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탈북청년 “북한인권 폭넓게 들여다 보겠다”

김금혁 前보좌관의 홀로서기
김일성종합대 다니다 중국 유학
‘김정일 사망 파티’ 들킨 뒤 탈북
한국행 7년 만 기초수급자 탈피

10여년간 부모에 미안함·그리움
명절마다 아르바이트 하며 버텨
내년부터 美유학길 北인권 연구


김금혁 전 국가보훈부 장관 정책보좌관이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상섭 기자


김금혁(34) 전 국가보훈부 장관 정책보좌관에게 오랫동안 명절은 일부러 그리움을 떨쳐야 하는 시간이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만난 김 전 보좌관는 “매해 돌아오는 명절이 괴로웠다”고 말했다. 명절이면 멀리 떨어진 가족 생각이 더 났다. 그는 “한국에 오고 10여 년은 설날이나 추석 연휴 기간을 아르바이트로 채웠다”며 “일을 많이 해서 자신을 혹사하는 방식으로 슬픔을 잊으려 했다”고 털어놨다.

평양에서 김 전 보좌관은 내내 꽃길만 걸어온 ‘도련님’이었다. 어머니의 교육열 덕분에 북한 외교관 양성소로 알려진 평양외국어학원(중·고교 과정)을 나왔다. 김일성종합대 영문과를 다니다 중국으로 자비 유학을 떠날 만큼 든든한 집안의 지원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조선노동당 간부, 아버지는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사업가였다. 모든 탈북민이 거치는 입국 전 심문에서 조사관이 그의 탈북 동기를 의아해할 만큼 김 전 보좌관에게는 평탄한 앞날이 보장된 것만 같았다.

13년 전 김 전 보좌관은 예정에 없던 탈북을 하게 됐다. 2011년 12월 중국 베이징어언대 유학 중 김정일 사망을 기념하는 파티를 열었다 북한 국가안전보위부(현 국가보위성)에 꼬리를 밟힌 것이다.

김 전 보좌관과 유학생 친구들은 주중북한대사관 주최 김정일 추도식에 참석한 직후 한 칵테일바에 모여 파티를 했다. 대사관에서 불과 세 블록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그는 “당시엔 몰랐지만, 파티에 누가 가담했는지 알아내려 보위부라고 하는 비밀경찰들이 나왔다”고 했다.

베이징에서 김 전 보좌관은 북한의 실상에 눈을 뜨게 됐다. 유학생 친구들과 나중에 각자 중요한 위치에 올라 북한을 함께 바꿔보자며 치기 어린 꿈도 키웠다. 그는 “우리가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가 아닌 다른 부모님 아래 태어났다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깨닫기까지 3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제의 파티’ 이후 김 전 보좌관은 북한대사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비자에 문제가 생겼으니 들어오라’는 호출이었다. 함께 파티했던 친구 중 일부는 이미 소환된 상황. 그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하고 휴대전화를 부쉈다. 그 길로 기숙사를 뛰쳐나왔다. 미처 챙기지 못한 부모님 사진과 편지가 떠올랐다. 돌아갈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는 보위부의 급습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고 한다.

기숙사를 빠져나와 도망쳐다니던 한 달여 동안 김 전 보좌관은 “살면서 경험할 수 있는 최대의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주중한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대사관 직원은 ‘이미 중국 공안까지 그를 찾고 있다’며 곤란해했다. 얼마간 PC방이나 사우나에 지내며 상가 화장실 등을 전전했다. 이내 돈이 떨어졌다. 여기저기 문을 두드렸지만, 선뜻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체념한 김 전 보좌관은 ‘마지막 만찬이나 먹자’는 심정으로 피자가게로 향했다. 피자가게에서 마침 한국인 아저씨를 마주친 김씨는 “북한 유학생인데 한국에 가고 싶다”며 무작정 매달렸다. 알고 보니 아저씨는 이전에도 탈북민 여럿 구출한 한인교회 목사였다.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김씨를 한국으로 데려갈 때까지 아저씨는 그에게 자신의 교회 사무실을 내어줬다. “정말 천운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2012년 9월 김 전 보좌관은 21세에 그렇게 한국에서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혼자라는 서러움도 잠시였다. 그는 “나 정말 잘 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서울에 임대주택이 배정됐을 때 뛸 뜻이 기뻤고 재활용센터에서 쓸만한 가구를 건질 땐 신이 났다. 쉴 새 없이 살았다. 택배 상하차부터 생동성 임상 시험까지 안 해본 알바가 없었다. 바로 대학입시에 매진한 그는 고려대 13학번으로 입학했다. 한국에서 생긴 첫 소속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 전 보좌관은 한국에 오고 나서야 ‘평양 밖의 북한’을 더 잘 알게 됐다. 방송에 같이 출연한 다른 탈북민들의 사연을 접하며 그는 “내가 북한에서 얼마나 좁은 세계에 살았는지 깨달았다”고 했다. 저마다 목숨을 걸고 탈출하게 된 비극이 있었다. 그가 겪은 고통은 그들에 비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김 전 보좌관은 지금도 가끔 혼자 통일전망대를 찾는다. 망원경 너머 북한은 꽤 뚜렷하게 보인다. 그는 “몇 ㎞를 사이에 두고 나는 자유의 땅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이상한 감정이 든다”며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데 이렇게 운명이 엇갈릴 수 있나”고 토로했다.

김 전 보좌관은 자신에게는 빚이 있다고 했다. 그는 “‘나는 자유를 얻어 살고 있는데 여전히 수많은 사람은 고통 속에 남아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책임감을 느낀다”며 “여태 우리 선대가 북한 정권의 독재에 무력했다면 내 대(代)에선 이것을 끝내고 싶다”고 털어놨다.

1991년생인 김 전 보좌관은 북한의 MZ세대인 ‘장마당세대’다. 그는 “장마당세대나 그 이하의 연령대는 한국 대중문화를 접하며 자라 외부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다”며 “윗세대처럼 세뇌와 통제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장마당세대가 북한의 주축이 되면 저항이 동력을 받을 수 있는데, 그때 우리가 그들을 앉아서 구경만 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김 전 보좌관은 요즘도 후배 북한 유학생들로부터 많은 연락을 받는다고 한다. 그는 “내가 겪었던 혼란스러움을 그들도 겪고 있을 텐데, 내가 걸어온 길이 어떤 이정표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김 전 보좌관은 한국에서 통일에 대해 점차 시큰둥해져 가는 분위기가 걱정스럽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언제나 북한과 통일을 전제해왔고 분단을 해소하려 노력해왔다는 것을 명확히 해둬야 한다”며 “김정은 일가가 무너지고 북한과 북한 주민에 대한 정당성이 어느 나라에 있느냐 했을 때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 온 지 7년여 만인 2020년 1월 김 전 보좌관은 기초생활수급자 신세를 벗어났다. 이듬해 결혼하면서 정부에서 탈북민에게 지원해주는 임대주택에서도 나오게 됐다. 그는 “기초수급이 끊긴 그날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했다”며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길에 한 두 걸음쯤 다가간 것 같았다”고 떠올렸다.

김 전 보좌관은 ‘북한 출신’이란 편견 어린 시선이 더 이상 아프지 않고, 다가오는 명절도 이전처럼 슬프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만났고 더 큰 목표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 전 보좌관은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내년부터 미국에서 석사과정을 밟을 계획이다. 미국에서 대학원 진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한국에선 북한 인권 얘기를 꺼내면 자꾸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며 “북한 인권 문제를 더 넓은 시각에서 들여다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아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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