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거미여인의 키스’로 5년만에 연극무대로 돌아온 배우 정일우가 열연하고 있는 모습 [레드앤블루 제공] |
알록달록한 남미의 색채를 품은 화려한 로브(수면가운)를 걸치고, 보색 대비를 이룬 두건으로 머리를 장식한다. 그가 가진 것 중 가장 가느다란 목소리, 섬세한 손짓으로 무대에 선다. 해사한 얼굴과 흔들리는 눈빛엔 다른 사람이 담겼다.
“아르헨티나에선 여성의 이름은 ‘아(A)’로 끝난다고 하더라고요.” 그의 이름은 ‘몰리나’. 배우 정일우가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연기하는 성소수자 캐릭터다.
5년 만에 돌아온 연극 무대. 정일우에겐 ‘매일의 루틴’이 생겼다. 공연 시작 8시간 전 기상. 낮 2시 공연이 있는 날엔 늦어도 아침 7시에 일어나 목을 푼다. 공복 상태 3시간을 유지하고 무대에 서기 위해 식사는 샐러드나 간단한 탄수화물 정도로 가볍게 한다. 공연장에 도착하면 분장을 받으며 대본을 읽고, 무대에서 모든 소품을 직접 점검한 뒤 몸을 푼다. 공연을 위한 ‘100%의 컨디션’을 만들려는 그만의 방식이다.
최근 대학로에서 만난 정일우는 “워낙 쉽지 않은 캐릭터라 무섭고 두려웠던 작품”이라며 “보통 연극 한 편을 마치면 성취감이 있는데 이 작품은 마지막까지 절대로 편해질 수 없을 것 같다”고 몰리나와의 만남을 돌아봤다.
대중에겐 이른바 ‘하이킥 스타’(MBC ‘거침없이 하이킥), 꽃미남 왕자(MBC ‘해를 품은 달’)였던 정일우이지만, 연극 무대는 벌써 세 번째다. 2010년 첫 연극 ‘뷰티풀 선데이’에 이어 2019년 ‘엘리펀트 송’으로 관객과 만났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세 작품에서 모두 성소수자를 연기했다.
이번 작품은 이전과는 또 달랐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아르헨티나 작가 마누엘 푸익이 1976년 집필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1983년 연극 초연 이후 영화와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다. 국내에선 2011년 초연 이후 네 번째 시즌이다. 이념과 사상이 다른 두 인물, 몰리나와 발렌틴이 아르헨티나 감옥에서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사랑하는 2인극이다.
“처음부터 걱정을 많이 했어요. 배우 정문성과 평소 작품 고민을 많이 나누는데, ‘너랑 정말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추천해주더라고요. 그동안 파격적으로 변신한 작품은 없었기에 어려운 캐릭터이지만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그만의 몰리나를 만들기 위해 고민도 많았다. 원작 소설을 탐독했고, 뮤지컬도 섭렵했다. 영화 ‘패왕별희’와 ‘대니쉬 걸’은 이번 무대를 위해 참고한 작품이다. 끊임없이 소리내 대본을 읽으며, 자신만의 몰리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그는 “몰리나는 유리알처럼 깨질 것 같은 유약함과 섬세함을 가진 캐릭터”라며 “이런 모습이 나와 닮았다”고 했다. 정일우는 처음부터 제작진이 몰리나 역할로 캐스팅한 배우다.
그가 생각한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정반대의 두 인물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다. 그는 “사실 처음엔 두 사람이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가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며 “연습 과정을 계속 거치고 나서야 캐릭터를 좀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몰리나는 단지 이성의 감정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차원을 넘어 모성애와 같은 사랑을 주더라고요. 그 안엔 많은 갈등과 희생,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모습이 담겨 있어요. 그 모습을 담는 저도 괴로웠지만, 몰리나도 괴로웠을 거예요.”
정일우가 담아내는 성소수자 몰리나는 고심 끝에 만들어졌다. 조금 더 여성스럽고 섬세한 모습을 만들기 위해 6㎏이나 체중 감량을 했다. 그는 “과거라면 몰리나 같은 역할도 훨씬 여성스러운 연기를 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조금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다”며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몰리나가 남자와 단 둘이 독방에 있으니 많은 행동이 조심스러웠을 것 같다. 심리적인 부분이 묘사될 땐 특별한 장치를 넣어봤다”고 말했다.
발렌틴의 여자친구 정보를 캐내려 할 땐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새침한 질투를 보내고, 발렌틴을 밀고하라는 소장의 압박에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불안감을 그렸다. 이런 장면을 제외하면 “여성스럽게 보이려는 연기를 굳이 하진 않았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작품을 추천했고, 이 연극에 출연하기도 했던 정문성은 그에게 “내가 생각한 몰리나와 가장 딱 맞는 모습”이라며 칭찬하기도 했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일약 스타가 된 정일우는 고등학교 시절 연극반을 거치며 배우를 꿈꿨다. 그는 “연기의 기본은 연극”이라며 “연극만큼 깊이 있게 캐릭터를 다루는 장르가 드물다”고 말했다.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왕성한 활동하고 있지만, 무대에서 관객과 만날 땐 “배우로서 살아있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매일 받아야 하는 피드백을 보는 것도 그에겐 중요한 과정이다.
물론 호평과 혹평은 그에게도 공존한다. 정일우는 “100명의 사람이 모두 나를 좋아할 순 없다. 각자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니 편안하게 받아들인다”며 “물론 가끔은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혹평을 하는 분들도 있어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며 웃었다.
“연극을 처음 만난 이후, 살면서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배우를 꿈꾸게 됐어요. 진정한 배우가 되려면 계속 무대에 서며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연극을 꾸준히 찾게 되는 것 같아요.”
두 달 내내 같은 내용을 반복하며 한결같은 감정과 깊이로 관객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20회차쯤 됐을 때 매너리즘에 빠졌다”며 “내가 지금 가짜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반사적으로 나오는 연기는 아닌지 고민했다”고 돌아봤다.
“(무대의 나를) 몰리나로만 바라봐야 하는데, 그 안에 정일우가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게 망가져요. 이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한다고 해서 풀리는 지점도 아니었어요. 스스로가 깨고 나와야 하는데, 매너리즘에 빠지면 연기에도 100% 집중이 안돼 굉장히 괴로워요. 진짜 여기가 지옥이다 싶어 무대에서 기절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는 그 모든 과정 역시 “더 나은 연기에 도달하는 길”이라고 했다. 다시 대본을 들여다보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자신을 다잡았다. “완전히 밑바닥까지 내려가니 다시 조금씩 빛이 보였다”고 했다. 그는 “연극은 너무도 외로운 나와의 싸움”이라며 “그러면서 한 걸음 더 올라 다시 연기를 하고, 그렇게 한꺼풀 벗고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어려운 캐릭터를 만나고 조금씩 다른 선택을 해나가는 것, 그 모든 것이 제겐 도전이에요. 배우는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발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직업인 것 같아요. 물론 기존의 정일우가 가진 ‘하이킥’ 이미지를 깨긴 쉽지 않겠죠. 사실 어릴 땐 그게 스트레스였는데, 이제는 그 이미지 덕분에 지금까지 배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더 다양한 작품에 도전하고 인정받으려 하는 것, 그게 인생이지 않나 싶어요. 전 평생 배우이고 싶어요.” 고승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