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이 섭섭할 정도로 배우는 게 재미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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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세 최고령으로 영등포 늘푸름학교를 졸업한 김옥순 할머니. [영등포구 제공] |
[헤럴드경제=손인규 기자]“레이디스 앤 젠틀맨, 아임 옥순 김. 프롬 신길동. 아임 베리 해피. 생큐 쏘 마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아흔이 넘은 할머니가 졸업식에서 영어로 인사말을 하자 좌중에서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주인공은 지난 22일 영등포 늘푸름학교 졸업식에서 93세의 나이로 최고령 졸업생이 된 김옥순 할머니다.
1932년생인 김옥순 할머니는 원래 국민학교를 다니다 일제 치하가 되자 5학년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던 김 할머니는 빠르게 일본 생활에 적응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은 일본어를 할 줄 몰라 ‘조센징’이라며 서러운 일을 많이 당했는데 나는 일본어를 빨리 배워서 놀림 받거나 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전쟁 때문에 일본 곳곳에 폭탄이 떨어지니 이러다 죽겠단 생각에 아빠를 졸라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다시 한국에 오고 해방을 맞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다시 학교를 가기는 어려웠다. 18살에 결혼을 하게 된 할머니는 이후 5남매를 낳고 키우며 먹고살기 바빠 공부는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한다.
김 할머니는 “그런데 당시에도 애들을 재우고 나서 공책을 펴놓고 혼자 한글을 써보곤 했다”며 “지금 내게 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으면서도 그게 재미있었고 언젠가 다시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 두 손녀딸까지 키운 할머니는 지난 1998년 나도 내 인생을 살아보고 싶은 생각에 동네 복지관을 찾았다. 거기서 이런저런 것들을 배우는 게 그렇게 재미가 있었다고 하는 할머니.
그런데 어느 날 며느리가 구청 신문에 난 문해학교 학생 모집 소식을 보고 바로 등록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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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순 할머니가 늘푸름학교 졸업식에서 말씀하는 모습. [영등포구 제공] |
김 할머니는 “내가 이 학교에 온 게 91살 때였는데 배울 때는 내 나이가 20살이라고 생각하고 배웠다”며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어렵기는 커녕 재밌었고 오히려 처음 학교에 올 때보다 더 건강해진 거 같다”며 활짝 웃었다.
영등포 늘푸름학교는 초등·중학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성인문해 교육기관이다. 국민학교 과정을 마친 김 할머니는 중학 과정에 등록해 지난 3년간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과목을 이수했다.
김 할머니는 “내가 좀 영어는 잘했다. 다른 사람은 졸업 때까지 알파벳도 다 못 뗀 경우도 있는데 나는 성적도 중간 이상은 했다”며 “남들 앞에서 영어로 말하는 게 떨리지 않냐고 하는데 나는 하나도 안 떨리고 오히려 재밌더라”고 당차게 말했다.
김 할머니는 졸업한 것이 섭섭하기만 하다고 아쉬워했다. “3년이란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갈 만큼 더 다니고 싶은 마음이 크다”며 “고등학교도 가고 싶은데 주변에 마땅한 곳이 없어 우선은 노인복지관에 등록하고 최근 오리엔테이션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할머니와 이번에 늘푸름 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은 총 50명이다. 이 중에 김 할머니가 93세로 최고령이고 26세 최연소 졸업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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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늘푸름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최호권 영등포구청장과 졸업생들. [영등포구 제공] |
김 할머니를 가르쳤던 늘푸름학교 선생님은 “할머니는 매우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가진 분”이라며 “항상 이런 마음으로 수업에 들어오셔서 성적도 좋으셨고 다른 학생과도 잘 지낸 모범 학생”이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는 오는 2월 서울시 교육청 성인문해교육 졸업식에서 올해 졸업생 650명을 대표해 ‘서울시 모범학생상’을 수상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