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 고려인에게 비극을 안긴 쌀[장준영의 ‘지피지기’ 일본역사]

출정하는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 병사들 [출처 : 야후재팬 화상]



‘아버지의 회한’

“한밤중에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친 일본군은 아버지가 있는 곳을 대라고 큰 언니를 윽박질렀으나 끝내 입을 열지 않자 언니를 총으로 살해했어요. 둘째 언니가 산에 숨어 있던 아버지를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자 아버지는 황급히 오빠 두 명을 산 넘어 만주 땅으로 피신시켰어요. 그 이후 두 오빠의 소식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 대한 회한을 가슴에 품은 채 우즈베키스탄에서 돌아가셨지요”

필자의 오랜 지인이자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동포 엘리자베타 반 씨가 필자에게 털어놓은 ‘비운의 가족사’다. 그녀는 부친의 이름을 ‘반철수’라고 소개했다. 반 선생은 제1차세계대전 중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 혁명과 러시아 내전(1917~1922년)을 틈타 시베리아를 침공한 일본군에 맞서 연해주에서 항일독립투쟁을 벌이던 빨치산 대장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코만도’라고 불렀는데 코만도란 지휘관을 의미하는 러시아어다. 그에게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1922년 볼셰비키 혁명파와 반혁명파 간의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고 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내전 와중에 시베리아를 침공하여 반혁명파를 지원했던 일본군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철수하자 연해주 고려인 동포들은 희망과 기대에 한껏 부풀어 올랐다. 고려인 가운데 소작인의 비율이 70% 이상에 이르는 만큼 소작인 농민 출신으로 빨치산 독립 투쟁에 참여한 고려인들은 더욱 그랬다. 바야흐로 모두에게 공평한 프롤레타리아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반 선생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도 잠시뿐, 레닌 사후에 권력을 이어받은 스탈린은 1937년 연해주 고려인 17여만 명을 ‘친일 분자 집단’이란 낙인을 찍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내전 중에 일부 부유한 고려인이 일본에 포섭되어 연해주에서 경작한 쌀을 일본군에게 군량미로 공급한 게 화근이었다. 소수의 친일파 고려인 때문에 그동안 목숨을 걸고 가족을 희생시키면서 일본군과 싸웠던 빨치산 항일 투사들의 삶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연해주와 만주에서 항일 독립투쟁을 전개한 ‘봉오동전투’의 홍범도 장군 [출처 : 야후재팬 화상]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의 쌀 공급자, 고려인

볼셰비키 정권은 1918년 3월, 독일과 강화조약을 맺고 전장에서 이탈한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등장에 위기를 느낀 영국과 프랑스는 볼셰비키 정권을 타도하려는 의도에서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면서 미국과 일본에 시베리아 파병을 요청했다. 내전으로 시베리아에 군사적 공백 지역이 생긴 것을 절호의 진출 기회라고 인식한 일본 정부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시베리아 파병을 선언했다. 자원이 부족한 일본은 이 틈을 타 지하자원과 삼림자원 그리고 유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바이칼호수 동쪽에서 연해주와 사할린에 이르는 동부 시베리아에 일본의 괴뢰국을 세우려고 획책한다.

한편 시중에서 일본군의 시베리아 파병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군 공급용 쌀 수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 투기꾼들이 쌀 사재기에 나서 쌀값은 미친 듯이 폭등했다. 도쿄의 쌀 소매가는 평소에 180리터 당 20엔 52전 하던 것이 파병 선언이 발표된 직후에는 53엔으로 무려 2배 이상이나 뛰었다. 참다못한 주부들이 들고일어나 거리로 뛰쳐나오자 언론에서 ‘아줌마부대의 반란’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언론 보도에 영향을 받아 쌀 폭동은 전국 368개 지역에서 70여만 명이 참가하는 전국 규모의 소요 사태로 발전했다. 결국 이에 책임을 지고 데라우치 내각은 총사퇴했다.

시베리아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주식인 쌀 확보는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파병 초기에 3만 7,000여 명이었던 병력은 후반에는 10만여 명 규모로 대폭 확대했다. 병력이 늘어나는 만큼 군용 쌀 수요도 증가했다. 마침 연해주 거주 고려인들은 최초로 연해주에서 벼 재배에 성공하여 북쪽의 하바롭스크까지 벼농사 경작 범위를 넓혔다. 일본 국내에서 공급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연해주 고려인은 쌀 공급자로서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일본은 고려인 마을마다 친일 조직 ‘민회’를 조직하여 부유한 고려인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켜 이들을 쌀 매입에 동원했다. 고려인이 일본군에게 군량미를 판매하는 행위는 러시아인이 고려인을 불신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연해주 시베리아에서 활약한 러시아 빨치산 간부들 [출처 : 야후재팬 화상]


‘소련인민위원회·전연방공산당중앙위원회 결정

제1428-326호’

일본군이 이렇다 할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압력을 받고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지역을 접수한 극동지역 공산당 지도부 고위 인사는 “일본의 시베리아 점령 이후에 러시아로 들어온 고려인 가운데 친일 분자가 있다”라고 언급하는 등 고려인에 대한 경계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고려인 사회는 친일파 집단으로 매도되어 크게 위축되었다. 당국의 규제도 강화되기 시작했다. 고려인에 대한 규제 조치로서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국경지대 경비 강화, 불법 입국한 조선인 추방을 위한 합동국가정치보안부의 권한 확대, 고려인 이민자에게 토지 불하 금지, 농업이민 금지 등이 시행되었다.

이런 와중에 1937년 8월, 고려인 사회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소련인민위원회·전연방공산당중앙위원회 결정 제1428-326호. 극비. 극동지방 국경지구의 고려인 이주에 관하여’란 제목으로 극동지방에서 일본의 스파이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고려인 전원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시킨다는 내용의 인민위원회 의장 몰로토프와 공산당중앙위원회 서기 스탈린이 공동 서명한 이주 명령서였다. “당은 우리 고려인 당원을 믿지 않는 것인가? 소수민족이라고 해서 함부로 내팽개치는 건가? 레닌 전집을 아무리 뒤져봐도 이런 내용은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라며 연해주 고려인들의 분노는 들끓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공산당은 냉혹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를 거부하면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거나 처형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일본 관동군은 1937년 7월에는 중국 본토를 침공하며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스탈린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를 한 달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연해주를 포함한 소련 극동지역은 지형상으로 동쪽에는 일본 본토와 남쪽에는 일본의 식민지 조선, 서쪽에는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에 포위되어 고립된 형국이 되었다. 여기에 블라디보스톡과 연해주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의 잠재적 스파이들’이 지역 전체 인구의 50%나 거주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소련 지도부에게 심각한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던 듯하다. 필자는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집단 이주는 이런 국제정세의 맥락에서 새롭게 접근해 볼만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1937년 가을, 중앙아시아로 향하는 시베리아 짐짝 열차 안에는 돈을 위해 공동체를 팔아먹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공동체를 위해 처자와 자식을 희생한 사람들도 타고 있었다. 거기에는 카자흐스탄의 홍범도 장군, 키르기스스탄의 최재형 선생, 우즈베키스탄의 반철수 선생 가족들이 섞여 있었다. 시베리아 열차는 연해주 우리 고려인의 자화상이었다. 아니, 식민지 시대 우리 조선 민족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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