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젖어 귀를 잘랐다니” 충격…경찰까지 출동, 사연 알고봤더니[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②편]

빈센트 반 고흐,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일부 확대), 1889, 캔버스에 유채, 60x49cm, Courtauld Institute of Art


[빈센트를 이해하기 위한 작은 책]
137. 반 고흐 3부작 中 : 파리·아를 시기


편집자 주


새해 첫 주부터 3주간은 매주 토요일, 빈센트 반 고흐 이야기를 3부작으로 전합니다. 3년 가까이 연재를 이어가는 <후암동 미술관>의 극장판 형식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빈센트의 삶, 글과 말, 그림과 정신으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2부는 1만 2000자 가량의 분량을 갖습니다. 읽는 데 빠르면 10분, 여유를 가지면 30~40분 정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구독, 저장, 댓글을 활용한 스크랩 등으로 두고두고 읽으셔도 괜찮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주신 독자분들에게 경의와 감사를 표합니다. 헤럴드경제 홈페이지와 포털에 있는 1부 <“아니, 결코, 절대!” 사랑고백했는데 거절 3연타…삶도, 관계도 서툴렀다>를 먼저 읽고 오셔도 좋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좋아요’댓글은 콘텐츠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면, 시작합니다.

휘몰아치는 광기에 휘말려
대체 왜, 도대체 무슨 짓을


빈센트 반 고흐, 노란 집, 1888, 캔버스에 유채, 72×91.5cm, 반 고흐 미술관


여기는 어느 샛길이지? 대체 어느 샛길이야?

빈센트는 거듭 중얼거렸습니다. 머릿속이 윙윙 울렸습니다. 천장도, 바닥도, 가구와 접시도 빙글빙글 돌고 있었습니다. 발작이었습니다. 그놈의 발작이 또 찾아온 겁니다. 비명. 비명만 지르고 싶었습니다. 지금이 몇 시인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당장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습니다. 바닷물처럼 짠 고통을 머금은 그가 할 수 있는 건, 썰물이 오길 기다리며 허우적대는 일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고작 일 분, 그게 아니라면 일 년 넘는 세월이 지난 듯했습니다. 빈센트는 그동안 프랑스 아를의 집 한구석에 웅크린 채 앉아 있었습니다. 빈센트가 내뱉어지듯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건 통증이었습니다. 특히나 왼쪽 귀가 불에 댄 것처럼 아팠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빈센트는 신음하며 왼손으로 그 부위를 감쌌습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귀가 있어야 할 곳에 제대로 된 귀가 없고, 뜨겁고 끈적한 액체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였습니다. 갑자기 비릿한 냄새가 퍼졌습니다. 그사이 또 한 번 경련이 찾아왔습니다. 허우적거리는 오른손이 내던진 건… 그가 떼어낸 귀 일부였습니다. 온기가 남아있는 말캉한 조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발작 중 자기 귀를 자르곤 이를 쥐고 있었던 겁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빈센트의 정신은 여전히 혼미했습니다.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라는 식의 물음 대신, 영 방향성을 잃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누워있는 게, 1889, 캔버스에 유채, 38×46.5cm, 반 고흐 미술관


일단 나가자.

여기 있다간 언제 또 악령이 찾아올지 몰라. 빈센트는 끊임없이 혼잣말을 했습니다. 얼굴을 붕대로 싸맸습니다. 외투를 걸쳤습니다. 종이에 고이 싼 귀를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빈센트는 그대로 문을 열었습니다. 술 취한 난봉꾼과 부랑자, 거리의 여인을 지나치며 걸었습니다. 그가 향한 곳은 매음굴이었습니다.

빈센트는 평소 그와 안면이 있던 여인을 찾았습니다.

“빈센트?” 그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호주머니에서 꺼낸 종이 뭉치만 건넸습니다. “이게 뭔가요?” “일단은… 보물처럼 갖고 있어.” 빈센트는 그런 뒤 곧장 떠났습니다. 남겨진 그녀는 이를 한 겹씩 펼쳤습니다. 모습을 드러낸 내용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명. 매음굴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퍼졌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신발, 1886, 캔버스에 유채, 37.5x45cm, 반 고흐 미술관


1888년, 12월 24일. 빈센트가 사고를 친 다음 날. 경찰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경찰은 빈센트가 침대 위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는 걸 봤지요. 검붉은 얼굴, 불쾌한 체취, 폭탄을 맞은 듯 어지러운 방…. 경찰은 빈센트를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벌였소?”

경찰의 물음이었습니다. 빈센트는 그제야 제대로 된 질문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대체 무엇이 발작을 부추겼는가. 대체 무엇이 스스로 귀를 자르도록 했는가. 도대체 어떤 이유로 기행을 벌였는가….

폴 고갱, 아를의 세탁부들, 1888, 캔버스에 유채, 74x52cm, Bilbao Fine Arts Museum


고갱! 고갱은 어딨소?”

빈센트는 한 인물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소리쳤습니다. 그와 함께 산 남자, 폴 고갱이었습니다.

“그날 선생과 다퉜다는 험악하게 생긴 사내 말이오? 그는 조사를 마치고 돌아갔소. 선생을 아주 불안정한 사람으로 보던데, 둘에게 문제가 될 법한 일이 있었소?” “아…. 그게….” 빈센트는 다시 혼란에 빠졌습니다. 심장이 쿵쿵 뛰었습니다. 흐릿한 그 순간 기억을 붙잡기 위해 얼굴을 일그러뜨렸습니다.

지난 1부는 1886년 3월, 빈센트가 청운의 꿈을 안고 파리로 가는 것으로 마쳤습니다.

그런 그는 그때부터 고작 2년여가 흐른 때 왜 파리에 있지 않고, 한참 동떨어진 시골 아를에 있었을까요. 갑자기 등장하는 폴 고갱은 어떤 인물이며, 이들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 3부작 중 2부, 대체할 수 없는 단 한 명의 화가가 된 빈센트의 파리와 아를 시기를 짚어봅니다.

새로운 도전 새로운 희망
밝고 강렬한 그림의 탄생


빈센트 반 고흐, 몽마르트에서의 전경, 1886, 캔버스에 유채, 38.5×61.5cm, Kunstmuseum Basel


“빈센트 형! 보고 싶었어.”

“테오야.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하구나.”

시간을 되돌려 1886년, 3월. 빈센트와 테오는 파리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서 만났습니다. 빈센트는 그렇게 파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82x114cm, 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는 그간 어두운 분위기의 <감자 먹는 사람들> 작업에 천착했었지요.

그런 빈센트는 그 직후부터 차츰 밝은 색감에도 흥미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껏 보고 배운 모든 걸 쏟은 <감자 먹는 사람들>마저 실패한 만큼, 완전히 새로운 도전을 해 또 다른 희망을 품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믿었던 지인들조차 “그림이 필요 이상으로 어둡다”고 한 데 대해 아닌 척 스스로를 돌아봤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비에 젖은 다리, 1887, 캔버스에 유채, 73x54cm,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는 밝은 빛을 활용해 그림을 그리는 파리의 인상파 화가에게 영감을 얻을 마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당시 파리에서 유행한 일본식 그림, 우키요에에도 관심이 컸습니다. 우키요에는 일종의 채색 목판화입니다. 이 또한 밝은 톤의 강렬한 색채를 특징으로 합니다. 빈센트의 ‘느끼는 대로 그린다’는 정신은 우키요에의 소박한 묘사, 단순한 표현과도 포개지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프랑스 소설이 있는 정물과 장미가 있는 유리, 1887, 캔버스에 유채, 73x93cm


빈센트는 파리 생활을 하면서 그의 화풍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렘브란트와 밀레의 어두운 화풍을 파고들었다면, 파리에서부터는 흰색, 노란색과 하늘색 등 쨍한 물감의 사용 비중을 크게 늘렸습니다. ‘반 고흐’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그의 밝고 강렬한 그림은 여기서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별난 사람 중 최고로 별난 사람
파리 밖으로 시선을 돌린 이유


빈센트 반 고흐, The Blute-Fin Mill, 1886, 캔버스에 유채, 55.2x38cm, 푼다치 박물관


그러나, 빈센트는 이와 별개로 파리 생활에는 완전히 녹아들지 못했습니다.

빈센트는 파리 예술계에서 겉돌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별난 사람 중에서도 최고로 별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빈센트는 곧 인상파의 대부로 불린 카미유 피사로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와 에드가 드가, 클로드 모네와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당시 그 모임의 주역과도 안면을 틀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르 물랑 드 라 갈레트, 1886, 캔버스에 유채, 55×38.5cm, 개인소장


당시 인상파 화가 대부분은 제 코가 석자였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작은 길’로 칭했지요. 본인들을 돈 없고, 찾아주는 이도 없는 비주류로 평가한 겁니다. 이들 눈에 신참 빈센트는 작은 길도 아닌 동굴의 좁은 틈 수준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따로 챙겨줄 여력 따위 없었습니다.

빈센트는 길에서도, 거리에서도 혼자일 때가 많았습니다. 홀로 압생트를 홀짝이는 시간 또한 많아졌습니다. 그간 막 써왔던 몸을 또 한 번 막 굴리면서 심신 모두 더욱 불안정해졌습니다.

인상파 화가 상당수가 특히나 빈센트에게 미적지근했던 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긴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 빈센트의 별난 행보가 문제라면 문제였습니다. 빈센트는 겨우 성사된 전시회를 놓고 “내 그림은 허름한 곳에서 봐야 한다”며 행사 장소를 굳이 쿰쿰한 식당으로 잡는 사람이었습니다. 작업에 꽂히면 먹지도, 씻지도 않은 채 붓을 휘갈기는 데만 전념하는 인간이었습니다. 종일 좋은 그림의 조건을 고민하고, 또 그다음 날이면 종일 나쁜 그림의 특징을 살펴보는…. 뜻도 굽히지 않고 타협도 할 줄 모르는, 참으로 순수한, 언제나 한결같은 예술가였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의 초상화, 1887, 캔버스에 유채, 92x75cm, 로댕 미술관


그런 꼬장꼬장한 빈센트를 따뜻하게 맞아준 사람도 있기는 합니다.

그는 줄리앙 탕기였습니다. 테오가 소개한 그는 비교적 푼돈으로 소소한 화구를 구할 수 있는 화랑의 주인이었습니다. 당시 탕기는 ‘탕기 영감(Pere Tanguy)’으로 불릴 만큼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빈센트는 그런 탕기에게 외상으로 물감을 받아가곤 했습니다. 어떤 날에는 아예 돈을 빌리고, 음식까지 얻어먹었다고 합니다. 탕기는 그럴 때마다 허허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리곤 했다는 후문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흰색과 빨간색 카네이션이 있는 꽃병,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58×45.5cm, 개인소장


빈센트에게는 영원한 조력자도 있었지요.

친동생, 테오요. 그가 파리에 있을 때 머문 곳도 테오의 아파트였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파리 시절 빈센트와 테오의 관계는 마냥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테오야. 나는 요즘 정물화를 그리고 있어. 꽃을 어디에 어떻게 둬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데….” “테오야. 오늘은 노란색과 파란색의 조화를 연구했어. 나란히 칠해보니 고요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빈센트는 일을 마치고 퇴근한 테오를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어지러운 방, 물감이 튄 이불과 양말도 테오의 숨을 막히게 했습니다. 빈센트는 매 순간 정열적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균형 감각은 부족했습니다. 테오는 그런 빈센트에게 차츰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카네이션이 있는 꽃병, 1886, 캔버스에 유채, 43.2×35.6cm, Detroit Institute of Arts


“테오야.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1887년 중순의 어느 날. 빈센트가 테오에게 선언하듯 말했습니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파리의 삭막함을 얘기했습니다. 골목 구석구석까지 번진 번잡함도 토로했습니다. 비싼 식비, 불필요한 경쟁, 해소되지 않는 외로움, 밀레를 계승해야 할 농촌 화가로의 사명감…. 언젠가 이곳을 떠나야 할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이처럼 끝도 없이 읊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형. 그림 공부를 하기에는 이곳이 좋지 않을까?” 테오가 못 이기는 척 물었습니다. “테오야. 나는 그들이 여기서 무엇을 추구하는지 모르겠어.” 빈센트의 대답은 간결했습니다. “그리고….” 빈센트는 결심한 듯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내 꿈을 실현하고 싶어.”

예술가 공동체를 바란 사람
서로 돕는 유토피아 꿈꿨다


빈센트 반 고흐, 과일과 밤이 있는 정물, 1885~1886, 캔버스에 유채, 27×35.6cm, Fine Arts Museums of San Francisco


사실 빈센트에게는 오랜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술가 연합을 꾸리는 일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그릴 게 넘치는 볕 잘 드는 마을, 죽이 맞는 동료, 매일 밤 따뜻한 음식을 곁들이며 생산적 토론을 벌일 수 있는 집…. 빈센트는 이 조건이 모두 맞물려 돌아갈 때, 비로소 예술은 손쉽게 진보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또한, 어릴 적부터 고질적으로 이어온 고독을 털어낼 방법으로도 예술가 집단을 만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테오에게.

화가들이 자기 그림을 공동체 소유로 하고, 그림을 판 돈 또한 공동체 소유로 하는 일보다 더 이상적인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 것 같구나. 가령 드가,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피사로. 이 다섯 명이 앞장서 ‘우리가 각각 그림 10점씩을 넘기겠소’라고 하고, 그림을 해마다 일정 가격으로 넘기는 거야. 그 후 다른 화가의 참여를 유도하는 식이야.

1888년, 3월 10일. 빈센트가.

빈센트는 이처럼 그 나름대로는 꽤 진지하게 실현 방안까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흰눈 내린 소박한 마을 도착
‘노란 집’에서 열정을 키우고


빈센트 반 고흐, 아를의 광장, 1888, 캔버스에 유채, 73x92cm, 예르미타주 미술관


빈센트가 예술가 연합의 거점으로 점 찍은 도시가 아를이었습니다.

그곳은 수시로 환한 태양을 볼 수 있는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온화한 기후, 싼 물가와 수수한 관습이 자리 잡은 동네였습니다. 이곳에서 소박하게 살며, 자리를 잡는 즉시 동료를 부르고, 이들과 함께 개성있는 그림을 그릴 구상이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체계를 갖출 때까지는 테오의 도움, 정확히는 지원금이 꼭 필요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1888, 캔버스에 유채, 72.4×92.1cm, 예일대 미술관


1888년, 2월 20일. 빈센트는 늦겨울에 아를 땅을 밟았습니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날이었다고 합니다. 호기롭게 갔던 파리에서는 2년도 살아내지 못한 셈입니다. 빈센트는 이곳에서 또 한 번 살아가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예술에 대해서만 아낌없이 돈을 썼습니다. 무척 좋아한 크롬옐로색 물감을 사기 위해선 동전까지 탈탈 털었습니다. 꿈을 위해 의식주는 미뤄두었습니다. 옷이야 물감 묻은 외투에 만족했습니다. 음식은 빵과 우유, 치즈가 사실상 전부였습니다. 몸을 누인 곳은 월 30프랑, 즉 하루 1프랑짜리 여관이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이조차도 부담이 돼 한 달 15프랑짜리 집으로 옮겼습니다. 빈센트가 묵은 이 집은 훗날 벽의 색에 맞춰 ‘노란 집’(The Yellow House)으로 불리게 됩니다.

빈센트 반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 19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80.7×65.3cm, 크뢸러 밀러 미술관


테오에게.

지금까지 내가 쓴 돈이 얼마인지를 생각해보면…. 그간 내가 (네가 보내준)돈을 쓰는 데 대해 너는 불평한 적이 없었어. 너무 힘들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말해줘. 당장 유화를 그만두고 돈이 덜 드는 데생을 할게. 별다른 이유 없이 너를 궁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어.

1888년, 4월 9일. 빈센트가.

빈센트는 테오에게 이런 편지도 씁니다.

당시 돈에 대한 심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빈센트가 때때로 한풀이하듯 무질서한 삶을 산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래도 많은 순간 이처럼 절박한 죄책감을 안고 있었습니다. 착한 테오는 즉시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는 빈센트에게 안도감을 주는 한편 가슴 한쪽을 더욱 아릿하게 만들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조셉 지누의 초상화, 1888, 캔버스에 유채, 65×54.5cm, 크뢸러 밀러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 마담 지누의 초상화, 1888~1889, 캔버스에 유채, 91.4×73.7cm, 매트로폴리탄 미술관


빈센트는 그사이 친구도 몇몇 사귀었습니다.

가령 조셉 지누마리 지누 부부는 빈센트가 여관에서 ‘노란 집’으로 거처를 옮기는 동안 지낼 곳을 열어줬습니다. 기차역 카페를 운영한 이들이 그곳의 일부 공간을 잘 곳으로 내준 겁니다. 우체부 조셉 룰랭은 빈센트의 훌륭한 말동무로 나섰습니다. 키만 2m에 이른 털보였던 룰랭은 선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술을 좋아하는 룰랭은 종종 빈센트와 카페에서 음료를 홀짝였습니다.

“내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기에는 나이가 그렇게 많지 않지만, 룰랭은 나를 노병이 젊은 병사 대하듯 진중한 마음과 다정함으로 대해주고 있다.” 빈센트는 룰랭에 대해 이런 글도 썼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우체부 조셉 룰랭, 1888, 캔버스에 유채, 81.3×65.4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빈센트 반 고흐, 마담 룰랭과 그녀의 아기, 1888, 캔버스에 유채, 50.8×51.1cm, 매트로폴리탄 미술관


파리 시절의 탕기 영감, 아를 시절의 지누 부부와 룰랭 부부 등 빈센트가 그린 이들의 초상화에는 공통점이 있지요.

색감이 몽글몽글하고, 붓질 또한 크고 부드럽다는 겁니다. 이목구비와 형태는 다소 뭉개져있지만, 그림을 보는 순간 모두가 알 수 있지요. 아, 이들은 정 많고 순박한 사람이겠구나. 이 또한 빈센트가 모델에 대해 ‘느낀 대로’ 그린 결과였습니다.

‘나와 다른’ 폴 고갱에 초대장
새로운 희망, 마음을 불태우고


테오에게.

내게 필요한 건 인내와 끈기야. 우리는 이미 많은 돈을 이 빌어먹을 그림에 쏟아부었어. 새 작업실은 두 사람이 지내기에도 괜찮을 듯해. 혹시 고갱이 남부로 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어.

1885년, 5월 1일. 빈센트가.
빈센트 반 고흐, 고갱을 위한 자화상, 1888, 캔버스에 유채, 61.5×50.3cm, 포그 박물관


고갱.

그는 빈센트가 미래의 예술가 연합에 주축으로 앉히고 싶은 인물이었습니다. 빈센트보다 다섯 살 위였던 고갱은 삼십대가 넘어서 제대로 붓을 쥔 늦깎이 화가였습니다. 둘은 그림을 비교적 늦게 시작했다는 점에서 닮은 처지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고루하고 뻣뻣한 아카데미식 그림을 혐오하고, 느낌과 직관에 기댄 기법을 실험하고 있다는 점 또한 비슷했습니다.

폴 고갱,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화가 있는 자화상, 1888, 캔버스에 유채, 45x55cm, 반 고흐 미술관


하지만, 그걸 빼면 둘은 너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잘 나가던 주식 중개인 출신이었던 고갱은 천진한 빈센트와 달리 화려한 언변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증권가 시절 다진 인맥으로 아는 이도 많고, 여행 경험도 다양하고, 여자와의 스캔들도 심심찮게 따라붙었습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고갱은 팔리는 화가였습니다. 그림 가격이 대개 100~200프랑 정도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빈센트가 보기에는 대단해보였습니다. 이런 고갱이 함께 해준다면…. 빈센트는 고갱에게 조심스럽게 뜻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온 답변은… “그쪽으로 가리다.” 빈센트는 너무 기쁜 나머지 방 안에서 소리를 꽥 지를 뻔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레스토랑 내부, 1887, 캔버스에 유채, 45.5×56.5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사실, 이 또한 테오가 뒤에서 돕고 있었습니다.

테오가 고갱에게 아를행을 권하며 그의 빚 일부를 갚아줬다는 설(이는 빈센트의 권유로 이뤄진 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그의 그림을 사겠다고 약속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고갱 또한 빈센트의 행보와 그림에 흥미를 보인 건 사실입니다. 다만 빈센트가 고갱의 모든 면을 떠받들었다면, 고갱은 결코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즉, 고갱은 테오의 호의에 더 마음이 기운 채 빈센트를 향해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세 송이, 1888, 캔버스에 유채, 73x58cm, 개인소장


들뜬 빈센트는 고갱을 맞을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노란 집’ 1층에 있는 큰 방 두 개는 부엌과 작업실로 정했습니다. 2층에 창 덮개가 닫힌 왼쪽을 그의 공간, 창 덮개가 열린 오른쪽 방을 고갱의 숙소로 만들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태양도 그리고, 해바라기도 그리고, 주변 카페도 그렸습니다. 고갱이 관심을 가졌던 해바라기 등 몇몇 그림은 고갱의 방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었습니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도 발작과 조울증이 고개를 들긴 했습니다.

그래도 이제 빈센트에게는 뚜렷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고갱만 오면 드디어 꿈의 출발선에서 한 걸음을 뗄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빈센트에게는 또 다른 비극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함께 붓 들고 시너지 기대했지만
둘은 달라도 너무 다른 존재였다


테오에게.

고갱이 건강한 모습으로 도착했어. 고갱은 정말 재미있는 친구야. 둘이서 함께 있다 보면, 서로에게 얻을 게 많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어.

빈센트가.

그해 10월 23일, 이른 오전. 고갱은 아를에 도착했습니다.

고갱이 빈센트의 노란 집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샛노란 해바라기 그림이었습니다. 창문 틈으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이 작품을 더욱 화사하게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감동만큼 한숨도 밀려왔습니다. 빈센트의 어지러운 작업실 또한 보는 순간 숨이 막혔습니다. 술병과 담배, 음식물이었을 듯한 무언가의 찌꺼기…. “빈센트의 물감통은 짜다 말고 뚜껑도 닫지 않은 채 던져놓은 물감 튜브로 가득했다.” 훗날 고갱은 당시 모습에 대해 이런 글도 썼지요. 기대와 불안이 함께 하는 동거의 시작이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두 마리 게, 1889, 캔버스에 유채, 47x61cm, 내셔널 갤러리


빈센트와 고갱 둘 다 초기에는 각자 작업에 몰두하며 그림을 여럿 그렸습니다.

서로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같은 모델과 같은 장소를 따로 화폭에 옮기기도 했습니다. 헌신적인 빈센트는 고갱에게 늘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했습니다. 고갱은 그 나름대로 음식도 만들고, 살림살이도 꾸렸습니다. 고갱의 요리를 맛본 빈센트는 “천상의 맛”이라며 찬사를 보냈다고 합니다(반대로 빈센트의 요리를 먹어본 고갱은 “그의 그림처럼 온갖 색채로 뒤범벅이 돼 있을 뿐”이라는 평가를…).

하지만, 훈훈함은 잠시였습니다.

빈센트와 고갱은 함께 지낼수록 서로에 대해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을 봐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둘은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영 맞지 않았습니다. 빈센트는 눈에 보이는 그 순간을 낚아채 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런 만큼 작업 속도는 매우 빠른 편이었습니다. 반면 고갱은 기억, 거기에 상상을 곁들여 지긋이 그리는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빈센트와 비교해선 작품도 더디게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둘은 대상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예술적 지향점은 비슷했습니다. 다만 거기에 이르기 위해 택한 방법이 같다고 볼 수는 없었던 겁니다.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초상화, 1888, 캔버스에 유채, 37x33cm, 반 고흐 미술관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 삼베에 유채 등, 73x91cm, 반 고흐 미술관


둘은 차츰 서로의 그림을 지적했습니다.

처음에는 애정을 섞어, 이후에는 답답함을 더 크게 섞어 쓴소리를 했지요. 상대방을 향한 핀잔은 고성으로, 고성은 충돌이 되는 때가 많아졌습니다. “우리는 전기에 감전된 듯 흥분해서 다투곤 했다.” 고갱은 빈센트와의 싸움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하지요.

그래도 둘에게는 삐걱대는 사이를 바로 잡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걸까요.

두 사람은 12월께 몽펠리에로 여행도 가봤습니다. 거기서 앙금도 털 생각이었지만…. “(…) 고갱과 나의 논쟁은 격해졌다. (…) 제기랄. 사이가 좋아지기를 바랐는데. 빈센트는 이 무렵 이러한 글을 씁니다. 이들의 관계는 무엇 하나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폴 고갱, 밤의 카페(아를), 1888, 삼베에 유채, 73x92cm, 푸시킨 박물관


…이러다가 고갱이 떠나는 게 아닐까.

빈센트는 차츰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이 불안에, 이 두려움에 천착했습니다. 이 일만큼은 막고 싶었습니다. 빈센트는 더욱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보였고, 고갱 또한 더더욱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12월 23일. 문제의 날이 밝았습니다. 빈센트와 고갱의 동거가 이뤄진 지 9주째 되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감전된 듯’ 싸웠다
서로에게 상처만 안기고…


빈센트 반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 캔버스에 유채, 64×80.5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나는 회화의 미래가 초상화와 풍경화에 있다고 봐. 화가의 눈, 화가의 마음! 이제 세상은 여기에 시선을 두기 시작할 거야.”

“그래. 그럴 수 있지.”

“이보게, 자네도 이것만큼은 동의하지? 나와 계속 함께 있으며 그 미래를 앞당길 생각이지?”

“흠, 흠…. 빈센트. 나는 매음굴이나 다녀오겠네.”

“그곳의 여인을 그리려고? 좋은 생각이군. 그래. 한 모델을 놓고 각자 스타일대로 그려보는 건….”



“빈센트, 제발!”

빈센트는 과장되게 들뜬 목소리로 이어가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갱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씩씩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붓이나 이젤 따위 다 여기에 놔둘 거야. 그러니까, 그냥 갈 거란 말이야!” “아니, 친구. 그래도…” “자네는 눈 뜨고 눈 감을 때까지 그림 이야기만 하고 있어. 그 행태가 더 심해지고 있기만 해. 그 입 좀 다물게!” 고갱은 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버렸습니다.

남겨진 빈센트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술기운 탓인지, 직전 충격 때문인지 머리가 핑핑 돌았습니다. 그냥 간다, 다 두고 그냥 가버린다…. 빈센트는 고갱이 던진 말을 계속 곱씹었습니다. 어디서 어디로? 그저 이곳에서 매음굴로? 아니면, 아예 이 집을 등지고 저 멀리? 빈센트의 마음속에서 다시 격정이 차올랐습니다. 이쯤 이미 빈센트에게 악령이 찾아왔을지도 모릅니다. 빈센트를 평생 졸졸 따라다닌 그림자. 통제할 수 없는 발작이요.

얼마 후, 하고 싶은 일을 마치고 온 고갱이 다시 노란 집의 문을 열었습니다. 빈센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사이 폭풍이 지나가기라도 한 듯 집은 난장판이 된 상태였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 캔버스에 유채, 72x92cm, 오르세 미술관


“맙소사.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친구. 내 말을 들어보게. 나는 오래전부터 예술가들이 꾸려가는 공동체를 꿈꿨어. 지금은 우리 둘뿐이지만, 얼마 후면 규모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커질 거야.”

“빈센트! 또 그 허황한 이야기인가? 대체 몇십 번을 들었는지 이제 셀 수조차 없어.”

고갱은 빈센트가 웅얼대는 말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패기 있는 자네가 필요해. 조금만 더 기다리면 친구들이 올 거야.”

“자네는 정말 끈질기군.”

“친구. 깊이 생각해봐야 해. 우리가 이곳까지 온 이유 말이야. 모든 걸 다 따져봐야 한다는 걸 잊지 말게.”

빈센트는 이런 말을 하며 고갱의 외투를 붙잡았습니다. 고갱은 이를 뿌리쳤습니다. 자기 방으로 빠르게 올라갔습니다. 빈센트는 곧 고갱이 짐을 싸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병, 두 개의 잔, 치즈, 그리고 빵이 있는 정물, 1886, 캔버스에 유채, 37.5x46cm, 반 고흐 미술관


이제는 정말 떠나려고 그러는 걸까.

그렇다면… 막아야 한다. 빈센트는 혼미해졌습니다. “친구. 혹시 떠나려는 건가.” “빈센트. 그건 당연한 말이야.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파리로 돌아가야겠어. 나도 나름대로 애썼지만, 이대로 있다간 정말 돌아버릴지도 몰라.” 빈센트는 멈칫했습니다. 더는 설득도, 회유도 통하지 않을 것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전에 머리도 식힐 겸 산책이나 다녀오겠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게.” 고갱은 빈센트의 눈도 보지 않은 채 말했습니다. 고갱은 또 한 번 문을 닫은 채 사라졌습니다. 막아야 한다, 꼭 막아야 한다…. 빈센트의 머릿속 울림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테오에게.

고갱은 아를이라는 훌륭한 도시, 우리가 작업하고 있는 작고 노란 집,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에게 조금 싫증이 난 것처럼 보여. 우리 둘 모두 두 손을 들게 만드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그 원인이 있어. 고갱은 그냥 떠나버리거나 머무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할 거야. 그의 결정을 묵묵히 기다릴 거야.

1888년, 12월 23일. 빈센트가.

빈센트는 이날 친동생 테오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글을 쓴 당일에 빈센트는 문제의 사고를 벌이고 맙니다. 귀를 자르고, 이를 한 여인에게 주고, 결국 경찰까지 출동했던 그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날 밤의 크고 작은 궁금증들
달려온 테오 파리로 떠난 고갱


빈센트 반 고흐,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1888, 캔버스에 유채, 92.1x73cm, 내셔널 갤러리


고갱이 남긴 말과 당시 기사 등을 종합하면, 그날 저녁 빈센트는 고갱에게 신문지 조각을 던졌습니다. 거기에는 ‘살인마가 달아났다’는 문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생각이 많아진 고갱은 직후 광장의 정원을 걸었습니다. 인기척을 느껴 뒤를 돌아보니 면도칼을 든 빈센트가 있었습니다. 고갱은 흠칫했습니다. 그런 그와 눈이 마주친 빈센트는 움찔했습니다. 고개를 숙이더니 노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불안감을 느낀 고갱은 따라 들어가지 않고, 근처 여관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다만 이는 고갱의 주장일 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미스터리입니다.

빈센트가 자기 귀를 자른 게 맞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시 빈센트는 메니에르병이라는 청각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난청과 울림을 일으키고, 귀가 무언가로 꽉 찬 듯한 갑갑함까지 안기는 병입니다. 집으로 돌아온 빈센트가 발작을 했다면, 그날 절망의 깊이만큼 발작 정도가 심했다면 어떤 상태였을까요. 빈센트에게 가장 거슬리는 건 그를 줄곧 괴롭힌 귀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일을 저질렀다는 말이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열두 송이 해바라기가 있는 꽃병, 1889, 캔버스에 유채, 92.4×71.1cm, 필라델피아 미술관


빈센트의 귀가 다 잘렸다, 귓불만 조금 잘렸다는 식으로도 이야기도 분분하지요.

그간 상당수의 연구자는 그가 귓불 일부만 잘랐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는데요. 이와 관련해 지난 2016년 반 고흐 미술관이 당시 빈센트를 치료한 의사의 편지를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전직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가 찾은 기록물이었지요. 거기에는 빈센트의 왼쪽 귀 전체가 잘렸음을 알려주는 스케치가 있기는 했습니다.

확실한 게 있다면, 고갱이 곧장 테오에게 전보를 쳐 이 상황을 알렸다는 겁니다.

테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를로 달려왔습니다. 기진맥진한 빈센트를 보고 길게 울었습니다. 테오는 한동안 룰랭 부부와 함께 빈센트를 보살폈습니다. 그동안 고갱은 떠났습니다. 빈센트에게 질린 고갱은 파리행 기차를 타고 정말 사라져버렸습니다. 빈센트와 고갱은 앞으로 평생 만날 일이 없었습니다.

서로를 위로하는 마음이 빚은
빈센트의 테오의 합작 초상화


고갱에게.

높은 열에 시달리고, 정신이 희미해진 순간에도 자네 생각을 많이 했어. 모든 일이 늘 좋아지고 있는 이 멋진 세상에서, 자네에게 결코 어떤 악의도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아줬으면 해.

1888년, 12월. 빈센트가.
테오에게.

제발 내 걱정은 하지 마. 네가 지나치게 나를 걱정할까 싶어 되레 내가 불안해. 조직을 갖고 기반을 형성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여. 동맹은 깨졌어. 내가 이 모든 걸 마음에 너무 많이 담아두고 있었을까. 그래서 지나치게 슬퍼하는 걸지도 모르겠어.

1888년, 1월 2~17일. 빈센트가.

빈센트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후 쓴 편지였습니다.

고갱에게는 정제된 감정을, 테오에게는 보다 솔직한 속마음을 보입니다.

빈센트 반 고흐,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 1889, 캔버스에 유채, 60x49cm, Courtauld Institute of Art


빈센트는 이 무렵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화폭 속 빈센트는 정신이 온전하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 두 눈에 힘을 주고 있습니다. 다문 입술, 단호한 표정에선 결기가 엿보입니다. 단추를 걸어 잠근 외투 또한 인상적입니다. 언뜻 보면 출정을 위해 위장모와 판초 우의를 챙긴 군인 같기도 합니다.

빈센트는 붕대를 싸맨 지금의 처지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야위고 퀭해진 얼굴 또한 굳이 감추지 않았습니다. 비루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일. 이는 개선을 향한 의지가 없다면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입니다. 빈센트 뒤로는 그의 회화관에 영향을 준 일본풍 그림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예술을 놓지 않겠다는 낙관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테오야. 나는 (…) 편지보다는 초상화가 내 상태를 더 잘 보여주리라고 생각해.”

그렇습니다. 빈센트는 테오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 그림을 그린 겁니다. 보다 과장되게 기개를 보인 겁니다. 이는 형제의 다정함이 탄생시킨 작품이었습니다. 빈센트가 종종 말한, 그의 손과 테오의 마음이 함께 그린 결과물 중 하나였습니다.

“나를 먹여살리느라 너는 늘…
꼭 갚을게, 안 되면 영혼을 줄게”


빈센트 반 고흐, 화가의 초상화, 1887~1888, 캔버스에 유채, 65.1x50cm, 반 고흐 미술관


빈센트는 퇴원 후 노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고갱이 두고 간 그림과 옷가지를 보고 아이처럼 흐느꼈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화가 공동체를 꾸리고 싶다는 꿈이 산산이 부서졌다는 걸요. 빈센트는 늘 진심이었습니다. 매번 잘해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신 차려보니 또, 또 혼자였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비너스의 몸통, 1886, 캔버스에 유채, 46.5x38cm, 반 고흐 미술관


환각과 조울증을 달고 사는 비렁뱅이 화가, 동료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가….

1881년, 빈센트가 영혼을 울리는 그림을 그리겠다며 화가의 길에 오른 게 스물여덟 살 나이였습니다. 그런 뒤 몇해가 지났지만, 그가 남긴 건 고작 저 따위의 볼품없는 문장들뿐이었습니다.

아를의 주민들은 빈센트를 여전히 경계했습니다. 그가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고 여겼습니다. 이들 중 여든 명 이상이 뜻을 모았습니다. 빈센트가 자유롭게 활보해선 안 된다는 내용의 진정서를 경찰서에 제출했습니다. 빈센트는 이곳에서도 더는 머무를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테오에게.

내가 정말 잘못했다면 나를 가둔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을게. 그림을 그릴 수만 있게 해준다면 약속한 주의 사항은 모두 지키겠어. (…)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을 거야.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을게.

안 되면, 내 영혼을 줄게.

1889년, 4월 30일. 빈센트가.

내 영혼을 줄게. 빈센트의 약속이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상처를 받고도 또 한 번 진심을 쏟아부었습니다. 삶과 예술, 사랑과 헌신을 향해.

빈센트는 재차 짐을 쌉니다. 그해 5월 8일, 당시 그는 서른여섯 살이었습니다. 빈센트가 가는 곳은 아를에서 약 24㎞ 떨어진 곳, 생 레미에 있는 요양소였습니다. 빈센트는 이곳에서 그의 삶을 바로 잡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빈센트의 시간은 이제 1년 2개월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1월 18일에 올라올 최종장에서 이어집니다.

빈센트 반 고흐, 화가의 출근길, 1888, 캔버스에 유채, 48x44cm


<참고 자료>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예담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 고흐, 위즈덤하우스

반 고흐의 귀, 버나뎃 머피, 오픈하우스

빈센트, 나의 빈센트, 정여울, 21세기북스

빈센트 반 고흐, 인고 발터, 마로니에북스

반 고흐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32가지, 최연욱, 소울메이트

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 어빙 스톤, 청미래

기자의 말풍선


<후암동 미술관>의 첫 번째 대기획 ‘트로이 전쟁’은 빈센트 반 고흐 3부작이 끝난 후 정상 연재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기다리신 모든 독자분들에게 사과 말씀을 드립니다.

2부 첫 문장에 쓴 ‘샛길’과 관련한 표현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을 참고했습니다.

Print Friend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