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비즈] 자본시장·산업변화에 뒤떨어진 배임죄


기업의 최적의 의사결정 방식은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조정돼 왔다. 산업의 발전 속도가 가속화되고 경쟁의 단위가 글로벌로 확장된 오늘날은 기업이 직면하는 위험은 훨씬 더 빠르고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과거에 효과적이었던 의사결정 기준이나 기업을 바라보는 기존의 틀이 더 이상 최적의 해답이 아닐 수 있다.

특히 기술 발전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산업에서는 성공과 실패의 경계가 사전에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 새로운 시장에 대한 진입, 대규모 연구개발 투자, 인수합병과 같은 결정은 상당한 불확실성을 전제로 한다. 오늘날의 경영 환경에서는 이러한 ‘실패 가능성’ 자체를 감수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질 위험이 더 커지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는 기업 경영에 책임을 묻는 방식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산업 변화가 느리고 시장 구조가 단순하던 시기에 형성된 처벌 중심의 접근은 불확실성과 빠른 판단을 전제로 하는 오늘날의 경영 현실과 점차 어긋나고 있다. 경영 판단이 사후적으로 중대한 책임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클수록 기업은 위험을 관리하기보다는 위험을 회피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유인이 커진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혁신 역량과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과거 이러한 책임 중심의 접근이 수행해 온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국 기업 환경에서 지배구조와 내부 통제가 충분히 작동하지 않던 시기에 강한 사후 책임의 가능성은 경영자의 사익 추구와 명백한 일탈을 억제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문제는 제도의 정당성 그 자체가 아니라, 변화한 환경 속에서 그 역할과 비중이 여전히 적절한지에 있다.

오늘날의 자본시장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화되어 있다. 공시와 회계 기준은 정교해졌고 이사회와 감사기구의 역할도 실질적으로 강화됐다. 기관투자자와 외국인 주주의 영향력 확대, 내부통제와 준법 시스템의 정착은 기업 경영에 대한 감시와 책임 구조를 한층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사후적 책임 부과 외에도 민사적 책임, 시장을 통한 평가, 평판 메커니즘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의 의사결정을 점검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배임죄 등 기업 경영에 대한 책임 구조 역시 보다 현실에 맞게 조정될 필요가 있다. 고의적인 사익 추구나 명백한 신임 배반 행위에 대해서는 여전히 엄정한 책임을 묻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합리적 정보와 절차에 기초해 이루어진 경영 판단까지 사후적 책임 위험에 광범위하게 노출시키는 구조는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서는 오히려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

이제 변화한 산업 환경과 자본시장의 성숙도를 전제로 어떤 판단을 어디까지 책임의 문제로 볼 것인지, 그리고 어떤 영역을 시장과 제도적 장치에 맡길 것인지에 대한 보다 정교한 논의가 요구된다. 위험을 제거하려는 사회보다 위험을 관리하고 감내하는 능력을 키우는 사회가 더 큰 성과를 만들어 왔다. 기업 경영을 바라보는 기준 역시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맞춰 조정될 때 산업 경쟁력과 시장 신뢰를 함께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최현수 KAIST 금융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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