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에 대규모 투자한 기업들, 환율 리스크 초비상

지정학적 공급망 이슈 대응 위해
반도체·배터리 등 미국 투자 늘려
투자비 증가·환손실 발생 가능성
정유·석화·철강 원자재 부담 상승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원·달러 환율 급등에 산업계가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 확정으로 ‘강(强)달러’가 굳어진 가운데, 국내 정치리스크로 원화 가치 약세가 악화되면서 당장 미국에 막대한 투자 계획을 수립한 기업들은 눈덩이처럼 쌓일 자금 부담에 직면했다. 여기에 환율 급등 여파가 장기화될 경우 원자재가 상승 등 경영 악재가 급속도로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관련기사 10면

9일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6.8원 오른 1426.0원으로 개장했다. 지난 3일 비상계엄 선포와 함께 1446.5원까지 치솟은 환율은 금융당국의 유동성 공급 계획 발표 이후 가라앉는가 싶었지만 7일 기준 1420원대를 돌파하며 다시 상승했다. 이는 2년여 만의 최고 수준이다.

실제 시장에서는 내년 2분기까지 1400원대 고환율이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일각에선 사태가 장기화되면 원·달러 환율이 1500원대로 뛸 수 있다는 우려까지 제기되는 분위기다.

당장 다음달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있다는 점도 변수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모든 수입품에 10~20%의 보편적 관세를 물리겠다고 공언해 왔다. 관세 폭탄은 곧 수출국의 통화 가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보호무역주의에 특히 취약해 원화 가치 절하가 심화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수출을 주력으로 하는 기업으로서 환율 상승은 중장기적으로는 부정적이다. 원자재 가격이 오르는 데다 글로벌 투자비 부담이 늘고 외화 부채가 많은 기업의 경우 환 손실까지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1위 수출 품목인 반도체만 봐도 고환율에 따른 투자비 리스크가 당장의 수익 구조 개선보다 커 보인다. 미국에서 대규모 투자를 추진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서는 환율 상승이 막대한 투자비 증가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170억달러(약 24조2000억원)를, SK하이닉스는 38억7000만달러(약 5조5000억원)를 미국 반도체 공장 설립에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단순 계산하면 원·달러 환율이 10원 오를 때 삼성전자가 1700억원의 투자비를 추가로 부담해야 하는 셈이다. 미국 투자를 진행해 온 다른 기업들도 환율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미국 현지 공장 건설 등에 거금을 투자해 왔다. 상당 부분 투자비가 집행된 상황이지만 그에 따른 달러 부채 규모가 상당해 환 손실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올해 3분기 말 기준 LG에너지솔루션의 달러 부채는 약 6조8284억원으로 달러 자산(약 4조4397억원)을 웃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사업보고서에서 환율이 10% 상승하면 2389억원의 세전손실이 발생할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석유화학, 정유, 철강과 같이 원자재 수입 비용이 큰 업종은 이익 감소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중국발 공급 과잉으로 실적 부진을 겪고 있는 석유화학의 경우 제품 생산에 필요한 원유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고 정유업계도 최근 수출을 늘리고 있지만 원유 전량을 해외에서 달러로 사들이고 있어 비용 압박이 크다.

철강재 생산에 필요한 철광석과 제철용 연료탄 등 원재료를 수입하는 철강업계도 마찬가지다. 원가 부담이 늘어도 글로벌 경기 둔화에 철강 수요가 위축돼 있어 원자잿값 상승을 제품 가격에도 반영하기 어려운 형국이다.

유류비 비중이 높은 항공업도 환율에 취약한 대표 업종이다. 특히 항공사 대부분이 항공기 상당수를 임차해 사용하는데 임차료 등을 달러로 내고 있어 환율 상승 시 고정비용 부담도 크게 늘어난다. 김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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