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립기상청이 로스앤젤레스(LA) 일원에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바람폭풍(Life-thretening & Destructive Windstorm)’이라는 문자에 느낌표를 세개(!!!)나 붙인 경보를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 공식계정에 올렸다. 예보가 아니라 확정적인 경고였다. 극도로 위험하니 즉각 대비하라는 문구와 함께 영향권에 있는 지역을 지도를 곁들여 보여줬다. 월요일인 1월 6일 오전 10시 30분이었다.그로부터 정확히 24시간 뒤인 1월 7일 오전 10시 30분. 태평양이 내려다보이고 산타모니카와 말리부 해변을 아우르는 경관을 가진 부촌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산불신고가 접수됐다.8시간이 채 안된 같은 날 저녁 6시 10분께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북동쪽으로 약 40마일 가량 떨어진 알타데나란 곳의 이튼 계곡 근처에서 또 다른 산불이 신고됐다.
미국 역사에서 20세기 이후 최악의 자연재해로 꼽히는 1908년의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2005년의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버금갈지도 모를 ‘LA 산불’은 그렇게 시작돼 일주일째 진행형이다.
현지시간 12일 자정 기준 팰리세이즈산불과 이튼산불을 비롯, 다른 4곳의 산불을 더해 모두 6개의 산불이 태운 면적은 4만 에이커를 조금 넘는다.
캘리포니아에서 LA 다음 가는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보다 넓고, 뉴욕 맨해튼의 2.5배 크기다. 서울을 예로 들면 더 실감날까. 관악 강남 서초 송파 등 한강 남쪽 4개 구에 영등포구 2/3를 보태면 얼추 규모가 비슷할 것이다.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불길이 LA라는 도시를 할퀴고 있는 것이다.
화마가 집어삼킨 주택과 건물은 1만2천300채에 달한다. 사망자 24명이 확인됐지만 실종자가 적지 않아 더 늘어날지도 모른다. 크고 작은 부상자수는 공식적으로 집계를 내지 못할 만큼 많다. 집으로 달려드는 불을 꺼보려고 마당에 있는 고무호스로 물을 뿌려대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들이 여기저기 타박상, 화상을 입어 일일이 통계화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LA에서도 집값이 비싸기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팰리세이즈는 할리우드 스타 연예인, 방송인,영화제작자,작가, 스포츠스타 등 이른바 셀럽이라는 저명인사가 수두룩하게 사는 곳이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박찬호도 주민이고 저택이 전소된 것으로 알려진다. 인구 2만3천 남짓되는 팰리세이즈에서만 5천300채의 주택과 건물이 불에 탔다고 하니 주민의 절반 이상은 피해를 당했다고 봐야한다.
500억달러에서 1500억달러에 달할지도 모른다는 피해금액이 커지는 건 팰리세이즈가 비싼 동네이기 때문이다. 주택 평균가격이 350만달러를 웃돌고 가구당 연평균 소득은 40만달러 가까이 되는 지역이다. 팰리세이즈는 PGA투어 제네시스 인비테이셔널을 해마다 개최하는 명문골프장 리비에라 컨트리클럽이 있어 골프팬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튼산불 지역인 알타데나는 비교적 덜 알려진 곳이지만 2년전 세계 복권 사상 최대금액의 잭팟 주인공이 나와 유명세를 탔다. 이 동네 정비소에 붙은 편의점에서 파워볼 복권을 산 에드윈 카스트로란 남성이 물경 20억400만달러(요즘 환율로 치면 한화로 약 3조원 가까운 금액)의 잭팟 상금을 독차지했다. (산불 피해지역을 복권 잭팟과 연결짓는 게 부자연스럽지만 마땅히 특정해 소개할 만한 게 없는 지역이라서 굳이 사례를 들어봤다) 3천5백만달러짜리 베벌리힐스 저택을 구입해 이사간 카스트로씨가 참화를 겪고 있는 옛 동네에 구호성금이라도 기부하면 또 한번 뉴스가 될텐데 아직까진 소식이 없다. 어쨌거나 1만3천여 가구의 연평균 소득이 8만달러가 조금 넘는 알타데나에서는 절반 가까이가 집이 전소됐거나 파괴된 것으로 파악된다.
12일 현재 진화율은 팰리세이즈산불이 13%, 알타데나 지역의 이튼산불이 27%다. 완전진화하려면 갈길이 멀다.
이번 산불은 국립기상청이 하루전 경고한 대로 살인적인 강풍 탓에 확산범위가 커졌다. 통상 남가주라 불리는 남부 캘리포니아에는 매년 1~2월이면 ‘악마의 바람’이라는 샌타애나강풍이 분다.
샌타애나 바람은 빠르게 움직이는 화재를 유발하여 불씨를 인근 지역과 도로로 밀어내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돌풍성 강풍이어서 소방관들이 크게 당황했다고 한다.
국립기상청의 기상학자 리치 톰슨에 따르면 돌풍이 산 경사면을 빠르게 내려오다가 평평한 지형에 부딪히면서 강도를 높여 매우 강하고 위험한 바람이 잠깐 동안 폭발할 때 발생하는 ‘산악 파도 바람(mountain wave wind)’이 돼 시속 80~100마일(약 128~160km)에 이르렀다.
불길이 퍼질 때 구름처럼 형성된 수많은 불씨들이 이 돌풍성 강풍을 타고 하루에도 몇차례씩 방향을 바꿔 2~3마일씩 앞서 날아가 잔뜩 건조해진 마른 풀이나 나무, 주택의 틈새로 끼어들어가 확산의 첨병군단 역할을 했다는 얘기다.
생태학자인 샌디에이고 주립대 알렉산드라 사이파드 교수는 LA타임즈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런 산악 파도바람이 불면 불길은 초목을 통해 번지지 않고 공중으로 퍼지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퍼진 불씨가 거센 바람을 타고 먼 거리를 이동,작은 구멍을 파고 들거나 목재에 부딪혀 건조물을 태우게 된다는 것이다.
큰 화재를 겪은 소방관들에 따르면 주택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파괴된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외벽을 공격한 불길이 아니라 내부의 불씨로 인해 발생했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한다.
불씨로 인한 산불의 특성상 일부 지역에서 전소된 주택 옆에 멀쩡하게 남아 있는 집이 있는 것은 불씨가 들어갈만한 구멍을 잘 막는 등 내화성이 높았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이번 이튼산불에서도 알타데나의 한인 주택 한채가 황폐해진 동네에서 멀쩡하게 불길을 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산불의 원인 분석은 강풍과 불씨에서 그치지 않고 전력선 문제, 물공급 여부, 남가주의 극심한 가뭄, 온난화 현상에 이르기까지 다각도로 이뤄지고 있다. 방화에 의한 인재라는 얘기도 들린다.
부자동네인 팰리세이즈 인근 지역에서는 임대료가 갑자기 치솟고 월세 1만달러(한화 약 1,480만원)짜리 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전화가 에이전트들에게 빗발치고 있다고 한다. 벌써부터 건축업자를 찾는 구인광고가 늘고 있다는 짧은 기사도 보인다.
산불은 꺼지지 않고 있지만 인간사는 이래저래 말도 많고 탈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