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자는 말이 없지만…

경찰 ‘장자연 문건’ 진상규명 가속도

국립과학연구소의 감정 결과 이른바 ‘장자연 문건’의 글씨가 고 장자연 씨의 필적과 동일한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그 안에 담긴 내용의 사실 여부에 촉각이 쏠리고 있다. 이른바 실명으로 게재된 것으로 알려진 ‘장자연 리스트’와 술자리, 성상납 등의 사례가 사실인지가 경찰 수사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경찰은 ‘장자연 문건’이 강압적으로 작성됐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장씨의 소속사 전 대표 김모 씨를 비롯해 문건에서 이름이 언급된 인사를 소환해 진상을 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더욱 정확하게 드러나겠지만 현재 언론 및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장자연 리스트’는 연예계의 권력관계와 먹이사슬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 안팎의 시선이다. 장씨의 경우 말고도 성과 향응을 미끼로 한 연예계의 로비에 대해서는 사건 이후 쏟아지고 있는 ‘익명의 증언’이 사실 가능성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갑’과 ‘을’…연예계 권력관계의 집약판=’장자연 리스트’에는 술자리나 술자리 이상의 향응과 성접대를 받은 것으로 꼽히는 유력인사가 실명으로 거론된다. 방송사의 유명 드라마 PD, 언론사 간부 및 관계자, 드라마 제작사 대표, 광고주인 대기업 고위 임원이 그들이다. 이들은 연예계에서 이른바 ‘갑’(쌍방 간 관계에서 권리를 가진 쪽)의 위치에 있는 이들이다.
 
매니지먼트사의 수입원은 소속 연예인의 출연료와 광고수입. 매니지먼트사는 로비를 통해 언론사로부터는 소속 연예인에 대한 우호적 기사를 유도해 ‘몸값’을 높이고, 캐스팅 권한을 쥔 PD 및 제작사 대표로부터는 작품 출연 기회와 좋은 배역을 얻어낸다. 대기업 고위 인사로부터는 광고모델 기용 기회를 제공받는다. 매니지먼트의 ‘밥줄’을 틀어쥐고 있는 ‘권력’인 셈이다.
 
2000년대 초반에는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연예인의 성상납이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나 이번에는 매니지먼트, 연예계와 보다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맺는 ‘갑’이 문제가 되고 있다. 연예계가 산업화하면서 정치적 영향력보다는 투자-제작-배급을 좌지우지하는 ‘현장권력’과 경제적 영향력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신인 연예인은 이 권력의 사슬에서 맨 끝에 있다.

▶과연 사실일까…’장자연 리스트’의 개연성에 힘 실어주는 익명의 증언=현재 실명과 함께 거론되고 있는 ‘장자연 리스트’가 실재하는지에 대해서도 아직 밝혀진 것은 없다. 하지만 이른바 ‘갑’을 대상으로 한 연예계의 향응 및 성로비의 개연성은 장씨 자살사건 이후 ‘익명의 증언’이 뒷받침하고 있다. 안팎의 신망을 받고 있는 한 연예계 관계자는 “최근에도 한 30대 여배우가 모 제작사 사장으로부터 잠자리를 세 번 같이해주면 캐스팅하겠다는 제의를 받았다는 말을 그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밝혔고, “한 투자자는 자신이 아는 여배우를 단역이라도 작품에 꼭 출연시키도록 제작사에 종용한다”고도 덧붙였다. 헤럴드경제가 만난 신인 여배우 K, Y씨도 성접대 제의를 거부한 뒤 불이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장자연 리스트’가 남긴 숙제=고 장씨가 과연 무엇을 고민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는 더이상 알 수가 없다. 하지만 20대의 신인 여배우 개인이 해결할 수 없거나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부딪혀 좌절할 수밖에는 없었다는 것은 확실한 듯 보인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장자연 리스트’는 말을 한다.
 
‘장자연 리스트’ 속 실명으로 거론되는 인사가 있다면 그들이 술자리만 가졌든, 그 이상의 일을 벌였든 20대의 신인 여배우를 왜 만났고, 만난 자리에서는 어떤 일이 이뤄졌는지 경찰이 명명백백 밝혀야 할 것이다. ‘장자연 리스트’에 거론되는 사회 고위인사의 이름을 접하면서 많은 이가 우려하는 것은 이번 사건마저 유야무야되고 비극이 결국 또 하나의 ‘스캔들’로 남는 것이다.
 
이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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