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공급’ 수출 기업 경영 시계 ‘리더십 부재’에 멈춰서면 안 돼 [현장에서]


연일 고공행진 중인 원·달러 환율이 좀처럼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부가 수출 기업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는 모양새다. 6개 부처·기관이 수출기업의 환전과 해외투자 현황을 정기 점검하고, 달러 환전에 적극나서는 기업들에 인센티브 등 혜택을 제공해 환전을 적극 유도하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경제계의 시선은 마냥 곱지만은 않다. 미국 등 주요국 투자를 위한 외화 보유는 대개 장기 프로젝트성으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즉시 원화로 전환하는 게 쉽지 않고, 구조적으로도 환 헤지(위험회피) 계약 등으로 통화 전환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이에 수출 기업들은 무엇보다 벌어들인 외화를 언제 국내로 가져오고, 어디에 얼마나 쓸 것인지 신속 정확하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여건부터 조성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고관세와 미중 무역분쟁, 글로벌 수요 둔화 등 대외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나라는 올해도 ‘수출 강국’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산업통상부에 따르면 올해 1∼11월 누적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2.9% 늘어난 6402억달러다. 이는 역대 1∼11월 수출액으로는 2022년(6287억달러) 이후 3년 만에 최대로 사상 첫 연간 7000억달러 돌파도 무난할 것으로 점쳐진다.

수출기업이 벌어들이는 외화가 우리 경제를 지탱하는 버팀목이라는 사실은 각분야 1위 기업이 받아든 수출 성적표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1~3분기 누적 239조76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전체 매출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90% 수준에 이르는 점을 고려하면, 200조원 이상을 해외에서 벌어들인 셈이다.

현대자동차·기아 역시 대형 수출기업의 전형이다. 양사가 우리나라 전체 자동차 수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75%에 달한다. 우리나라 자동차 수출은 2023년 709억 달러(약 104조 6000억원)를 기록한 이후 지난해 708억 달러(약 104조4000억원)를 달성, 2년 연속 수출 7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올해 역시 대미 자동차 관세 15% 소급적용이 확정되면서 3년 연속 700억 달러 돌파가 유력하게 점쳐진다.

차량 배터리·공조·타이어 등 사업을 영위하는 한국앤컴퍼니그룹의 수출 규모도 적지 않다. 계열사로 두고 있는 국내 타이어 업계 1위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의 경우 지난해 전체 매출 9조4000억원 가운데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83%에 이른다. 글로벌 2위의 열관리 시스템 기업인 한온시스템도 연 매출 10조원을 돌파하며 70% 이상을 해외 완성차 업체로부터 벌어들이고 있다.

우리 경제를 지탱하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수출기업이 벌어들이는 외화다. 그리고 이 외화는 시장으로 흘러들어오는 순간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수출 기업의 해외 유보금 환류가 원·달러 시장을 안정시키는 장면은 이미 수차례 확인된 바 있다.

수출 기업의 역할은 단순히 외화를 벌어들이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실제 우리 경제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은 이들이 벌어들인 외화 활용법을 누가 얼마나 신속하고 정확하게 내리는지 여부다. 문제는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부재 속에서는 대규모 투자나 인수합병(M&A) 등 굵직한 사안이 속도감 있게 추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 3월 ‘깜짝 만남’을 가진 한국을 대표하는 타이어 제조사와 이탈리아 대표 하이앤드 슈퍼카 제조사 수장에 업계의 이목이 쏠렸다. 조현범 한국앤컴퍼니그룹 회장과 스테판 윙켈만 람보르기니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조 회장은 람보르기니 신차 ‘데메라리오’ 출시 행사 참석을 위해 방한한 윙켈만 회장과 만나 신차용 타이어(OE) 공급과 교체용 타이어 판매, 모터스포츠 후원 강화, 공동 마케팅 확대 등 다양한 협력 방안에 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이는 우연찮게 이뤄진 이벤트가 아니다. 그룹 핵심 계열사의 경영정상화를 위한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철저한 경영 전략의 일환이다. 실제 조 회장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이미 폭스바겐그룹과 협업하고 있고, 롤스로이스에서도 한온시스템과 협업하는 람보르기니와도 함께 할 가능성이 있다”며 파트너십 확장 가능성을 열어뒀다.

윙켈만 회장도 당시 “올해 7월에 두 번째 회동을 갖겠다”고 밝히며 협력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앤컴퍼니그룹의 리더십 공백이 현실화하면서 이들의 두 번째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고, 두 글로벌 기업 간 유의미한 협업 소식도 아직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짙어지는 대외 불확실성 속에 국경을 초월한 글로벌 기업 간 생존 경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나라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기업의 어깨가 매년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경제에 필요한 것은 시장의 흐름을 읽는 최고경영자의 결단, 정확성, 혜안과 이를 통해 빠르게 시장을 안정시키는 리더십이다. 리더십 부재로 경영 시계게 멈춰 선다면, ‘1위 기업’ 타이틀과 ‘수출 신화’도 과거의 무용담으로 전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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