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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할아버지는 지난 1996년 북한을 떠난 탈북자다. 중국을 거쳐 2002년에야 한국 땅을 밟은 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영화를 방불케 한다. “8월에 고향을 떴지요. 풋감이라도 따먹을 수 있는 때를 노린 거거든요.
경비가 삼엄한 압록강을 피해 두만강을 향했어요. 통행증이 없어 늘 숨어다녀야만 했죠. 서해안에서 동해안으로 횡단하고 다시 국경지대를 넘기까지 경비에 잡힌 것만 서너 번이에요.” 그때마다 임기응변으로 풀려나기를 수차례. 중국에 숨어들어 5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중국에서 동남아시아 밀림지대를 거쳐 한국으로 넘어오기까지의 여정은 그의 목숨을 번번이 위협했다. 그토록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았지만, 69세 탈북자 할아버지에게 한국 사회는 냉담했다. 건축 현장에서 몇 개월 일하고 다시 무직으로 돌아가는 불안정한 생활이 반복됐다. 기회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집에서 채널을 돌리다가 “가수가 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오디션에 참여하세요”라는 방송을 봤다. 전화번호를 누르고 오디션을 봤고, 1차 예선을 통과했다. 김 할아버지는 예선에 통과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날을 대한민국 입국 때와 함께 ‘내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꼽는다. 김 할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근방에서 알아주는 노래꾼이었다. 북한에서 선반공으로 일했지만 단 일 분도 가수의 꿈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틈이 날 때마다 선전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평양민속예술단에서 일했고, ‘전국선전선동 노래경연대회’에서 3등을 하기도 했다. 아예 가수로 전향하고 싶었지만 출신 성분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성 군무단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무대를 메우는 일 정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한국에서도 탈북자들의 노래 모임을 통해 꾸준히 노래를 불렀지만 정식 무대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역 예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요즘 김 할아버지는 노래 연습에 한창이다. KBS 이호성 작곡가에게 개인교습을 받는데, 북한과 한국의 발성법이 달라 애를 먹고 있다. 북한의 창법은 한국의 성악과 비슷한 편이다. 관절염과 고혈압을 앓고 있는 아내는 ‘가수 김병수’의 든든한 조력자다. ‘날달걀은 좋지 않다. 우유는 오히려 가래를 일으킨다’면서 살구씨 기름과 생도라지를 일일이 챙긴다.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 목에 좋다는 말을 듣고, 외출하는 김 할아버지의 손에 물병을 쥐여주는 것도 아내다. 김 할아버지는 “상금은 중요하지 않다”면서도 “그동안 누구보다 고생한 아내의 병을 고치는 데 쓰고 싶다”고 말한다. 김 할아버지의 소원은 평양에서 자신만의 단독 콘서트를 여는 것이다. ‘김병수’라는 이름을 건 음반을 내고, 뮤직비디오도 찍었으면 한다. 1차 예선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한 그에겐 불가능한 꿈도 아니다. ‘슈퍼스타K’에서 우승하면 한 달 내 음반을 발매할 수 있고, 주관 방송사인 엠넷미디어에서 선곡 및 뮤직비디오 제작 등 가수 데뷔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한다. 국내 유수 기획사와 계약을 돕고, 상금도 1억원에 달한다. 촌스럽고도 진솔한 김 할아버지의 꿈은 벌써 많은 이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그의 사연이 알려지자 ‘슈퍼스타K’에는 40대 후반 지원자들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한국에서 희망을 선물받았다”는 김병수 할아버지는 제2의 인생을 꿈꾸는 모든 이에게 ‘희망’이라는 이름 그 자체다.
김윤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