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애의 스크린에서 삶을 묻다]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 Vegas)

지금 저는 온통 셀러리언 블루로 물들여진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서울을 떠난 지 세 시간… 비행기가 역류하는 기류를 뚫고 빠져나가려는 듯 안간힘을 씁니다. 위아래, 좌우로 요동치는 비행기의 불안한 흔들림에 몸을 맡기다 언뜻 창 밖의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곱디고운 셀러리언 블루의 하늘이 제 눈길을 잡아맵니다.늘 느끼는 거지만 창 밖으로 바라보는 저녁 하늘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제가 저녁 하늘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높고 푸르러 우리가 청아하다고 말하는 한낮의 하늘은 너무 파래서 저의 눈을 시리게 하고…

어김없이 제 눈에 눈물을 찔끔거리게 만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청아하진 않지만 착 가라앉은 저녁 하늘을 좋아합니다. 특히 해거름 즈음의 하늘은 언제 보아도 사람을 멜랑콜리하게 만들지요. 한데 지금 비행기의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꼭 그런 하늘입니다.

이제 곧 어둠이 내려 앉으면 모든 것이 암흑으로 변하게 되겠지요. 고공에서 맞이하는 암흑은 지상에서 보다 더 불안할 겁니다. 창 밖의 어둠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몇 만 피트 상공에서 그 끝 모를 암흑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공상도 하겠지요.

19년 전 미국으로 날아가는 제 마음이 이랬습니다. 어두운 기내에서 좌석의 라이트만을 켠 채, 마치 편안한 마음인 듯 키보드를 두드렸지만 사실 그 끝 모를 불안과 공포…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하여 머리가 멍했지요. 전 미국 생활 첫걸음을 짧지만 라스베가스에서 시작했습니다. 3주 동안 베가스에서 머무르면서 이것저것 미국 생활에 필요한 법적 절차들을 끝냈죠.

Las Vegas… 우리가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게 공부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경제 개발 계획의 성공작인 후버댐 전기의 상당 부분을 소비하는 곳, 할리우드의 문제아들이 초스피드로 결혼식을 올려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곳, 방종과 유흥… 환락의 도시로 생각하는 그곳, 한국인에게는 탤런트 오연수의 어머니가 거액의 돈을 벌어들인 일확천금의 카지노 도시…

제게 라스베가스는 사실 친언니가 두 명이나 살고 있는 무척 가까운 도시입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차로 4시간 정도 운전을 하면 도착하는 곳이니 심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곳이지요. 하지만 라스베가스 전체가 영화 속 화려함으로 가득한 곳은 아닙니다. 그곳에도 하루하루 생활을 영위하는 현지인들의 주거지는 스트립의 화려한 조명과 소음 가득 기계 돌아가는 카지노들과 뚝 떨어져 미국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주택단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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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 Vegas에 위치한 호텔 Paris에서 내려다본 베가스 야경. Photo by Myoung 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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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호텔에서 내려다본 베가스 야경 Photo by Myoung Ae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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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IMDb

하지만 저 역시 영화로 형성된 베가스의 환상을 기억합니다.

영화 ‘벅시’에서 워렌 비티와 아네트 버닝이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갬블 타운을 만들겠다며 모래 바람 속에서 건물을 짓고 콜로라도 강에서 물을 끌어다 대고 전기를 공급하며 도시를 건설하고, 뜨겁고 강렬한 사랑을 나누던 곳으로 마음속에 남아 있지요.

로버트 레드포드가 100만 불이라는 입이 떡 벌이질 조건으로 데미 무어에게 하룻밤을 청하던 그 강렬한 유혹이 뇌리에 사라지지 않는 ‘은밀한 유혹’의 도시로….. 아! 그리고 알렉 볼드윈과 킴 베싱어가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 함께 출연해 영화를 찍다가 사랑에 빠져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되는 열정적인 사랑의 도시 라스베가스…

그러나 무엇보다도 라스베가스를 떠올리면 아마 모든 이들이 그러할 듯싶은데 ‘Leaving Las Vegas’가 가장 인상에 남습니다. 저에게 라스베가스를 슬픔과 우울함, 그리고 병이 들 듯한 외로움에 찌든 이들의 안식처로 생각하게 했던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전 이 영화를 강남의 한 영화관에서 대낮에 눈물을 흘리며 혼자 보았습니다. 영화가 너무 외롭고 허전해서… 두 남녀 주인공의 외로움을 내 마음속에서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진한 페이소스를 느끼며… 지금도 스팅의 ‘Leaving Las Vegas’ 사운드 트랙을 들으면 그때 그 외로웠던 기억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세상을 살아내기 힘들었는지… 저 또한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를 어떻게 다스리지 못하고 외로움에 굶주린 채 거리,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다녔었지요.

내 평온했던 일상(나만 그렇게 생각했던 거였지만)을 깨뜨린 낯선 이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질투… 그리고 나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준 누군가에게 다 쏟아내지 못하던 처절한 실망과 격심한 분노를 가슴에 쌓아둔 채 그렇게 하루하루 저의 삶을 갉아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가 제 마음에 더 와 닿을 수밖에요.

그렇게 영화를 보고 난 후, 두 달이 지나 96년도에 두 돌이 막 지난 딸아이를 데리고 로스앤젤레에 계시는 엄마에게 갔다 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처음으로 라스베가스를 가본 거죠. 라스베가스에 갈 때에는 꼭 밤에 도착하는 비행기를 타라는 말이 있더군요. 그만큼 야경이 눈부셨습니다.

눈부신 야경에 저는 더 외로워졌죠. 뿌연 나트륨 등 불빛이 제 마음속에 스며들어 저의 외로움을 더 잦아들게 했습니다. 외로움이 스산하게 불빛으로 돌아다니는 그런 곳에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봉투에 술병을 싸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런 방랑자들의 거리…. 제 눈에 비친 그 도시는 슬픔과 우울함, 삶의 지표를 잃은 방황하는 자들의 거리였습니다. 마치 영화의 주인공 니콜라스 케이지와 엘리자베스 슈처럼 말이죠.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전직 시나리오 작가, 벤은 이미 인생의 무상함을 알아버린…. 그래서 술로 자신의 이 덧없는 인생을 보상받으려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벤은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도 나가보고 클리닉에도 나가 보지만 알코올 중독 증세는 더 심해질 뿐 회복되지 않습니다. 일탈로만 계속된 남편의 생활을 견디다 못해 벤의 부인은 딸아이를 데리고 그의 곁을 떠나죠.

술 마시다 죽겠다고 작정한 그는 자신의 소지품을 모두 불에 태워버리고 라스베가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납니다. 하루에 매일 300 달러… 한 달 동안 실컷 술을 마시다 죽겠다는 생각을 하고 라스베가스로 떠난 벤은, 휘황찬란한 카지노 불빛 아래서 세라라는 거리의 여자를 만납니다.

돈을 받고 벤을 따라 모텔로 간 세라에게 벤은 단지 같이 있어주기만을 원하지요. 비록 거리의 여자이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삶을 꾸려 나가려고 노력하던 세라에게 벤의 외로움이 전해집니다. 술병을 뺏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세라의 집에 머무르기로 한 벤은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는 그녀가 편안하기만 합니다. 사사건건 술을 먹지 말라고 잔소리만 해대던 와이프와 비교해보기도 하죠. 그러다가는…. 떠나온 딸아이가 보고 싶어 전화를 돌리기도 하고…

세라는 벤이 알코올 중독자인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다 해주고 싶어 합니다. 세라가 쇼핑센터에서 벤에게 선물할 술 케이스를 고르면서 행복해하고 그 선물을 받아 들고 또 행복해하던 벤의 얼굴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두 사람이 함께 떠난 짧은 여행… 모텔에서도 벤은 수영장에서 술만을 계속 마셔댑니다. 마치 이 세상에 먹을 것이라고는 술밖에 없는 사람처럼 말이죠. 그리고는 술에 취해 온 수영장을 휘젓고 다니다 마침내는 온갖 욕설을 듣고 그 모텔에서 쫓겨납니다. 알코올 중독자와 창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써늘하기 그지없죠. 일탈자를 향한 정상인들의 시선은 꼭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어도… 거리의 여자가 아니어도… 나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냉정하고 싸늘한 얼굴로 손가락질합니다.

벤과 세라는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 절망을 달래려 하죠. 단지 누군가가 내 옆에 있어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을 해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 하지만 이들이 나누는 ‘사랑한다’는 말은 외로움의 끝에서 뱉어내는 상처 받은 영혼들의 깊은 신음소리 같이 저에게 들렸습니다.

애초 절망적인 상황에서 만났던 두 사람의 관계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빠져서 결국 헤어지고 맙니다. 술에 취해 다른 창녀를 자신의 침대로 데려와 뒹구는 모습을 본 세라는 벤을 내쫓고 말죠. 하지만 세라는 다시 벤이 걱정되고 그리워집니다.

그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헤매지만 벤을 찾지 못합니다. 며칠 뒤 모텔의 침대 위에서 술을 마시며 죽어가고 있는 벤의 전화를 받은 세라는 눈자위가 시커멓게 탄 채 죽어가는 벤과 처음이자 마지막 섹스를 나누며 라스베가스를 떠나는 벤을 배웅하죠.

영화의 마지막이었던가요? 세라는 자신은 벤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고 회상합니다. 아마도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라는 감독의 메시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게 하지 못하는 대신 조금만 먹으라고 술 케이스를 선물하는 게 사랑이라고 말이죠. 저는 그 당시 엘리자베스 슈가 술을 케이스에 담아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게 사랑일까?… 저런 게… 도대체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어떻게 살아도 그냥 다 인정해야 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가 가는 길이 나에게는 다 보이는 데…. 그의 앞길이 보이는데 단지 그가 잔소리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그를 그렇게 내버려두어야 하는 게 과연 사랑일까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참 복잡하게 보았던 영화였지요. 그렇게 찰나적인… 단지 그 순간에만 유효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입에 달고 살아야 한다면 말이죠,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사랑이란 건 도대체 무엇인지 한참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그게 사랑이라고, 그녀가… 그리고 그가…. 믿는다면 그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까요? 사랑이란 건 도저히 보편적인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거란 걸 알았기 때문에 어떠한 모습이 되었든지 간에 남녀가 자신들의 만남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사랑이라고 그냥 인정해주기로 한 거죠. 비록 순간적이라 해도… 그리고 육체적이라 해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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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th Valley / 라스베가스 인근 죽음의 계곡. 자동차 광고에 단골로 등장하는 오프 로드 질주 본능을 자극하는 곳이다. Photo By Myoung Ae Lee

라스베가스 사막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저의 귀를 간지럽힙니다. 제 과거의 시간들을 되돌아보라고… 떠나온 그곳에서 넌 무얼 하며 살았냐고… 그곳에 두고 온 게 뭐냐고 저에게 소곤거리며 말을 겁니다… 떠나온 그곳에 제가 남기고 온 건 무엇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앞으로 제가 살아내야 할 길을… 이젠 좀 앞길이 보일 나이도 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저는 살면 살수록 길을 찾을 수 없는지, 난감하군요.

지금 이 순간 저에게 필요한 건…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것처럼… 볼 수 없어도… 보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서글픈 용기일까요?

이명애/ 미주헤럴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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