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환경오염 피해구제 증명부담 완화…“개연성 증명으로 충분”

대법원. [연합]

[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유해 화학물질 누출 사고와 관련해 대법원이 피해자들의 인과관계 증명 부담을 크게 완화했다.

대법원은 “여러 간접사실을 통해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볼 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증명하면 인과관계가 추정된다고 봐야한다”며 “오염물질이 피해자에게 도달해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직접 증명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최초로 선언했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대법관 노정희)는 충남 금산군 인근 마을 주민들이 반도체 소재 생산 기업 A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주민들 측 승소로 판결한 원심(2심)을 확정했다. 이로써 주민 약 20명이 1인당 700만원 및 지연이자를 배상받게 됐다.

사건은 2016년 6월, A사의 한 공장에서 불산과 물이 최대 약 900kg 유출되면서 발생했다. 순도55%의 불산 일부가 공장 외부로 흘러가면서 약 33kg의 불화수소 가스가 발생했다. 이는 유독 물질로 악취가 퍼지면서 공장 인근 마을 주민 100여명이 초등학교로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심각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일부 주민들은 어지럼증·두통 등을 호소해 치료받았다.

주민 19명은 A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과거 2013년, 2014년에도 2차례 유출 사고가 발생한 점 등을 근거로 “앞으로도 추가 피해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됐다”며 환경오염 피해(정신적 피해)로 인한 책임을 물었다.

반면 A사는 “책임이 없다”고 반박했다. A사 측은 “주민들에 대한 소변 검사 결과, 불산이 검출되지 않았으므로 손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없다”며 “호소하는 증상도 임상적 추정에 따른 것에 불과해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1심은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1심을 맡은 대전지방법원 13민사부(부장 곽정한)는 2018년 11월, A사가 주민들에게 1인당 500만원씩 배상하라고 했다.

1심 재판부는 “주민들이 유출 사고 이후 집단적으로 수면·불안 장애를 호소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A사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볼 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 “주민들이 불소에 직접 노출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반복된 사고로 피해 발생을 우려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A사가 항소했지만 2심의 판단도 비슷했다. 2심을 맡은 대전고등법원 4민사부(부장 전지원)는 2019년 12월, 오히려 배상액을 1인당 700만원씩으로 올렸다.

2심 재판부는 “공장에서 유출된 불산이 기체화했다가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혔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며 “주민들에게 공통된 증상이 나타날 만한 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점 등을 종합하면 인과관계를 부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도 원심(2심) 판결에 대해 수긍했다.

대법원은 “원심(2심)은 유출된 불산이 공기 중으로 확산했다가 주민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볼 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서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당초 기존 선례에 따르면 유사한 사안에서 피해자가 유해물질의 배출, 피해자에게 도달한 사실, 피해 발생 사실 등을 각각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을 통해 대법원은 오염물질로 인해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볼 만한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는 점을 피해자가 증명하면 충분하다고 최초로 선언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사건은 환경오염피해구제법상 배상책임에서 인과관계가 쟁점이 된 첫 사건”이라며 “기존 선례에 비해 피해자의 인과관계 증명부담을 완화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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