반으로 한 신용점수별 금리산정이 너무 촘촘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사진은 서울 중구 명동거리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 [연합]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금융계급제’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금리 산정 체계를 강도 높게 지적하고 나선 가운데 신용평가사의 신용점수를 바탕으로 하는 현행 신용평가모델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민 2명 중 1명은 1000점 만점에 900점 이상을 받을 정도로 신용점수가 상향 평준화해 있다 보니 신용점수별 촘촘한 금리산정이 요원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에 높은 신용점수를 받더라도 은행으로부터 대출 승인을 거절당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 전반적인 대출 문턱이 높아지면서 신용점수가 낮은 이들이 금융서비스 접근에 어려움을 겪는 소외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 고신용자와 중·저신용자 모두가 불이익을 받고 있는 셈이다. 특히 신용점수 산정 기준이 채무 상환 등 재무 정보에 치중해 있다 보니 금융 이력이 부족한, 이른바 씬 파일러(thin-filers)가 제대로 된 신용도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한계는 뚜렷하다.

이 대통령이 현행 금융제도를 “가난한 사람이 비싼 이자를 강요받는 금융계급제”라고 규정한 것과 달리 현실은 돈을 빌린 후 약속한 기한에 갚을 수 있는 능력, 즉 신용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한계 속에서 금융 소외와 불평등 문제가 뒤엉켜 방치돼 있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25일 신용정보회사 나이스평가정보에 따르면 신용점수 900점 이상을 받은 사람은 지난해 말 기준 2313만1315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신용평가 대상자 4921만8719명의 47.0%다. 통상 우량 신용자로 분류되는 800점 이상까지 범위를 넓히면 그 인원은 3394만3163명, 비중은 전체의 69.0%에 달한다. 3명 중 2명 이상이 우량 평가를 받고 있다는 얘기다.


같은 시기 코리아크레딧뷰로(KCB)의 신용점수별 인원을 봐도 전체 5005만8723명 중 44.3%인 2216만2336명이 900점이 넘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950점 이상의 초고신용자도 전체의 28.0%로 1400만명에 육박했다.

양사의 신용점수 분포를 4년 전과 비교해 보면 최근 신용점수 상향화 흐름은 더욱 선명해진다. 2020년 말 나이스평가정보 기준 900점 이상 획득 비중은 40.8%였다. 4년 만에 6.2%포인트 늘었다. KCB의 고신용자 비중도 4년 전에는 지금보다 5.7%포인트 낮은 38.6%에 불과했다. 900점 이상의 비중이 증가하고 나머지 점수대의 비중은 감소하는 신용점수 인플레이션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제 주요 은행의 대출 승인 신용점수대도 점차 올라가고 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9월 취급된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가계대출 평균 신용점수는 KCB 기준 939.4점으로 집계됐다. 같은 시기 분할상환식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이들의 평균 신용점수는 950.8점에 달했다. 관련 공시 첫해인 2023년 같은 달보다 각각 14.6점, 26.0점 뛰었다.

이는 신용점수 인플레이션과 함께 대출 문턱도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신용점수의 변별력이 떨어지면서 금융기관은 신용점수만으로 위험을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대출 심사를 더욱 보수적으로 강화하고 있고 이에 따라 고신용자조차 대출받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신용점수 변별력 저하는 중·저신용자에게 더욱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점수 격차가 좁혀져 신용 상태를 제대로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 위험도에 비해 대출 심사나 금리 산정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신용점수가 높은 이들까지 제2금융권으로 밀려나면서 중·저신용자가 설 자리를 잃는 문제도 발생한다.

사회 초년생이나 은퇴자처럼 금융거래가 많지 않은 씬 파일러의 경우 신용도 파악이 제한적이기에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고 이 때문에 변별력이 낮은 신용평가모델에선 더욱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신용점수가 워낙 상향 평준화하다 보니 대출 심사의 일차적인 지표로도 의미가 많이 없어진 상황”이라며 “특히 정부의 규제로 대출 총량이 제한돼 있어 신용점수가 높아도 대출이 거절되는 사례가 꽤 있다. 애매한 신용점수로는 대출받기가 더 어려워진 게 현실”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는 신용평가모델의 변별력이 흐려지면 오히려 성실하게 빚을 상환해 온 차주들이 피해를 보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풍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차주의 상환 능력을 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신용평가모델 개발이 필요하다는 제언이 나온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대출 시장은 기본적으로 수요·공급 원리에 따라 운영돼야 한다”며 “변별력이 약해진 신용점수 체계가 유지되면 상환 의지가 높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동일한 등급으로 묶여 같은 금리를 적용받는 시장 왜곡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대기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신용점수가 높은 고객이 대출 승인을 거절당하는 빈도가 높아지면 신용점수에 대한 금융소비자 신뢰도가 하락할 수 있다”며 “이는 자칫 금융시스템의 작동 방식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신용점수 신뢰도를 높일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김은희·김벼리·유혜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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