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원학교 시절 친구 김기완과 호흡
소녀와 영혼 오간 팔색조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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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발레단 ‘지젤’ 의 박세은 김기완 [국립발레단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안개가 내려앉아 달빛조차 삼켜버린 밤, 죽음 이후의 지젤(박세은)이 자신의 묘비 곁에 선다. 곧게 세운 두 발은 이승의 땅을 밀어내듯 허공을 걷는다. 실낱같은 생을 붙들듯 존재를 드러내다가도, 연기처럼 사라질 듯 나부낀다. 바람에 흩날린 새하얀 튀튀가 접시꽃처럼 피어오르자, 알브레히트(김기완)의 손끝이 지젤의 육신을 간신히 붙든다. 생을 거둔 소녀의 영혼엔 생애 내내 보지 못한 숭고함이 깃들었다.
박세은의 ‘지젤’이 마침내 한국에 당도했다. 파리오페라발레단 역사상 최초의 동양인 에투알(수석 무용수)인 그의 승급 무대이기도 했던 바로 그 ‘지젤’이 국립발레단(11월 12~16일)과 만났다. 박세은의 파트너는 예원학교 시절부터 이어온 오랜 친구인 김기완. 지난해 박세은과 함께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로 호흡을 맞추며 압도적 무대를 보여준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무용수 김기민의 친형이다.
올해 들어 발레 애호가들을 설레게 한 대형 발레단의 ‘지젤’은 유니버설발레단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무대다. 지난 4월 마린스키 발레단의 입단을 앞뒀던 전민철이 알브레히트로 무대에 섰던 유니버설 발레단의 ‘지젤’은 올해 발레계의 히트작이었다. 국립발레단의 ‘지젤’은 박세은·김기민과 함께 박슬기·허서명, 조연재·박종석 등이 다섯 번의 공연을 책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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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발레단 ‘지젤’ 의 박세은 [국립발레단 제공] |
이번 ‘지젤’은 박세은의 직장(?)인 파리오페라발레가 ‘지젤’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파트리스 바르(1945~2025)가 재안무한 버전이다. 국립발레단은 2011년부터 이 버전으로 무대에 올리고 있다. 한국에서 공연할 때마다 ‘지젤’ 전막 공연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았던 박세은의 바람은 국립발레단과 함께 성사됐다.
낭만 발레의 정수로 꼽히는 ‘지젤’은 ‘발레 종주국’인 프랑스 파리, 그것도 파리오페라발레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1841년 장 코라이와 쥘 페로가 만든 이 발레는 대표적인 ‘드라마 발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시골 소녀 지젤과 신분을 속이고 동네 청년으로 위장한 왕자 알브레히트의 사랑과 결별이다. 1막은 이 둘의 ‘현실 사랑’, 2막은 연인에게 배신당한 ‘처녀 귀신’인 윌리가 된 지젤의 알브레히트를 향한 숭고한 사랑을 그린다.
그간 무수히 많은 지젤이 왔지만, 박세은의 ‘지젤’은 그 누구와도 달랐다. 극과 극을 오가는 1, 2막의 구성처럼 박세은은 팔색조처럼 소녀와 영혼을 오갔다. 김기완과의 합도 좋았다.
1막은 현실의 세계다. 하늘빛 의상처럼 사랑스러운 지젤과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신분을 속인 알브레히트로 무대에 선 박세은·김기완은 천진한 소년·소녀 커플 같았다. 37세의 동갑내기 무용수이지만,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지젤과 알브레히트의 옷을 입으니 완전히 다른 표정이 됐다. 박세은의 가벼운 발놀림과 몸짓은 천진한 지젤 자체였다. 탐스러운 꽃송이가 매달린 나뭇가지처럼 하늘거리는 손끝마다 설레는 감정이 스몄고, 폭넓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균형 잡힌 회전을 선보일 때마다 함성과 박수는 절로 나왔다. 알브레히트가 지젤을 들어 올려 오른쪽 어깨 위에 앉힐 때, 박세은이 날렵하게 치맛자락을 낚아채 김기완의 얼굴을 가리지 않게 하는 장면도 능수능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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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발레단 ‘지젤’ 의 박세은 김기완 [국립발레단 제공] |
박세은이 만들어가는 지젤의 강점은 안정된 기술로 관객들의 눈 호강을 책임지면서도 절제된 감정으로 선명한 드라마를 만들어간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많은 ‘지젤’에서 여주인공은 극적인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1막의 ‘매드신’(mad scene)에서 너무 많은 감정을 펼쳐낸다. 1막은 지젤을 맡은 발레리나의 ‘감정의 진폭’이 얼마나 잘 드러나느냐가 핵심이나, 늘 그렇듯 과유불급이다. 박세은은 절제됐지만, 섬세한 표현으로 사랑에 배신당한 소녀의 마음을 애절하게 담아냈다. 흐트러짐 없는 포에테(한 발을 축으로 다른 발을 재빨리 휘돌려 추는 동작)의 깔끔한 표현력이 더해지자 드라마는 도리어 분명히 드러났다.
1막에서의 김기완은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지난해 종아리 부상으로 한동안 무대에서 볼 수 없었던 국립발레단 김기완은 복귀 무대를 오랜 친구와 함께하며 편안한 모습을 보여줬으나 점프에서 두 다리가 수평으로 곧게 뻗어 나오지 않아 낭만 발레의 미학에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지젤을 바라보고 사랑에 빠진 모습은 설렘이 가득해 그것만으로도 관객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발레 ‘지젤’은 2막을 향해 달려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젤의 죽음 이후를 그리는 2막은 환상의 세계다. 2막에선 지젤과 알브레히트를 비롯해 윌리들의 군무까지 매순간 다른 크기의 도파민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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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발레단 ‘지젤’ 의 박세은 김기완 [국립발레단 제공] |
2막의 지젤은 이제 완전히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 지젤의 발놀림은 모든 소음을 집어삼켜야 하며, 마치 뼈와 관절이 사라진 듯 유연하게 움직여야 한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영혼의 춤을 추는 것이 관건. 박세은의 지젤, 지젤의 든든한 조력자인 알브레히트 김기완은 정말로 사람과 영혼이 만나는 순간을 그리듯 기묘한 순간들을 만들었다.
박세은의 발은 마치 무대 바닥에서 10cm쯤 떠다닌 채 춤을 추는 것처럼 가벼워 무대 전체를 ‘유령의 숲’으로 만들었다. 국내에도 수없이 오른 ‘지젤’이지만, 박세은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 다른 존재를 이토록 섬세하게 그려낸 발레리나는 없었다. 초현실적이고 초월적 존재가 잠시 지상으로 내려온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영적인 존재를 향한 깊은 성찰이 만들어낸 춤으로 박세은의 존재감이 완전히 무대를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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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발레단 ‘지젤’ [국립발레단 제공] |
2막의 김기완은 이 무대에서 기술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증명했다. 공중에서 두 발을 세 번 교차했다 착지하는 고난도 기술인 앙트르샤 시스(entrechat six)는 알브레히트의 기량을 보여주는 명장면. 전민철이 35번 선보였던 올봄의 무대로 인해 남성 무용수들에 대한 기대치는 더욱 높아진 이 동작은 김기완을 만나 노련하게 이어졌다. 이날 무대가 그의 최대치 기량은 아니었으나 드라마와 만난 테크닉의 힘은 컸다. 특히 마지막 피루엣(기본 턴 동작)에서 알브레히트의 절망을 입고 쏟아낸 땀방울은 그것 자체로 명장면이었다.
모처럼 훌륭한 국립발레단의 ‘군무’를 본 것도 이번 공연의 수확이었다. 일사불란한 움직임, 지젤의 든든한 조력자이면서 연인에게 배신당한 여인들의 냉담한 감정이 오차 없는 움직임과 흔들림 없는 아라베스크로 이어졌다. 새하얀 튀튀를 입은 26명 윌리들의 춤이 빚어낸 ‘백색 발레’의 정수이자, 국립발레단의 심장은 여전히 군무가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무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