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된 ‘김부장’ 같은 스크루지…“2025년 대한민국에도 유효할 이야기” [인터뷰]

5일 서울시뮤지컬단 ‘크리스마스 캐럴’ 개막
‘장수탕 선녀님’ 히트시킨 콤비 정준·조한나
산업화 시대 계급 갈등, 2025년에도 공명


뮤지컬 ‘크리스마스 캐럴’의 콤비 조한나 작곡가(왼쪽), 정준 작가 [세종문화회관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내가 걸어가는 만큼 내 과거, 내가 적어가는 만큼 내 현재, 내가 꿈꿔가는 만큼 내 미래, 인생을 써가는 건 바로 지금” (뮤지컬 ‘크리스마스 캐럴’ 넘버 ‘안녕 스크루지’ 중)

누구에게나 후회의 순간은 있다. 앞만 보고 달리다 옆을 보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아 순수한 날들을 망각할 때가 있다. ‘측은지심’은 웬 말, 내가 너무 가여우니 타인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다. 괴팍한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처럼 말이다.

어릴 적 한 번쯤은 만나왔을 그 노인이 돌아왔다. 이번엔 좀 다르다. 얼굴 한가득 돈 욕심을 덕지덕지 붙이고 다녔던 그가 시간 여행을 떠나자, 어쩐지 애잔하고 애처롭다. 동갑내기 뮤지컬계 콤비 정준(45) 작가와 조한나(45) 작곡가의 신작 가족 뮤지컬 ‘크리스마스 캐럴’(12월 5일 개막,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이다.

2026년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수록될 예정인 뮤지컬 ‘날아라 박씨’(2013)을 시작으로 ‘장수탕 선녀님’의 초대박을 이끈 콤비의 이번 선택은 찰스 디킨스 원작의 ‘크리스마스 캐럴’. 세종문화회관 산하 단체인 서울시뮤지컬단이 연말을 맞아 야심차게 준비한 가족 겨냥 콘텐츠다.

굳이 고전을 재해석하는 현대화를 시도하진 않았으나, 시대는 공명했다. 산업혁명기 노동계급의 박탈감과 계급 갈등, 아동 노동의 부당함을 다뤘던 이야기는 현재의 자본주의 시대와 맞물리며 단단한 연결고리가 채워졌다.

정준 작가는 “사회 비판적 시각으로 당대를 봤던 소설은 자본주의가 이어지는 지금도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봤다”며 “2025년 대한민국 서울의 관객에게 어떤 의미로 새롭게 다가올 수 있을지 고민하며 각색했다. 이 작품이 남녀노소 모두에게 적합한 유효한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서울시뮤지컬단 ‘크리스마스 캐럴’ [세종문화회관 제공]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이야기이나, 뮤지컬에선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다. 무 자르듯 구두쇠 영감의 단면만 부각됐던 여느 콘텐츠와 달리 스크루지의 서사와 내면이 보다 밀도 있게 다뤄진다.

정 작가는 “원작이 다룬 대로 아이, 청년, 중년, 노년의 스크루지로 스펙트럼을 넓혔다”며 “이를 통해 관객들은 어느 한 조각에서든 자기의 모습을 조금은 비춰보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특별히 염두한 세대는 중장년층이다.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고단한 하루하루를 살다 본성을 잃은 채 나를 흘려보낸 이 땅의 ‘김 부장’(tvN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같은 사람들이다.

정 작가는 “스크루지가 가장은 아니지만, 기존 뮤지컬 시장에서 소외된 중년 남성들을 주인공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고단함, 가장으로서 느끼게 되는 외로움을 위로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작품에도 은퇴를 앞둔 60세의 서울시뮤지컬단 단원이 출연한다.

송년 분위기를 물씬 담아낸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막을 올리는 뮤지컬인 만큼 음악은 이 무대의 핵심이다. 조한나 작가는 “워낙 가사를 기가 막히게 써 작곡가가 곡을 붙이기 좋은 대본”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선화예중, 예고를 함께 나왔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공통 분모에 친구가 됐고, 지금은 밥벌이를 공유하는 동료로 10년째 활동 중이다.

정 작가는 “작가는 언어 혹은 글로써 음악을 짓는 역할이라 조금 더 리듬감이 있고 음악적인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대사는 노래처럼, 노래는 대사처럼 하려는 것이 나만의 목표”라고 했다. 친구의 대본을 받아 든 작곡가는 수월하게 곡을 써 내려갔다. 정준 작가도 고등학교 때까진 피아노를 전공했다.

조 작곡가는 “크리스마스 캐럴이라고 하면 1년 중 특별한 날인 만큼 가지고 있는 음악적 정서가 있다”며 “요즘 캐럴이 아닌 음악적 풍성함을 살릴 수 있는 고전적인 캐럴, 유럽 한복판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상상할 수 있는 우리만의 캐럴을 만들어봤다”고 했다.

뮤지컬 ‘크리스마스 캐럴’의 콤비 조한나 작곡가(오른쪽), 정준 작가는 찰스 디킨스 원작의 소설을 무대로 올리며 ‘우리만의 캐럴’을 만들었다고 했다. [세종문화회관 제공]


익히 알려진 캐럴이 나올 법도 하나, 조한나 작곡가는 어떤 곡도 차용하지 않고 16개의 창작곡을 썼다. “밝은 계열의 화음과 사람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살려 크리스마스의 따뜻한 정을 담고자 했다”는 귀띔이다. 다양한 계층과 세대의 인물들이 나오는 만큼 음악은 화려함과 소박함, 따뜻함과 공허함의 대비가 극명하게 드러나 ‘듣는 맛’을 더했다.

무대의 강점은 원작에 상상력을 더하고, 소설이 구현하지 못한 움직임과 음악으로 생동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원작과 가장 큰 차별점은 ‘정령’의 존재다. 원작 속 유령을 ‘정령’으로 바꿔 한 명의 배우(리사, 이연경)가 과거, 현재, 미래의 정령으로 1인 3역을 해낸다. 시간을 넘나드는 세 정령의 메인 음악 장르도 각기 다르다. 과거의 정령은 영국의 ‘메리 포핀스’의 고풍스러운 스타일, 현재는 ‘파워풀하고 그루브’한 장르, 미래는 앰비언스 장르로 차별화를 뒀다.

정 작가는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무대”라며 “소설에 등장하는 가난과 무지 캐릭터가 무대에도 나온다. 그것이 자라나 재난과 파멸이 돼 미래의 정령과 함께 무대를 휩쓸며 춤추는 장면을 만들었다”고 귀띔했다.

스크루지와 정령의 시간여행은 한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며 ‘나를 만나는 시간’이다. 정 작가는 “원작에선 빠졌던 순수하고 따뜻한 어린 시절의 스크루지가 구두쇠로 불리게 된 과정, 그가 돈에 집착하는 과정을 메우기 위해 상상력을 가미했다”며 “스크루지가 스스로 불러온 외로움이지만 변화의 의지를 가지고 미래를 바꿔나가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날 곡이 바로 듀엣곡 ‘안녕 스크루지’다. ‘로빈슨 크루소’를 열심히 읽은 어린 스크루지의 이야기에서 확장해 만든 곡이다.

모처럼 온 가족, 전 세대가 함께 할 만한 가족 뮤지컬이다. 두 사람은 “다섯 살 아이도 ‘케이팝 데몬 헌터스’ 노래를 부르는 때인 만큼 가족 뮤지컬이라고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화려한 크리스마스 풍경에 가려 미처 보지 못했던 따뜻한 겨울을 맞을 수 있는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조한나 작곡가는 “내게 뮤지컬은 판타지”라며 “하룻밤 공연을 보고 기분 좋게 극장을 떠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곡을 썼다”고 했다.

“이 무대가 모두에게 특별한 나들이, 삼종 선물 세트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어요. 공연을 보러와서 돌아가는 길까지 일회성이 아닌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소통 창구가 되고, 마음과 여유를 나누는 따뜻한 겨울이 되길 바랍니다.” (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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