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빈 살만·그리고 올트먼…위험한 ‘포식자들의 시간’이 왔다 [북적book적]

정치와 기술의 결합…新 권력의 탄생
‘힘’과 ‘속도’로 기존 규칙·제도 잠식
“우리는 포식자를 맞을 준비가 됐는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47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거대 IT기업 최고경영자(CEO)들 [AFP]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1502년의 마지막 밤. 체사레 보르자, 일명 발렌티노 공작은 역모를 진압하고 공국을 되찾은 직후였다. 그는 한때 자신의 편이었으나 등을 돌려 목숨을 노렸던 용병대장들을 성으로 초대했다. 명목은 화합의 연회. 술과 음악이 끝나고 돌아가려는 이들을 보르자는 개인 응접실로 다시 불러 모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그가 아니라 무장한 군인들이었다.

용병대장을 포함한 성안의 다수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다. 현장을 지켜본 피렌체 공화국의 서기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0년 뒤 ‘군주론’에서 보르자를 권력의 전형으로 소환한다. 이상적 군주라기보다, 복수조차 꿈꾸지 못하도록 정적을 짓밟는 냉혹한 통치자. 목표를 정하면 지체없이 수단을 동원해 결과를 만들어내는 인간형. 파리정치대학 교수이자 마테오 렌치 전 이탈리아 총리의 정치 고문이었던 줄리아노 다 엠폴리는 이를 ‘보르자형’ 인간이라 부른다.

보르자형 인간은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은 1순위 왕위 계승자가 되자마자 왕가와 정·재계 인사 수백 명을 리야드의 최고급 호텔에 장기간 구금하며 권력을 장악했다. ‘돌아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더욱 강경해진 이민 정책과 대대적인 지출 구조조정을 내세워 2기 행정부의 출발부터 속도를 높였다. 여기에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마크 저커버그 메타 회장 등 기술 엘리트들이 가세한다. 막대한 자본과 기술을 무기로 정계와 재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향력을 확장하는 이들이다.

트럼프와 빈 살만의 권력 장악 방식, 그리고 테크 엘리트들의 속도전은 닮았다. 이들에게 핵심 덕목은 ‘속도’와 ‘힘’이다. 포식자가 먹잇감을 제압하듯 절차와 규칙, 제도로 짜인 구질서를 밀어붙인다. 느리고 답답한 기존 엘리트 대신 즉각적 해결사를 원하는 대중의 갈망은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준다. 기술과 정치가 뒤엉킨 시대, 보르자형 권력자와 디지털 엘리트가 결합한 새로운 포식자들이 구권력을 잠식하고 있다. 지금은, 말 그대로 ‘포식자들의 시간’이다.

현실과 가상이 동시에 전쟁으로 들끓고, 신기술이 패러다임을 뒤흔드는 격동의 국면은 포식자들에게 최적의 무대다. 한계에 봉착한 체제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 속도와 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신세계에서 보르자형 인간들은 역경을 견디는 데 그치지 않고, 예상 밖의 사건과 불안정, 심지어 호전성까지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한다”고 말한다.

포식자들의 시간/줄리아노 다 엠폴리 지음/을유문화사

더 나아가 그는 규칙과 인권으로 권력을 통제했던 시대야말로 짧은 예외였는지 모른다고 지적한다. 권력의 역사는 본래 속도와 기습, 장악의 기술 위에 세워져 왔다. 오늘의 일탈은 어쩌면 정상으로의 회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은 다소 양상이 다르다. 권력이 기술 문명과 결합했기 때문이다. 머스크와 저커버그는 교황의 자리를 탐내지 않고 ‘추기경’에 머물렀던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와는 다르다. 이들은 권력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관습을 깨고 기행을 감수하며 전면에 선다. 여기에 보르자형 권력자들은 이 디지털 정복자들과 손을 맞잡고, 이들의 의지를 전폭 지원한다. 빈 살만은 기술 규칙이 우선하는 스마트 도시를 건설 중이고, 트럼프는 행정부 핵심 영역을 실리콘밸리 가속주의자들에게 맡겼다. 국가 권력과 플랫폼, 자본과 알고리즘이 결합한 전례 없는 권력의 탄생이다.

AI는 그 무기를 더욱 날카롭게 만든다. 저자는 “AI는 단순한 권력의 기폭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어떤 기계와도 다른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라며 “자동화가 수단의 문제라면 AI는 목적에 관여한다”고 짚는다. 위험은 기술 그 자체보다, 그 혼돈의 대가로 ‘새 질서’를 약속하는 포식자들이다. AI를 신뢰해도 좋다는 기술 지도자들의 확신, 신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지배한 계몽주의 이전을 떠올리게 하는 역사 감각의 결여가 더 근본적인 위협이라는 것이다.

전직 정치 고문이자 정치평론가인 저자는 그의 책에서 권력의 중심에서 목격한 장면들을 블랙코미디처럼 펼쳐 보인다. 제 기능을 상실한 유엔 총회장의 공허한 말들, 과거의 영광에 머문 오바마 재단 만찬장의 표정들까지. 포식자의 살벌함과 대비되는 웃음 뒤에는 날 선 질문이 남는다. 민주주의는 포식자들의 시대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16세기 스페인 정복자에게 무너진 아스테카 문명처럼, 안일함과 무지가 어떤 결말을 부르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책은 누구도 비난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한다. 그것이 미래를 대비하는 최선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난 30여년간 서양 민주주의의 정치 지도자들은 아스테카인들을 그대로 빼다 박은 태도로 첨단 기술의 정복자들을 대했다. 하지만 고분고분함으로 위정자들은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면서 “이 책은 심연으로 가라앉고 있는 한 세계의 숨결과, 그 자리를 차지할 또 다른 서릿발 같은 지배를 이야기하기 위해, 아스테카 서기관의 관점으로 쓴 것”이라고 밝혔다.

포식자들의 시간/줄리아노 다 엠폴리 지음·이세진 옮김/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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