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투더 뮤직차트] 바람처럼 떠나버린 우수 어린 목소리, 김재기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지난 1993년 8월 11일, 밴드 부활의 보컬리스트 김재기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25세. 이날 밤 부활의 리더 김태원은 김재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재기는 김태원에게 “불법주차 때문에 자신의 차가 견인돼 과태료를 낼 돈 3만4000원이 필요하다”고 부탁했다. 당시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김태원은 “내가 최대한 돈을 구해 볼 테니 기다려 보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것이 김태원과 김재기의 마지막 통화였다.


김재기는 김태원과 통화를 마친 후 다른 경로로 과태료를 낼 돈을 구한 뒤 견인된 자신의 차를 찾았다. 경기도 파주로 가기 위해 차를 몰고 서울 홍제동 고가도로를 지나던 그는 반대방향 차선에서 빗길에 미끄러져 중앙선을 넘어온 차와 충돌했다. 김재기의 사망으로 인해 재기를 노리던 부활의 미래도 불투명해졌다.

누군가의 죽음 직전에는 종종 믿기 힘든 일들이 미리 일어나곤 한다. 김재기는 생전에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듯 주변을 정리했다. 그는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동생인 김재희에게 “요즘 꿈자리가 뒤숭숭한데,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내 자리를 대신해 달라”고 마치 유언처럼 당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망 이틀 전날 김태원에게 김재희를 소개해주기까지 했다. 형과 비슷한 음색을 가졌던 김재희는 이후 형의 자리를 대신해 부활의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게 된다.

부활은 같은 해 11월 정규 3집 ‘기억상실’을 발매했다. 김재기가 생전에 녹음한 곡은 타이틀곡 ‘사랑할수록’을 비롯해 ‘소나기’ ‘흑백영화’ 등 단 3곡에 불과했다. 김태원은 앨범의 나머지 부분을 김재기를 추모하는 곡으로 채웠다. 김재기의 보컬을 녹음하지 않고 연주곡으로 실은 ‘별’과 김재기의 기일을 제목으로 담은 연주곡 ‘8.1.1’ 등이 그것이다.

앨범의 첫 반응이 신통치 않았기 때문에 김태원은 낙담했다. 그러나 뒤늦게 입소문을 타고 ‘사랑할수록’ 특유의 쓸쓸한 분위기와 이를 잘 살린 우수 어린 김재기의 목소리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같은 기세를 타고 ‘사랑할수록’은 이듬해 8월 다섯째주 KBS ‘가요톱10’에서 정상을 차지하며 부활의 완벽한 재기를 알렸다. 더불어 이 앨범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부활 역사상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앨범이 됐다.

(왼쪽부터) 김태원과 고(故) 김재기.

부활의 역사에 있어서 3집은 음악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부활하면 떠오르는 특유의 아련함과 그리움의 정서는 이 앨범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ㆍ2집 당시 잉베이 말름스틴 같은 속주와 기교를 추구했던 김태원은 이 앨범부터 철저히 음악에 녹아드는 감성적인 연주로 노선을 바꿨다. 3집에서 확립된 부활의 색깔은 이후 20년 넘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부활 3집의 수록곡들은 놀랍게도 김재기가 데모로 녹음한 트랙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데모만으로도 이처럼 깊은 감성을 가진 탁월한 목소리를 들려줬던 김재기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가요계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다. 어제는 그의 22주기였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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