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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송찬감포왕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인 청나라의 문성공주를 위해 궁을 짓기로 결정하고 명당자리인 홍산,즉 라사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마포리(Marpo-Ri), 일명 홍산 위에 궁을 지었다. 그런데 8세기 후반 어느날 천둥 번개가 쳐서 지금 홍궁에 있는 방 2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페허가 되어 버렸다.
그 후 1642년 달라이 라마 5대가 간덴 왕국을 건립하고 해발 3700미터나 되는 바로 그 자리에 10년에 걸쳐 다시 궁을 지으니 그게 바로 포탈라 궁이다. 사실 라사에 들어와 포탈라 궁을 보니 그제서야 정말 내가 라사에 왔구나,티벳에 왔구나 하고 실감이 날 만큼 이 성은 의미가 깊는 티벳의 상징적인 건물이다.
지구상에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궁으로서 건축학적인 가치와 종교적 가치는 대단할 거라는데는 동감이다.
포탈라는 ‘관세음 보살이 산다’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실제 티벳인들은 ‘보타산(Mt. Pokalaka)에 관세음 보살이 산다’라고 믿으며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 보살의 환생’이라고 굳게 믿고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이 궁은 외모로는 13층이지만 실제로 안에 들어가면 9층으로 높이가 117미터 동서의 길이가 360미터 건물 면적은 10만 평방미터나 되며 1천여개의 방과 수십만점의 불상과 유물이 소장되어 있어 1994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지금은 본래의 생명력을 잃은 채 쓸쓸한 박물관으로 전락해 버렸지만 어찌보면 포탈라 궁은 하나의 거대한 라마교와 티벳인의 세상 전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포탈라 궁이 가진 상징적인 의미는 티벳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지무지하게 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거다.
달라이 라마들이 겨울에 머물렀던 포탈라궁은 벽 두께가 3~5미터이며 화강암과 나무로 지었고 철재나 못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포탈라궁은 백궁(white palace)과 홍궁(red palace)으로 구분되고 그 위로 황금 지붕탑이 그 화려함을 더 해준다.
1653년에 완공된 백궁은 달라이 라마가 사는 곳으로 종교적, 정치적의 중심이 되어 국내외의 사절을 만나는 접견실 ,침실, 명상 및 기도 실,식당,화장실과 욕실등이 있으며 단지 몇 개의 방만 관람인들에게 공개되어 볼 수있다.
드레풍 사원에서 옮겨온 5대 달라이 라마때 부터 1959년 3월 14대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 갈 때까지 10명의 달라이 라마들이 머물렀던 곳이 바로 이 백궁이다.
궁을 짓던 5대 달라이 라마가 완공하지 못하고 1682년에 죽자 그의 후견인 데식 상예 갈초(Desig Sangye Gyaltso)가 그의 뒤를 이어 진두 지휘하여 드디어 1693년 홍궁이 완공되었다.
홍궁은 주로 종교적인 행사를 하는 곳으로 불당,달라이 라마들의 옥좌 및 시신을 모신 관과 영탑들 그리고 장서각이 주종이다.
홍궁과 벽은 이곳에서 자라는 갈대 종류인 짜날포(tsanalpo)에 붉은 색의 진흙을 발라 진흙과 함께 사용하였는데 이는 습기를 흡수하고 방수도 하며 지진때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이 풀을사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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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궁을 지을 때 사용한 붉은 진흙을 팠던 자리는 지금 호수로 변했고 이 호수에 비친 포탈라 궁은 너무나 아름다워 이 모습을 찍으려는 사진 작가들이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1980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된 궁은 하루에 입장할 수 있는 참관인의 수가 정해져 있어 미리 표를 구입해야 한다.
입구에서 매표소까지 그리고 언덕길을 올라 다른 매표소까지 정해진 시간안에 도착 해야한다는 강박 관념이 안 그래도 고산증 증세에 시달려 빨리 걸을수 없는 나를 더 더욱 힘들게 하였다.
포탈라 광장에 도착한 후에야 안심하고 쉴수가 있었고 조그만 가게에서 물도 한병 사서 마실 여유가 생겼다.
백궁 입구 오른쪽벽에는 사라져 버린 5대 달라이 라마의 손바닥 모형이 붙여있던 빈자리와 대조적으로 왼쪽 벽에는 13대 달라이 라마의 손 바닥 모형이 걸려 있었다.
안내 표시판에 따라 달라이 라마가 살던 백궁을 지나 홍궁으로 옮겨 화살표 만을 따라 가면서 수많은 법당,불상,영탑들을 볼수 있었다.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작동하고 있어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행동도 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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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을 들어가서 나올 때 까지의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 안에 나와야 한다니 무엇을 더보고 들 보고도 할것 없이 그냥 군중에 떠밀려 보고 나온 느낌이다.
가장 큰 5대 달라이 라마의 영탑이 있는 서대전, 영탑이 없는 6대 라마의 이야기, 17세에 생을 마감한11대 라마의 영탑,백궁을 현재의 크기로 넓게 만든 13대 달라이 라마 3700kg의 금과 다이야,비취옥,진주 산호초로 장식한 금 불상,불경을 빽빽하게 새겨놓은 돌들 이 귀중한 자산들이 한사람의 관리인 저우언 라이에 의해 1960년 중국 대륙을 휩쓴 문화 혁명때 큰 화를 면할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가?관리 저우언 라이(Zhou En Lai)는 둔황의 막고굴도 문화 혁명때 화를 피할수 있게 한 장 본인이다.
이런이들이 있었기에 후세까지 이러한 귀중한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어 우리가 보고 배우고 즐길수 있게됨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노블링카 여름궁(Norbulinka Summer pal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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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들의 여름 궁으로 사용했던 이 궁은 1755년 7대 라마에 의해 처음으로 지어졌고 8대 라마때 완성되어 사용되었다.그후 신궁을 더 지었으며 14대 달라이 라마때 완전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4대 달라이 라마가 1956년에서 1958년 동안 티벳에 있으면서 약 1년을 이 궁에 머물렀다고 한다.
‘보물 정원’이란 뜻을 가진 이 궁의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있고 연못도 있어 달라이 라마들이 여름에 이곳에 와서 쉴 수있게 만들었다. 달라이 라마가 거처하는 궁의 3 벽면에는 티벳의 시초부터 1954년까지의 자세한 역사를 정교한 필치로 그려 놓았는데 잘 보관 되어 있어 티벳 역사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림이 선명하고 자세하게 그려놓아 그림만 보아도 티벳을 이해할수 있도록 그려놓아 눈길을 끌었다. 또 한 방 앞에는 호랑이의 박제가 있는데 이 호랑이는 13대 달라이 라마가 산에서 명상을 하고 내려올 때 따라 내려와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며 함께 지내다가 죽은 후 박제로 만들어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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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4대 달라이 라마가 티벳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을 이 궁에서 보냈고 만약을 위해 중국군은 밤이나 낮이나 삼엄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고 지켰다 한다.
그러나 막상 달라이 라마가 이곳을 빠져나간 후에야 그가 망명한것을 눈치챈 분노한 경비 군인들에 의해 애꿋은 건물들이 무참하게 파괴된채로 아직도 완전 복구가 되지 못한 상태라 한다. 달라이 라마의 여름궁을 동물원으로 만들었다는 중국과 이씨 조선의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든 일본의 야만적인 처사에 슬며시 분노가 치민다.
이 정원은 티벳에 있는 사람들이 조성한 가장 큰 정원으로 라사시의 서쪽에 있으며 티벳 박물관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라사에는 ‘백제 한국 식당’이 있는데 티벳인이 경영하는지 맛이 한국적인 한식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한식을 먹어볼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식당에 장식되어 있는 한국의 ‘참이슬’ 소주 광고가 내 눈길을 끌었다.
티벳의 하늘. 그 파란 하늘에 떠 있는 해 주위에 해무리가 선명하다. 달 무리는 여러 번 보았지만 해 무리는 난생 처음이다. 마치 티벳에 무슨 큰일이라도 날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부디 부디 좋은 일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왜 이리 내 가슴은 답답할까? 정녕 고도(altitude) 때문 뿐만은 아니리라.
옴마니 밧메홈의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땅에 무한한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며 내 마음 한자락을 남기고 나는 며칠동안 머문 티벳을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