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기관장은 아무나…” 모욕감에 거리 나선 예술가들 [고승희의 현장에서]

문화연대 등 ‘이재명 정부 문화예술 인사정책을 규탄하는 문화예술계 일동’ 관계자들이 21일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문화예술계 인사조치 규탄 및 즉각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문화예술계가 10년 만에 다시 거리로 나왔다. 총 65개 단체, 794명의 예술인과 연구자. 2016년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태 이후 다시 나온, 연극·음악·무용·영화·미술 등 장르를 불문한 예술계의 집단행동이다. 싱어송라이터 이서영은 “현 정부에 블랙리스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화이트리스트가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보은 인사’의 망령이 관가를 배회하는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예술계 인사 행태는 ‘낙하산’의 반복을 넘어 생태계 전체에 대한 무지로 인해 발생한 폭력이자 전문성을 무시한 퇴행이라는 인식이 거세다.

문화예술계에선 이미 지난해 8월 IT(정보기술) 전문가인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임명부터 ‘상식 밖 인사’라고 봤다. 그러다 지난 1월 배우 이원종이 한국콘텐츠진흥원장 후보로 검토되고 있다는 소식에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후 장동직 국립정동극장 이사장, 장한나 예술의전당 사장 등 4개월간 이어진 일련의 인사로 ‘셀럽·보은·밀실’이라는 키워드가 전면에 등장했다.

문화계를 ‘총궐기’하게 만든 사태의 도화선은 서승만 국립정동극장 대표이사,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의 한국문화관광연구원장 인사였다. 두 사람은 모두 선거 국면마다 여당 캠프의 최전선에서 스피커 역할을 해온 강력한 우군이었다. 서승만은 2022년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를 공개 지지한 뒤 친명 성향의 유튜브 채널을 운영했고, 황교익은 이 대통령이 경기도지사로 재직하던 2021년 경기관광공사 사장에 내정됐다가 ‘보은 인사’ 논란으로 사퇴한 전력이 있다.

문화예술 기관장은 유명세를 누리는 셀럽의 ‘액세서리’ 같은 자리가 아니다. 예산을 분배하고, 예술인의 생존을 살피며, 국가 문화 정책의 비전을 설계하는 ‘축적의 영역’이다. 이원재 문화연대 집행위원장은 “현 정부의 인사는 문화예술의 공공성과 전문성, 문화예술계의 신뢰를 훼손하는 파행적 인사”라고 일갈했고, 정용철 서강대 교수는 “축구대표팀 감독에 서장훈과 강호동을 임명하는 격”이라고 꼬집었다.

과거 정부가 ‘블랙리스트’로 예술인을 배제시켰다면, 이번엔 예술가를 선별해 요직에 앉히는 방식을 취하면서 현장에선 자기 분야에서 실력을 쌓아도 권력의 ‘화이트 리스트’에 들지 못하면 소외될 수 있다는 박탈감이 확산되는 양상이다. 여기에 전문성 없는 수장이 이끄는 기관은 정책적 독립성을 잃고 정권 입맛에 맞춰 달라질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블랙리스트 트라우마는 현장에 여전한데, 이번엔 다른 방식으로 권력이 문화에 개입하는 셈이다.

일련의 인사는 개인의 자격 논란을 넘어 정부가 해당 분야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정책 방향을 어떻게 가져갈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문화예술 공공기관은 단순한 행정 조직이 아니다. 정책의 실행 엔진이자 생태계의 핵심 인프라다. 기관장 한 사람의 철학이 예산 배분부터 지원 방향, 현장과의 신뢰 관계까지 결정한다.

지금까지의 문화계 인사만 봐서는 ‘문화예술계는 아무나 가도 되는 곳’이라는 경시(輕視)가 읽힌다. 정용철 교수는 “열심히 해봐야 결국 정권과 가까운 사람이 다 차지한다는 냉소가 퍼질 때 문화예술의 창의력은 죽어버린다”며 “이재명 정부는 지금 대한민국 문화의 기초 체력인 신뢰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고 일갈했다.

더 큰 우려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업계에선 국립극장을 비롯해 향후 전국 지역문화재단 공공기관장 인선까지 ‘코드인사’가 확산하지 않겠냐고 내다본다. 30년 만에 국책연구원 전직 연구자들까지 실명 성명을 내는 ‘이례적 행보’를 보인 것은 이 파행이 남길 상처가 깊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행은 비단 특정 정권만의 일탈의 결과는 아니다. 정치권이 문화예술을 국가적 비전의 핵심이 아닌 ‘권력의 부속물’로 취급해 온 해묵은 관성의 결과다. 이 사태는 문화예술에 대한 존중의 부재에서 비롯됐다.

문화예술이 정치적 보은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예술의 독립성과 공공성은 그 의미가 희미해진다. 거리로 나선 예술가들이 전문성에 기초한 인사 원칙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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