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희 기자의 채널고정] ‘청춘FC’, 우리 시대 청춘이 쓴 ‘아름다운 패자부활전’

김성진=사회에는 없는, ‘아름다운 패자부활전’ ★★★

고승희=축구를 매개로 담아낸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 ★★★★

정진영=가끔은 이런 편집을 덜탄 담백함이 좋다 ★★★

취업은 커녕 연애와 결혼도 진작에 포기했다. 내집마련은 꿈도 못 꾼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데, 어딜 가나 주머니가 가벼워 인간관계마저 버린다. 한창 달려갈 나이에 두 발 아래는 낭떠러지다. 꿈과 희망도 다른 사람의 몫이다.

이 나라의 청춘은 고단한 일상을 산다. ‘88만원 세대’를 넘어 이젠 ‘칠포 세대’로 불린다.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기회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다. ‘현대판 음서제’가 뉴스마다 오르내린다. 로스쿨에선 법조인 출신 자제에게, 대기업에선 장기근속 직원의 자녀에게 가산점을 준다. 연예인 지망생 자녀들은 스타 부모의 인지도에 무임승차해 꿈을 이룬다. 부모의 후광은 커녕 실력이 있어도 좌절해야 했던 이들에겐 ‘세습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공정 게임’이다. ‘패자부활전’은 별나라 이야기다. 


우리 시대 청춘의 자화상은 TV에서도 목격된다. KBS 2TV ‘청춘FC, 헝그리 일레븐’(이하 청춘FC)는 이 지점에서 시작했다. 최재형 PD는 “삼포세대가 화두가 된 사회, 초등학교 때 대학이 결정되는 사회, 두 번째 기회가 없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 ‘비운의 청춘’들의 ‘인생 전반전’…우리 현실과 닮은꼴=‘청춘FC’는 하나의 축구 팀을 꾸리기 위해 오디션의 형식을 빌렸다. 연예인 야구(‘천하무적 야구단’), 유소년 축구(‘날아라 슛돌이’)로 스포츠와 예능을 접목해 성공사례를 써냈던 최재형 PD는 “여러 사정으로 축구를 그만둔 선수들이 있다면 영입하고 싶다. 오디션을 하면 어떻겠냐”는 벨기에 2부 리그 AFC투비즈 구단주인 심찬구 스포티즌 대표의 제안을 받았다. 이 프로그램의 탄생배경이다. 


포장은 오디션이지만 최 PD는 “기회 제공과 선수들의 성장”에 방점을 뒀다. 전(前) 축구 국가대표인 안정환 이을용(공동감독), 이운재(코치)를 섭외했다. 지난 4월부터 시작한 서류심사에만 23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최종 엔트리는 18명, 현재 21명의 선수들이 벨기에 전지훈련에 한창이다. 한국에는 예비 엔트리 4명의 선수가 남았다.

5회까지 방송된 프로그램은 ‘비운의 청춘’들이 다시 쓰는 ‘인생 전반전’이다. 한 때는 모두가 유망주였다. 고교시절 득점왕(이제석)이었고, 청소년 대표팀 출신(이강)으로 J리그에 진출했다. 가정형편과 잦은 부상, 심지어 자연재해(동일본 대지진)까지 이들의 발목을 잡았다. 소위 ‘축덕’ 사이에선 이름난 선수였는데 에이전시를 잘못 만나 해외(염호덕)를 떠돌았고, 대학시절 갑작스런 혈액암 판정(방진규)으로 축구를 그만 뒀다. 유소년 대표팀 출신의 기대주였으나 5년째 아버지의 김 양식업(김바른)을 돕고 있었다. 


합격의 기쁨과 탈락의 아쉬움은 몇 번이고 교차된다. “그라운드는 정직하다”며 눈물을 삼키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대신한 동료를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꺼이 응원한다. 절박하게 빛나는 청춘의 눈빛에서 시청자들은 우리의 현실을 읽는다. “축구선수가 아니라도 살아가며 누구나 겪는 일, 내 동생일 수도 있고 아들일 수도 있기에 받게 되는 공감”(최재형 PD)의 힘이 크다.

▶ 악마의 편집도 사연팔이도 없다…‘진심’이 승부수=청춘들의 인생 한 페이지를 담아가는 제작진의 진심 어린 태도는 특히나 인상적이다.

‘청춘FC’ 제작진은 벨기에까지 편집 장비를 챙겨가 국내 예능 사상 최초로 ‘이원 편집’을 시도한다. 이 프로그램은 화학 조미료를 치지 않아 자극이 없다. 그 흔한 ‘악마의 편집’도 없고, ‘사연팔이’로 인한 ‘억지 눈물’도 없다. 연예인의 목소리를 앞세운 내레이션도 없다. 예능이라는데 접근방식은 담담한 다큐멘터리와 같다. 


최 PD는 “진짜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편집의 방식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기법적으로 접근했다기 보다는 이 친구들의 실제 이야기이고 프로그램이 끝나면 직업 선수든 아니든 자기 살 길로 가야 하는데 어떤 식으로든 과장이 지나쳐선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말했다. “진지하게 접근해 일부러 웃기려 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는”(정덕현 평론가), 오로지 진정성으로 승부수를 띄운 프로그램이다.

숱한 예능을 통해 얼굴을 비췄지만 후배들을 대하는 안정환의 모습은 이전과는 다른 진지함이 묻어난다. ‘청춘FC ’ 1차 테스트 현장에서 본지와 만난 안정환은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고,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기에 부담도 크고 걱정도 많다”며 “선수시절 나만 너무 편하게 축구를 했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나보다 더 하고자 하는 사람들일 수 있다.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커 조금 더 도와주고 싶다”고 했다. 벨기에로 향한 어린 선수들이 느슨해지자 채찍질을 하며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 누구에게나 해피엔딩…“미약한 우리의 도전이 힘이 되기를”= ‘청춘FC’는 6주 간의 전지훈련을 통해 해외 유명 구단 여섯 팀과 경기를 가진 뒤 오는 17일 귀국한다. 누구나 해피엔딩을 바라지만, 제작진은 선수들의 프로 입단을 약속하지는 못 한다. 벼랑 끝 청년들에게 손을 내밀어준 TV 프로그램이 만든 자리는 여기까지다. 기회가 좌절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그러나 “‘청춘FC’는 멀쩡하게 잘 뛸 수 있는 데도 각자의 사정으로 축구를 포기해야 하는 선수들에게 다시 뛸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준 프로그램”이라며 “비단 축구 이야기가 아닌 청년들의 설 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사회의 현실을 방송에서 그대로 보여줬다는 데에 충분히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선수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 기회에 도전한 것으로 다시 희망을 꿈 꾼다. 1차테스트에서 탈락한 김동욱(21) 씨는 “꿈에 다시 도전한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지금은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참여했다는 것만으로 많은 힘을 얻어 이제는 무엇이든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본지에 전해줬다. 예비 엔트리로 이름을 올리고 제자리로 돌아간 방진규도 함께 뛴 선수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페이스북에 소감을 남겼다. 


“‘청춘FC’는 제게 많은 것을 줬습니다. 아쉽게 끝나버린 선수로서의 마지막 기회와 어느 날 잊어버린 열정과 도전을 다시 일깨워 줬습니다. 이 때의 열정과 좋은 에너지들을 다시 제 본업으로 전환해야겠지요. 안정환 선생님께서 은퇴인터뷰에서 한국축구에 어떻게든 기여하겠다고 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저 역시도 여전히 아주 여린 미생이지만, 아픈 사연들을 가지고 있는 어린 친구들에게, 한국축구에 힘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의 미약한 도전이 이 시대의 힘들고 아픈 청춘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길 바랍니다. 함께여서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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