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식 ‘난수 방송’ 25년 만에 등장
美·이스라엘 공습 직후 등장…스파이 통신망 의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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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챗GPT 이미지 생성] |
[헤럴드경제=정목희 기자] “타바조(주의)!”
치지직거리는 단파 라디오 잡음 사이로 한 남성의 페르시아어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는 “타바조!”를 세 번 외친 뒤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또박또박 숫자를 읽기 시작한다.
“6. 4. 0. 9. 3. 9.”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열. 그러나 이 숫자는 누군가에게는 명령일 수도 있다.
이 기묘한 방송은 지난달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처음 공습한 직후 등장했다. 이후 서유럽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송신기에서 단파 라디오를 통해 정기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0일(현지시간) 이 방송이 이란 내부에서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정보전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는 신호일 수 있다고 보도했다.
전직 미국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이 방송이 이란 내부에 있는 정보원들과 연락을 유지하기 위한 비상 통신망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모스크바 CIA 지부장을 지낸 존 사이퍼는 “이것은 이란 내부 정보원들과 연락하기 위한 예비 통신망일 가능성이 크다”며 “전쟁 상황에서는 이런 방식이 완벽한 대체 통신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방송은 며칠 뒤 정체불명의 전자음과 잡음에 잠시 묻히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 소리가 이란 측이 전파를 교란하려 한 시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방송은 곧 다른 주파수로 옮겨 다시 시작됐다. 남성의 목소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숫자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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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 방송과 통신을 이용한 첩보전을 보여주는 이미지 [123RF] |
전문가들은 이 방송이 이른바 ‘난수 방송(number station)’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난수 방송은 정보기관이 단파 라디오를 통해 스파이들에게 암호화된 지령을 전달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현장 요원은 숫자를 받아 적은 뒤 암호표를 이용해 메시지를 해독한다.
페르시아어 난수 방송이 확인된 것은 약 25년 만이다. 2001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잠시 등장한 적이 있으며, 당시 방송은 러시아 정보기관이 운영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현재 이 방송은 이란 시간 기준 오전 5시30분과 오후 9시30분, 하루 두 차례 약 1시간30분 동안 송출되고 있다.
송신 위치는 아직 특정되지 않았다. 다만 단파 감시 단체 ‘프리욤(Priyom)’은 신호 도달 시간을 분석한 결과 서유럽 어딘가에서 송출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방송이 시작된 시점도 주목된다. 이란 정부가 외부 인터넷 접속을 강하게 제한한 때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이란은 위기 상황마다 인터넷을 차단해 왔는데, 전쟁 상황에서는 내부 정보원들의 통신이 특히 어려워질 수 있다.
사이퍼는 “인터넷이 끊기거나 전화망이 차단돼도 단파 라디오는 여전히 연락 수단이 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