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톤 무색한 ‘즉각적 가속·안정적 제동’
빗길에서도 밀폐된 라운지 느낌 정숙성
강한 제동에도 쏠림 없는 제동력 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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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여는 순간부터 럭셔리의 향연이다. 차체는 낮고 길었고, 두 개의 문은 웬만한 세단의 앞뒤 문을 합친 것처럼 큼직했다. 실내로 몸을 밀어 넣자 두꺼운 문이 바깥 소음을 잘라냈다. 부산 해운대 도심의 빗소리와 주변 차량 소음은 유리창 너머로 멀어졌다. 롤스로이스의 첫 순수전기차 스펙터, 그중에서도 고성능 버전인 블랙 배지 스펙터(사진)는 출발 전부터 ‘조용함’을 하나의 장비처럼 느끼게 했다.
최근 부산 해운대에서 울산 울주군 방면까지 약 40㎞ 구간에서 롤스로이스 블랙 배지 스펙터를 시승했다. 도심 정체 구간과 해안도로, 고속화도로가 섞인 코스였다. 날씨는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했다. 노면 상태가 고르지 않은 구간도 있었고, 부산 특유의 좁고 복잡한 도심길도 지났다. 차의 민낯을 보기에 오히려 좋은 조건이었다.
블랙 배지 스펙터는 롤스로이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양산 모델이다. 최고 출력은 659마력, 최대 토크는 109.6㎏·m다. 공차중량은 2902㎏에 달한다. 숫자만 보면 묵직한 대형 전기 쿠페에 가깝지만, 실제 움직임은 예상보다 훨씬 가볍고 매끄러웠다. 국내 기준 주행 가능 거리는 398㎞다.
가속페달을 살짝 밟자 차가 조용히 앞으로 미끄러졌다. 전기차 특유의 날카로운 출발감은 절제돼 있다. 굼뜨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페달을 조금 깊게 누르면 거대한 차체가 한 박자 쉬지 않고 앞으로 뻗어 나간다. 보통 무거운 차는 속도를 올릴 때 ‘밀어낸다’는 느낌이 강한데, 블랙 배지 스펙터는 차체가 바닥을 움켜쥔 채 수평으로 번져 나가는 듯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정숙성이다. 단순히 엔진음이 사라져 생기는 정숙성과는 결이 달랐다. 프레임리스 도어 구조의 2도어 쿠페임에도 이중 접합 유리와 두터운 방음 설계가 외부 소음을 촘촘히 걸러냈고, 차체 하부에 깔린 대용량 배터리도 노면에서 올라오는 소음을 막는 데 한몫하는 듯했다. 빗길을 지나고 속도를 올려도 타이어가 노면을 치는 소리나 바람 소리는 멀리서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실내는 하나의 밀폐된 라운지처럼 고요했고, 주행 속도가 높아져도 대화 음량을 굳이 키울 필요가 없었다.
블랙 배지 스펙터의 브레이크 감각도 만족스럽다. 3톤에 가까운 차체를 생각하면 제동 때 앞쪽으로 무게가 쏠리거나, 탑승자가 몸으로 감속을 느끼기 쉽다. 하지만 속도를 줄이는 과정까지 부드럽게 다듬었다. 강하게 제동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차체가 허둥대지 않았다. ‘밟았는데 멈춘다’기보다, 차가 스스로 속도를 거둬들이는 느낌에 가깝다.
고속화도로에 올라 가속을 이어가자 블랙 배지라는 이름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일반적인 롤스로이스가 조용하고 우아한 이동에 초점을 맞췄다면, 블랙 배지는 그 안에 약간의 긴장감을 더한다. 스티어링 휠의 무게감은 가볍지 않았고, 차체 반응도 예상보다 직관적이었다. 거대한 럭셔리 쿠페를 몰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운전자가 차와 떨어져 있다는 느낌은 크지 않았다.
블랙 배지 스펙터에는 ‘인피니티 모드’와 ‘스피리티드 모드’가 적용됐다. 인피니티 모드는 스티어링 휠의 ‘∞’ 버튼을 누르면 활성화되며 최고 출력 659마력을 끌어낸다. 스피리티드 모드는 최대 토크를 순간적으로 109.6㎏·m까지 높여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4.3초 만에 도달하도록 한다. 다만, 최신 전기차에 익숙한 운전자라면 낯선 부분도 있다. 최근 많은 차량이 과속 단속 카메라나 제한속도 초과를 적극적으로 알려주는 데 비해, 스펙터는 그런 전자기기적 친절함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내비게이션 화면도 차의 가격과 크기를 생각하면 화려함보다는 절제에 가깝다.
실내 역시 곳곳에서 고급감이 묻어난다. 가죽, 스티치, 우드, 금속 장식이 각자 존재감을 내면서도 요란하지 않다. 전면부의 일루미네이티드 페시아와 별처럼 수놓인 장식은 전기차의 미래적 분위기를 만들지만, 전체적인 감각은 여전히 수공예 럭셔리에 가깝다. 디지털 요소가 많아졌지만, 손끝에 닿는 대부분의 것은 여전히 물성이 살아 있다. 블랙 배지 스펙터의 가격은 7억1900만원부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