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광장] 퇴직연금 70%룰, 이제는 바꿔야 한다


“안전을 위해 속도를 제한합니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이 문구에 대해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도로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속도 제한은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도다. 만약 모든 자동차의 최고속도를 시속 60㎞로 제한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고 위험은 일부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고속도로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물류비는 치솟으며 사회 전체의 효율은 떨어질 것이다. 위험을 줄인다는 명분이 삶의 기회까지 제한하는 순간, 규제는 보호가 아니라 족쇄가 된다.

우리 퇴직연금 제도의 ‘위험자산 70% 제한’도 비슷하다. 현재 국내 퇴직연금에서는 주식형 펀드나 상장지수펀드(ETF) 등 위험자산 투자 비중을 전체 적립금의 70%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원금 손실 위험으로부터 가입자를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얼핏 들으면 매우 합리적인 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금융의 세계에서 선의는 종종 정반대 결과를 만든다. 퇴직연금의 70% 규제는 가입자를 보호하기보다 오히려 노후를 가난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퇴직연금은 단기 금융상품이 아니다. 대부분 가입자에게 퇴직연금의 투자 기간은 20년, 길게는 40년에 이른다. 이 정도 시간이라면 가장 중요한 변수는 단기 변동성이 아니라 물가 상승률을 웃도는 장기 성장성이다. 20대와 30대 가입자에게 주식 비중 확대가 합리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긴 시간은 시장의 충격을 흡수하고 복리 효과를 극대화한다.

그런데 우리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25세 사회초년생과 은퇴를 2년 앞둔 58세 근로자에게 사실상 유사한 투자 규제를 적용한다. 젊은 가입자가 스스로 판단해 장기 투자하겠다고 주식 비중을 80~90%로 가져가고 싶어도 제도가 막아선다. 정부가 성인의 위험 판단 능력까지 대신 행사하는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규제가 실제 성과를 가로 막는다는 점이다. 한국 퇴직연금은 오랫동안 원리금보장형 상품 중심 구조에 갇혀 있었다. 가입자 보호라는 이름 아래 예금성 자산 편중을 강화한 결과다. 실제 많은 가입자는 수십 년 동안 연금을 운용하고도 물가상승률을 겨우 따라가는 수준의 성과를 경험했다. 연금 적립금은 쌓였지만 충분한 노후소득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정부 당국은 안전하게 지켰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정작 가입자는 은퇴 후 자산 부족이라는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단기 손실 위험은 줄였을지 몰라도 장기 빈곤 위험은 키운 셈이다.

해외 선진국들은 정반대의 접근을 한다. OECD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나 호주 네덜란드 캐나다 등 주요국들은 주식 등 위험자산에 대한 양적 제한 대신 다각화된 투자 전략과 운용사의 전문성을 중시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글로벌 스탠다드는 점차 운용회사의 책임과 가입자의 선택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은 여전히 ‘정부가 국민 돈을 대신 걱정해주는 방식’에 머물러 있다. 70% 위험자산 규제는 더 이상 안전장치가 아니다. 국민 노후자산의 성장 엔진에 걸어놓은 속도 제한 장치다. 이제는 과감히 폐지할 때다. 생애주기에 따른 유연한 자산배분을 허용하고 투명한 정보 제공과 함께 금융회사의 수탁자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진화시켜야 한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국민 대신 투자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투자할 수 있는 환경과 책임 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민주영 신영증권 연금사업부 상무 경영학(연금금융)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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