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겨울 여의도, ‘군복 입은 밤’과 ‘빛을 든 민주주의’가 교차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1. ‘군복입은 밤’을 넘어=지난 7일 오후 서울 지하철 9호선 샛강역에 내렸다. 안내방송으로 국회의사당역 무정차 통과 공지를 들은 터였다. 다른 노선을 탔다가 동작역에서 9호선으로 환승했는데, 이미 통로 계단 플랫폼이 사람들로 가득찼고, 내딛는 발걸음이 무척 더뎌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불평이 없었다.

주로 오버사이즈 숏패딩에 와이드팬츠차림인 젊은이들은 나들이를 가는지, 시위를 가는지 구별이 안 갔고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다른 이들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마흔살 넘어 보이는 이들끼리는 눈이라도 마주치면 알듯 말듯 ‘공모자’의 은근한 미소를 교환했다. 낯 모르는 사람이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거 같지 않느냐”며 말을 걸고는 답을 듣지도 않고 흐뭇해했다.

전철역을 나오니 국회의사당까지 이미 긴 행렬이다. 깃발과 손팻말, 커다른 구호와 음악소리. 기시감이 들었다. 2016년 12월의 광화문. 그러나 국회의사당 앞 집회 본진에 가까울수록 낯선 풍경이 기시감을 덮었다. 과연 젊은이들로 북적였고, 특히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띄었으며 손마다 촛불 대신 아이돌 팬클럽 응원봉이 들려 있었다. 마이크를 든 사회자의 날선 외침과 군중들의 함성이 어우러진 소리의 데시벨(음량)은 과거와 다르지 않았으나 중간에 끼어드는 노래의 선율과 가사는 딴판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야에서’는 잠깐이었고,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다만세’)에서 에스파의 ‘위플래쉬’, 데이식스의 ‘한페이지가 될 수 있게’ 등 K-팝 플레이리스트는 길었다. 젊은이들은 몸흔드는 것이 익숙했고, 중장년들은 주먹쥔 손에 더 힘이 갔지만 입모아 외치는 ‘윤석열 퇴진’ 같은 구호에는 불협화음이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 시리즈라면 8년만에 다시 찾아온 ‘탄핵 시즌2’라고 할 것이다. 마치 전편의 아역배우가 이제는 자연스레 성인 역을 맡은 것처럼 주연이 바뀌었고, 장소도 광화문에서 여의도로 옮겨졌으며, 주제곡도 완전히 새로워졌다. 유사한 것은 악역이었고, 같은 것은 ‘민주주의’라는 주제였다.

#2. ‘빛을 든 민주주의’로=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의 국회 두번째 표결일인 14일. 일주일 전보다 3시간 앞당긴 본회의 개회(오후 4시)에 맞춰 이른 시간부터 더 많은 사람들이 국회의사당 앞으로 모였다. 참가자들은 더 늘어났으나 인파 흐름은 한층 매끄러웠다. ‘학습효과’는 중장년층 손에도 들린 응원봉에서도 확인됐다. 수염 거뭇하고 머리카락 듬성한 등산복 차림 중년 남성이 별모양의 핑크색 응원봉을 든 모습은 휴대폰으로 찍어 저장해두고 싶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일주일 전 집회 후 유튜브엔 ‘탄핵 시위 플레이리스트’가 많이 뜬 덕인지 ‘다만세’를 부르는 목소리가 한층 두꺼워졌다. 두번의 탄핵 표결일 모두 토요일. 집회 주최측은 채연의 ‘토요일 밤에’를 틀었고, 군중은 가사 마디마다 ‘윤석열 퇴진’ 구호를 따라붙였다.

유머는 두 차례 탄핵 집회의 확실한 컨셉트 중 하나였다. 프로야구 팬들이 경기 중 안타나 진루를 응원하며 외치는 ‘나갈 때도 됐는데~’ 선창에도 ‘윤석열 퇴진’ 구호가 붙었다. 아닌게 아니라 탄핵 시위날의 여의도 인근의 역들은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와 올림픽경기장에서의 K-팝 콘서트가 겹친 날의 잠실역 풍경과 꼭 닮았다. 사람도 소품도 분위기도 그랬다. 심지어 이날 무대에 오른 시민 연설자 중엔 ‘야구팬’의 자격으로 올라왔다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주홍색의 커다란 한화 이글스 응원기도 시위에 떴는데, 팀 로고 밑에는 ‘날 힘들게 하는 건 이글스로도 충분하다’는 문구가 써 있었다. ‘대한중2학부모연맹’ 명의의 깃발엔 ‘돌아버리겠는 건 내 자식 하나로도 족함’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노동·시민 단체 깃발과 함께 이색적인 개인 제작 깃발이 등장한 것은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요구 집회에서도 마찬가지였으나, 이번에는 더 많아지고 한층 유머러스해졌다. ‘민주묘총’ ‘강아지발냄새연구회’ ‘겨울제철대방어연구회’ ‘전국드레곤보존협회’ 등 사실상 ‘아무말대잔치’인 각양각색의 깃발이 오히려 노동·시민 단체들의 깃발을 주눅들게 했다. ‘양말을 빼앗긴 도비 연합’ ‘와그 귀여워하기 연합’ ‘국제그로구사수대 한국지부’와 같이 기성세대엔 요령부득의 깃발이 있는가 하면, ‘손주에게 당당한 할미할배연합’이라는 손팻말을 들고 나온 어르신들도 있었다.

문화사적으로도 세계적으로도 새로울 것이 분명한 이 모든 풍경은, 적어도 이날 여의도에 모여든 이들에겐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대통령 퇴진이라는 가장 높은 수위의 정치적 요구를 담은 시위 현장을, 거대한 야외 클럽이나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페스티벌로 만들어버린 집회는 마치 오래전 그래왔던 것처럼 금방 익숙해졌다. 불과 일주일만이었다.

#3. 여의도에 선 사람들=갑작스러운 정치적 사건을 계기로 단기간, 특정 지역에 대규모 인원이 집결해 열린 행사였다. 노동·시민 단체가 있긴 했지만 시위 참가자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개인적으로 참여했다.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밀집했지만 시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와 질서를 잃지 않았다. 춤과 노래, 특히 대중가요가 함께 하는 집회였다. “춤출 수 없다면, 그것은 나의 혁명이 아니다”라는 서양의 유명한 글귀를 떠오르게 했다. 20·30대 젊은 여성층이 주축이었지만, 남녀노소가 한데 어울렸다.

탄핵안이 가결된 14일 오후 4시 여의도 집회 참가자 추정 인구는 30만~40만명대였다. 서울시와 KT의 통신데이터를 이용해 MBC는 42만 1084명, 연합뉴스는 31만 4412명으로 추계했다. 이중 연합뉴스의 성·연령별 시위 참가자 통계를 보면 20대 여성이 17.52%로 가장 많았으며 30대 여성(11.85%), 50대 남성(11.35%), 40대 여성(10.62%)이 그 뒤를 이었다. 20·30대 여성 참가자비율은 10명 중 3명꼴이었다.

시위 참가자들의 주연령층은 4050(43.11%)과 2030(37.35%)세대였는데, 이는 연합뉴스가 서울시· KT자료로 집계한 같은날 동시간대 광화문 탄핵 반대 시위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광화문에선 전체 참가자 2만2023명 중 70대 여성(30.64%)의 비율이 가장 높았으며 60대 여성(20.32%)-70대 남성(8.11%) 순이었다. 6070세대의 비율은 75.49%였다.

4050세대는 민주·진보운동의 영향력이 남아있던 시기 대학을 다녔던 세대다. 86세대(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60대생) 일부와 X세대(1970~80년대생)를 포괄하는 이들은 한국의 정보기술(IT)산업발전기에 성장해 컴퓨터·스마트폰 조작과 소셜미디어 사용에 익숙하다. 86세대 본류인 이전 세대의 남성 중심 군대·운동권 문화와 달리 개인주의·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특징도 있다.

2030세대는 성장기와 청년기에 2014년 세월호 참사,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시위, 2022년 이태원 참사 사건을 겪은 이들이다. 공통의 사회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의 성평등 정책을 계기로 남녀간 정치적 성향이 분화됐다. 젊은 남성들 사이에선 문 정부의 성평등, 비정규직 고용, 통일 대북 정책 등에 반발하며 보수 성향을 갖게 된 이들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과거 청년층에선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반면 2030여성들은 젊은이들이 대규모로 희생된 비극적 사건에 더 강한 영향을 받았다. 중·고교 시절부터 K-팝이나 프로스포츠 팬으로서 적극적인 활동을 펴왔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이들은 팬클럽을 스스로 조직하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음반·공연티켓에서 굿즈 구매까지 정보를 나누며 아이돌 소속 기획사의 사업에 적극적인 요구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러한 경험이 적극적 정치 참여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성장기와 청년기 여성들 사이의 주류 문화가 아이돌이라면 젊은 남성들의 주된 관심사는 게임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2030과 4050세대 남녀의 정치적 경향성을 잘 보여주는 온라인 커뮤니티로는 크게 4곳을 들 수 있다. 애초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자연스럽게 정치 고관여자나 강한 의견 그룹이 형성된 플랫폼들이다. 이번 탄핵 시위에서 가장 두드러진 참여를 보였던 2030 여성층의 경우 아이돌 팬들이 모인 A가 대표적인 사이트다. 평소에는 K-팝 스타의 팬으로서 정보나 의견교류를 주로 하지만 대형 정치적 이벤트가 있는 시기에는 정치색깔을 드러낸다. 진보와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를 추구하며 비교적 강한 친더불어민주당 성향이다. 2030 젊은 남성들이 정치적 의견을 표출하는 대표적인 사이트 B는 당초 온라인 게임 동호회로 출발했다. 보수 성향을 표방하는 회원들이 많고 지난 대선에선 윤석열 후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선 오세훈 후보 지지세가 강했다. 최근엔 반윤(反윤석열) 반국민의힘 정서로 기울었다. 개혁신당을 지지하는 회원들의 목소리가 가장 높다. 공정, 경쟁, 자유민주주의 등을 핵심으로 하는 개혁 보수 성향을 띤다.

4050세대 남성층은 중고차 거래사이트인 C, 4050세대 여성층은 생활·요리정보 사이트인 D가 유명하다. C는 강한 친민주당 성향이고, 강경한 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D는 대체적으로 친민주당 성향이지만 C보다 온건하며 더 다양한 색깔이 혼재된 편이다.

#4. 대한민국, ‘개와 늑대의 시간’=12·3 계엄사태는 구성원 극히 일부의 일탈적 행위라도 최고 권력과 물리적 통치 수단이 동원된다면 공동체에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줬다. 동시에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이뤄낸 법과 제도, 그리고 역사적 경험이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도 입증했다. 민주주의 시스템의 허약성과 대한민국 국민이 가진 복원력을 모두 증명한 역사적 사건이 됐다. 성과 세대를 뛰어넘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결집한 시민들의 통합 에너지와, 군중 속에 잠재된 사회 갈등의 불씨를 모두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민주주의 요구로 끓어오른 통합의 에너지는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삼고, 갈등과 분열의 요소는 법과 제도로 해결을 도모하는 사회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정치가 존재와 효능을 증명해야 하는 때인 것이다.

빛과 어둠이 섞여 사물의 식별이 어려운 시간은 하루에 두 번 찾아온다. 프랑스어로부터 유래한 ‘개와 늑대의 시간’은 어둠이 내려앉는 때와 동이 터오는 순간을 가리킨다. 지금 대한민국이 바로 군복을 입은 밤과 빛을 든 민주주의가 교차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있다. 법과 정치의 과정으로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을 앞뒀다. 이제 대한민국의 시계는 시민들이 발휘한 집단지성의 힘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지혜롭게 헤아리는 ‘현자의 시간’에 맞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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