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시상식이 20여 개가 난립하면서 공정성과 권위를 상실해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 음악 관련 단체의 한 시상식(사진은 기사 내용과 직접적 관련없음) [헤럴드DB] |
“죄송한데요. 이 상 꼭 받아야 되나요?”
대중가수에게 연말 시상식에서 받는 각종 상은 그해 해당 가수가 얼마나 열심히 활동했고, 팬들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에 대한 척도가 된다. 상을 준다고 하면, 아니 후보에만 올라가도 만사를 제쳐주고 시상식으로 향하는 경우가 과거에는 다반사였다.
하지만 요즘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수상자가 됐다고 하면 반가워하기 보다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심지어 상을 안 받기를 원하거나, 심지어 시상식을 ‘공포’라고 표현하는 관계자도 있다. 워낙 대중음악 시상식이 많아지다 보니 시상식 참여에만 아티스트나 제작자의 시간이나 노력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다.
사실 K-팝 발전 과정에서 ‘K-팝 시상식’이 순기능을 한 적도 있었다. 당시에는 시상식 행사 수가 적을 때에는 음악산업과 가수·제작자가 함께 발전한다는 상생의 원리가 그런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K-팝 시상식이 20여 개나 되는 요즘은 그 취지를 넘어서다 못해 과도해졌다는 것이 관련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9일 한국음악콘텐츠협회(음콘협)에 따르면, 이달 현재 콘텐츠기업, 음원 플랫폼업체, 음악 관련 단체·협회, 언론사 등이 주최하는 대중음악 시상식은 20여 개에 이른다. 세계 1위이자, 국내 시장의 18배나 큰 음악시장을 보유한 미국이 그래미·빌보드·아메리카뮤직 어워즈, 단 3개의 시상식을 운영하는 것을 고려하면 K-팝 시상식은 과도하게 많은 셈이다.
상황이 이러한 데에도 K-팝 시상식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 5년간 새롭게 생겨난 시상식이 5개가 넘고, 올해에도 3~4개가 신설될 예정이다.
이처럼 시상식이 난립하다 보니 차별성이 사라지고 있다. 보통 대한민국 공인 음악 차트인 써클차트(가온차트)를 기반으로 몇몇 사항 만을 추가한 음악 시상식이 적지 않다. 이런 시상식은 주최 측만 다를 뿐 시상 내용이 똑같은 시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최근 시상식이 급증하면서 주최 측끼리 톱스타를 참가시키려는 경쟁이 과열되는 양상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수와 제작자에게 돌아온다. 가수와 제작자가 창작이나 공연 활동 시간을 줄여 시상식에 참석하고 있는 탓이다.
무엇보다 일부 K-팝 시상식은 수익만을 추구하면서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다 보니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음콘협은 최근 “최근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K-팝 시상식 개최에 우려를 표하며, 세계로 나가는 K-팝 산업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시상식 문화가 자리 잡기를 간절히 호소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성명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음콘협은 성명문에서 “명확한 기준으로 평가하여 권위와 가치를 드높이는 시상식이 아닌, K-팝의 성공과 팬덤에 편승하는 쇼 중심의 일회성 이벤트로 퇴색하고 있는 시상식에 우려를 표한다”며 “K-팝이 전 세계적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한 현 상황에서 산업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시상식 문화가 자리 잡기를 바란다”며 무분별하게 개최되는 여러 K-팝 시상식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와 함께 K-팝 시상식은 점점 더 수익 확장을 노리면서 국내가 아닌 해외 개최를 선호하고 있다는 점도 무리수로 작용하고 있다. 해외에서는 K-팝 글로벌 팬을 대상으로 비싼 값에 티켓을 판매할 수 있어 수익을 더 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예컨대 최근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개최된 K-팝 시상식 티켓은 무려 59만원의 고가에 판매됐다. 티켓을 구입한 주 대상이 10대부터 20대 초반의 K-팝 팬이었음을 감안하면 매우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일부 K-팝 시상식이 수익에 집중한 나머지 현지 물가에 맞지 않는 티켓 가격을 책정하여 K-팝산업 자체가 해외 팬들의 원성을 듣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시상식이 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유료 인기 투표를 활용하면서 이 역시 시상식의 주요 수익 모델이 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유료 투표로 특별상을 시상하고 그 결과를 본상에 큰 비율로 반영하는 등 시상식과 팬 사이의 긍정적 커뮤니케이션을 넘어 팬 간 경쟁심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상식의 유료 투표에 경쟁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전 세계 팬 입장에서는 경제적 부담은 물론 피로감도 더욱 쌓여갈 수 밖에 없다.
이런 식의 시상식 마케팅은 K-팝의 글로벌 발전 방향과는 배치된다는 것이 대중음악계의 전반적인 시각이다.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은 지난해 11월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나와 “최근 주요 시장에서 발견된 K-팝 관련 지표의 하락이라는 위기론의 근간은 강력한 팬덤의 소비”라고 했다. 이어 “K-팝을 강렬하게 소비하는 헤비 팬덤이 확장성의 한계가 되기도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K-팝을 소비하는 라이트 팬덤도 많이 붙을 수 있는 구조로 더 가야 K-팝이 확장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앱’을 통한 유료 인기 투표로는 방 의장이 말한 라이트 팬덤을 확보하기 어렵다.
여기에 20여 개 K-팝 시상식 주최 측의 극심한 섭외 경쟁 탓에 아티스트와 매니지먼트업체는 출연 강요에 시달리고 있어 문제다. 실질적으로는 축하 공연을 강요받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은데도, ‘을(乙)’일 수밖에 없는 대부분 아티스트와 매니지먼트사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출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또 불투명한 선정 기준으로 많은 시상식이 공정성, 권위, 건강성을 상실한 것도 문제다. ‘출연하면 상을 주겠다’는 제안은 수상자 선정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데도 다수의 K-팝 시상식에서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다.
유료 모객을 위해서는 아티스트의 출연이 전제로 돼야 하지만 일부 K-팝 시상식은 아티스트에게 지급되는 출연료는 없거나 터무니 없이 적어, 매니지먼트사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경우도 있다. 폭증하고 있는 시상식 출연으로 인해 아티스트 해외 투어, 행사 출연에 제한이 생겨 막대한 기회 손실이 발생한다고 매니지먼트사들은 하소연하고 있다. 난립하는 K-팝 시상식이 오히려 K-팝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음콘협은 K-팝 시상식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건강한 성장을 담보하는 음악 시상식이 개최돼 K-팝이 지속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음콘협이 자체적으로 운영하던 써클차트 뮤직어워즈 개최를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또 올해 상반기 중으로 K-팝 아티스트를 보호하고 비즈니스 간 분쟁을 예방할 수 있는 음악 시상식 관련 출연계약서와 가이드라인을 연구해 발표할 계획이다.
대중음악계 관계자는 “세계 음악시장 1위인 미국도 메인 시상식이 3개밖에 없는데, 한국에는 1년 내내 20여 개의 K-팝 시상식이 열리고 있다”며 “K-팝이 전 세계적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한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올바른 시상식의 방향성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서병기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