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heraldk.com/wp-content/olddata/uploads/junk/46cc7d712693c.jpg) |
▲ 70년대 한인타운 부동산 시장을 주도해 온 로버트 리씨.
ⓒ2007 Koreaheraldbiz.com | |
임문일과 차 한잔 – 팩코 부동산투자회사 – 로버트 리 LA 한인타운에서 활동하는 부동산업계 1세대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베테랑이 팩코 부동산투자회사(PACKO Investments, Inc.) ‘로버트 리(한국명 이리섭)’ 대표이다. 30여년 동안 한인 부동산업계의 터줏대감으로 자리해온 이 대표는 ‘코리안 타이거’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임= 한인타운 부동산 역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국제부동산에서 부동산 일을 시작하셨지요? ▲리= 지난 주에 이 지면에 소개됐던 한군석씨보다 1년 늦게 그러니까 1975년에 국제부동산에 합류했지요. 부동산에 뛰어든다는 게 같은 한인으로서 경쟁자가 되는 게 아닌가 싶은 걱정에 처음에는 주류 부동산 회사의 문을 두드렸는데, 국제부동산 조지 최 대표가 선뜻 손을 내밀면서 혼자하느라 힘들었는데 같이하자는 겁니다. ‘부동산이라는 게 경쟁만이 아니라 같이 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어 내민 손을 덥썩 잡았지요. 제 부동산 인생이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임= 어느 분야이든 경쟁과 공존이 서로 배치되는 건 아니지요. 경쟁은 곧 힘을 결집하는 원동력이잖습니까. ▲리= 당시로서는 굵직하다고 할 수 있는 계약을 잇따라 성사시키면서 올림픽가를 중심으로 한인타운이 형성되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매물로 나오지 않은 것도 바이어가 원하면 이쪽에서 적극적으로 연결을 시도했죠. 결과적으로 시장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나간 셈입니다.
△임= 30여년 이상 이 분야를 떠나지 않았다는 건 일을 잘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리= 보통 부동산을 시작하면 6개월치 밥거리를 만들어 놓고 시작하는 게 정설이라고 하지요. 그만큼 첫 계약을 성사시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힘들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일이 천성이었는지 발을 들여놓은 지 한 달도 채 안돼 첫 계약을 따내고 그 커미션으로 당시 국제부동산 파트너로 합류한 겁니다.
△임= 당시에는 어려움도 많았겠지만, 지금 되돌아보면서 듣기에는 너무 수월하게 시작하신 게 아닌가 싶네요. ▲리= 오퍼쓰는 일부터 하나부터 열까지 고학생으로 부동산 일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용어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오퍼를 써가면 에스크로 사무실 친구들이 제대로 고쳐 써주곤 했습니다. 하도 많이 고쳐서 계약서가 빨간색이었을 정도였지요. 당시 찰스엔 컴퍼니라는 주류 부동산회사의 한 세일즈맨이 리스팅을 대부분 갖고 있었는데, 오퍼도 제대로 못쓰면서도 제가 나타났다 하면 계약서를 하나씩 들고 들어오니까 신통해했죠. ‘코리안 타이거’라는 별명도 그때 같이 일하던 그 친구들이 만들어준 겁니다. 다들 제 스승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고 모르고를 떠나 열심히 한다는데야 말릴 수가 없었겠죠.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천상 부동산 세일즈맨입니다.
△임= 지금도 그 호탕한 성격 덕분에 누구보다 인맥이 강하시죠. ▲리= 당시 사람들이 ‘코리안 타이거는 뒤에서 딜하지 않는다’라며 저를 더욱 신뢰하고 일을 맡겼던 것 같습니다. 한인타운의 거래 가운데 60% 정도는 제가 했으니까요. 8가에 있는 동서식품, 동일장, 버몬 상가를 비롯, 웨스턴 몰이나 우래옥 자리, 다 기억에 남는 거래들입니다. 당시 매물로 나오지도 않았던 클라이슬러 땅을 매달 한번씩 전화해서 매매 의사를 끈질기게 확인한 끝에 결국 지금의 코리아타운 플라자가 들어서게 한 것도 잊을 수 없는 일이지요.
△임=지금은 팩코 인베스트먼트에 계신데, 국제부동산과는 언제 작별하셨습니까? ▲리=1989년에 국제부동산과 파트너관계를 정리했습니다. 89년에는 LA 지역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는 해입니다. 그때 파트너 정리를 위해 크고 작은 23개 프로퍼티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나서 90년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부동산시장이 반토막나기 시작했죠. 대형 상업용 건물은 30~40% 이하로 시세가격이 떨어졌습니다. 90년대 초 저는 있던 부동산을 정리하느라 바빴지만, 그 때 일을 벌이느라 바빴던 사람들이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더러는 주변에서 ‘이렇게 될 줄 알고 혼자 먼저 정리했던 게 아니냐’며 원망을 살 정도로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그때 부자와 가난한 자가 일순간에 같은 키로 맞춰지는 게 신기하고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부자일수록 먼저 망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때 교훈으로 지금은 공격적인 투자보다는 안정적인 투자를 권합니다. 50% 정도 다운페이를 하고 작지만 값어치 있는 매물을 고르기를 권합니다.
△임=그래도 그 침체가 2000년대에 들어서서 일순간에 회복된 거지요? ▲리=한인타운의 경제성장은 크게 70년대 가발공장에서 80년대 봉제공장으로 거슬러 갑니다. 그때 축적된 자본이 오늘날 경제력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만들어진 자산으로 부동산 거래가 시작된 거니까요.
△임= 지금의 부동산 시장이 너무 갑작스럽게 커져 걱정스러운 면도 없지 않습니다. ▲리= 부동산에서 제1원칙은 흔히 ‘로케이션’이라고 하지요. 물론 로케이션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이 분야에 있으면서 명심하게 된 것은 바로 ‘타이밍’입니다. 부동산은 ‘시간싸움’입니다. 부동산 시장은 장기적으로 등락을 거치면서 결국에는 상승합니다. 오르기 직전에 사서 떨어지기 직전에 팔면 가장 이상적이겠죠. 하지만 그 ‘때’라는 타이밍은 아무도 모릅니다. 부동산 시장이 하락하기 직전, 즉 적절한 매입 시기를 놓쳤다면 적절한 매수 시기를 잡아 만회할 수 있는 것도 부동산입니다. 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건 많은 사람들이 지난 2000년대 초반 급상승했던 시기 4~5년을 기준으로 삼는 겁니다. 그때처럼 단시일에 2배씩 급등하기를 기대하면 절대로 부동산 분야의 프로가 될 수 없습니다. 부동산은 최소 10년, 가능하면 20년 정도를 내다보면서 투자해야 합니다.
△임= 팩코 인베스트먼트에는 언제 합류하셨는지요. ▲리= 팩코가 출범한 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되는 모양입니다. 팩코의 앨런 박 사장은 국제부동산에서부터 부사장으로 저와 함께 일했습니다. 독립하고 싶다고 할 때도 서로 나뉘어진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공식적으로 언제부터랄 것도 없이 늘 함께 일한 셈이지요.
△임= 후배들이나 우리 부동산 투자자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게 있습니까. ▲리= 부동산 에이전트로 커미션을 10만~20만달러 받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 돈을 오늘 번 걸로 착각합니다. 그 커미션은 지난 1~2년간 꾸준히 일해서 얻은 결과이며, 또 앞으로의 일에 대한 책임과 고객과의 신뢰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에이전트에게는 커미션에 대한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을 갖도록 꼭 당부하고 싶습니다. 또 한가지, 투자를 통해 부동산에 대한 안목을 키우라는 것입니다. 에이전트라 하더라도 스스로 투자를 하면서 많은 경험도 얻을 수 있고, 또 철새 부동산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투자는 꼭 필요합니다.
<로버트 리는 누구인가?>
올해 67세의 로버트 리(한국명 이리섭)씨는 전북 남원 출신. 양조장과 정미소를 운영하는 남원 유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앙고등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와 연대 의예과 2년까지 다니다 1965년에 텍사스 A&M으로 유학,미국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72년에 LA로 옮겨와 잠시 보험회사에 근무하다가 국제 부동산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32년 부동산 외길 인생으로 1,000건 이상의 거래를 성사시켰다.
‘딜이 필요할 때는 과감해지라’는 게 일에 대한 그의 기본 자세다. 에이전트의 목표는 ‘거래 성사’라는 로버트 리씨는 거래의 성공을 위해 때론 커미션이라는 무기를 동원하기도 한다. 조금씩만 손해를 감수하면 의외로 쉽게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모습은 작은 것에 연연해 큰 것을 잃는 우매함에 대한 일침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한번의 거래가 인생에 있어 전부가 아니다’라는 교훈도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그는 업계 올드 타이머 사이에서 일명 ‘해결사(No Problem)’로 통한다. 칠순이 머지 않은 나이에도 지치고 않고 일하는 열정의 소유자. “예나 지금이나 일이 너무 즐겁다”는 로버트 리씨는 “내 인생에 은퇴는 없다”라고 단언한다.
정리 = 나영순 기자 / L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