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진 운동장에 섰던 홍대 여성 뮤지션
달라지지 않은 불균형 환경 향한 세련된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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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희 페스티벌’을 기획한 싱어송라이터 겸 작가 오지은 [마포아트센터 제공]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나를 알기 전의 너로 돌아가 / 그렇게 똑똑한 척하며 살아가.” (‘화’, 2007)
“너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 날 사랑하고 있는 너의 마음을 사랑하는 거겠지.”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2009)
“고작 이런 사람이라서 / 고작 이것밖에는 안 되는 사람이라서 미안해.” (‘고작’, 2013)
이별에는 환멸과 저주를 먼저 보냈다. 순응 혹은 눈물을 당연히 여기던 자리엔 낭만을 걷어낸 내밀함이 적혔다. 그는 사랑을 포장하지도, 이별을 슬픔으로 소비하지도 않았다. 저주하거나 자책했고, 관계의 위선을 해부했다. 툭 던지듯 써 내려간 노랫말은 방어기제를 허물었다. 싱어송라이터 오지은의 별칭은 ‘홍대 마녀’. 인디 여성 뮤지션을 여신과 마녀로 이분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남성 동료 뮤지션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가사는 본인이 직접 쓴 거 아니죠?”
오지은(45)의 답변은 노래 가사보다도 직설적이었다. “이 가사가 그렇게까지 대단한가요? 뭐가 좀 심오해요? 아니면, 제가 되게 예뻐 보이나요?”
어떤 세계에선 성별이 ‘역량의 한계’였다. 모든 이유를 붙여도 ‘이상하다’는 생각만 들었다고 한다. 그러다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
“나 스스로 저평가 당하도록 만든 구석이 있었다고, 끊임없이 이유를 만들었어요. 그 질문을 제가 납득하고 싶었으니까요.”
2007년 데뷔해 약 10년. 왕성하게 활동하다, 홍대를 떠났다. 잠시 떨어져 지난 시간을 되짚었다. 창작자 오지은을 둘러싼 ‘홍대’라는 특수한 음악 환경을 곱씹는 시간이었다. 끈질기게 따라다닌 질문에 자조와 자책으로 답했던 그가 새로운 해답을 찾았다.
끊임없이 소비되면서도 오독됐던 사람들을 위한 축제가 그 답이다. 이름은 ‘영희 페스티벌’(12~14일, 마포아트센터). 너무 흔해 오래도록 보이지 않았던 그 이름이 다시 등장했다. ‘보편의 이름’이자, ‘영광과 기쁨’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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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희 페스티벌’을 기획한 싱어송라이터 겸 작가 오지은 [마포아트센터 제공] |
‘영희 페스티벌’의 씨앗이 뿌려진 건, 30년 전이었다. 오지은은 “시작은 망상이었다”며 웃었다. 1997년 미국에서 시작된 여성 싱어송라이터 중심의 음악 축제 ‘릴리스 페어(Lilith Fair)’ 기사가 실린 잡지를 읽으면서다. 이 페스티벌이 탄생했던 건 미국 주류 음악계의 지독한 불균형 때문이었다.
“미국 음악계에서 중요한 매체 중 하나인 라디오에선 게스트로 여성 뮤지션이 연달아 두 주 이상 나오면 너무 치우쳤다며 노래를 틀어주지 않았대요. 그때 사라 맥라클란이 빌보드 3위 올랐고, 앨라니스 모리셋 앨범은 3000만 장이나 팔았는데도요.”
남성 음악가에겐 적용되지 않았던 ‘룰’이 1990년대 미국의 여성 뮤지션을 뭉치게 했다. 고등학생 오지은의 기억에 ‘릴리스 페어’는 “음악을 한다면 서고 싶은 무대”였다.
오지은은 2006년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동상을 타며 인디신에 등장했다. 이듬해 첫 앨범 ‘지은’으로 데뷔해 당시 홍대를 놀라게 했다. 직접 제작한 첫 음반을 향뮤직에서 냈는데, 홍보 한 줄 없이 1만 장이나 팔렸다. 당시 유희열이 오랜만에 내놓은 토이 앨범이 1위, 오지은이 2위를 했을 정도다. 그렇게 입성한 홍대 인디신은 20년 전 ‘릴리스 페어’가 열리던 미국 음악계보다 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그는 “오랜 시간 음악 페스티벌을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기획하는지 서당개처럼 지켜봤다”며 “누군가는 인기가 많아서, 누군가는 마니아가 있어서, 누군가는 예술성이 높아 부름을 받는다. 그 판단의 이면엔 결정권자들의 무의식과 개인적 취향이 강하게 작용한다”고 봤다.
“회사 면접을 볼 때 회사가 원하는 특정 ‘인재상’이 있잖아요. 특정 성별, 특정 연령대의 사람들이 결정권자라면 혹시 그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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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희 페스티벌’ 출연자들 [마포아트센터 제공] |
‘선택의 기준’을 꽤나 단순했다. ‘성별’은 페스티벌 라인업 구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오지은은 “어떤 때는 불림을 받고, 어떤 때는 불림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됐다”며 “그때마다 위화감이 들었다”고 했다. 그가 서는 페스티벌 무대엔 다른 여자 뮤지션은 없었다. “비유가 적절친 않지만, 마치 쿼터제나 대학의 농어촌 전형 같았어요.”
그에게 시장의 태도는 ‘생색내기’로 비쳤다. 성별 구색 갖추기로 ‘여성 뮤지션’ 한 명 정도 부르는 것을 대단한 배려라며 시혜하듯 내준 것이다. 오지은은 “훌륭한 여성 창작자들이 신(scene)에 그렇게 많음에도 기획자들은 ‘여성 음악은 인기가 없고 집객이 안된다’는 논리로 핑계를 댔다”고 봤다.
그는 특히 시장이 여성 팬덤을 오랫동안 오독해 왔다고 봤다. 오지은은 “기획사 회의 때마다 ‘오지은 팬들은 다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여성 싱어송라이터를 좋아하는 여성 관객들은 되게 내밀하게 음악을 사랑하고 탐구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는데, 시장은 그걸 팬이 없다고 해석해버렸다”고 했다.
작가로 활동 중인 그는 북토크 현장에서도 비슷한 고백을 듣는다. 오지은은 “10년 만에 용기 내서 왔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며 “‘사실 편견이 있어서 언니 음악 안 들었어요’라고요. 여성 창작자의 음악을 좋아하는 자신까지도 사회가 낮춰 볼까 봐, 스스로 거리를 뒀다는 고백을 들었다”고 했다.
올해로 인디신은 탄생 31주년을 맞았으나, 여성 창작자들은 늘 ‘예외적 존재’였다. 뮤지션으로 인정받기보다 ‘여성’으로 분류됐다. 제작자들은 이들을 중세적 방식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속 여성처럼 양분했다. 여신과 마녀라는 이분법적 타이틀로 말이다. 2000년대 중후반, ‘홍대가 신전’이라는 비아냥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지은은 ‘홍대 여신’과는 결이 달라 ‘홍대 마녀’라는 별칭이 붙었다. 1대 홍대 마녀는 김윤아였다.
“여신이든 마녀든 그건 저희가 붙인 호칭은 아니었어요. 저희 중 누구도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았고요. 그 많은 여신도 그 얘기가 나오면 손사래를 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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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싱어송라이터 겸 가수 오지은 [마포아트센터 제공] |
당시 패션 매거진에선 홍대여신과 마녀를 선악 구도로 그린 화보를 게재했고, 음악방송에선 ‘홍대 여자 뮤지션’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한 솥에 담았다. 오지은은 필사적으로 이러한 구분을 거부했다. ‘홍대 여자 뮤지션’ 방송도 될 수 있으면 피했다.
그는 “독립적으로 자기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아니라 여성 뮤지션끼리 가두고 퉁치는 느낌이었다”며 “그렇게 묶이는 순간 또 다른 편견이 씌워질 것 같았다”고 돌아본다. 그가 보는 ‘홍대여신’은 노골적인 마케팅 전략이었다. 그는 “관계자들이 그들의 음악을 ‘홍대여신’으로 묶어 일종의 입간판으로 쓴 것”이라며 “‘홍대에 여신들이 있으니 관심을 가져보라’는 유인책이었지만, 그 이면엔 ‘우리의 진짜 음악은 이게 아니라 다른 거야’라며 내놓는 전략이었다”고 봤다.
‘마녀’보다 ‘여신’이 더 많았던 세계였기에, 오지은에게 붙은 ‘홍대 마녀’ 타이틀은 독특한 지형을 제공했다. 그는 “별칭이 일종의 면죄부가 돼 혼자 그 가두리를 피해갈 수 있었다”며 “그래서인지 동료들과 후배들에게 부채 의식이 있다”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페스티벌 메인 스테이지의 헤드라이너는 아니었지만, ‘마녀’라는 별칭과 함께 그는 보다 작은 무대의 헤드라이너로 선 경험은 있다. 메인 무대의 주요 시간대에도 불렸다. 그런 이유였는지 출연자들의 불균형 성비를 입에 올릴 때 돌아온 말은 유난스럽다는 반응이었다. “그래도 넌 페스티벌에 섰잖아”, “왜 이렇게 욕심이 많아? 뭘 더 하고 싶은데?”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다.
“빌리 아일리시도 한국에서 데뷔했다면 그랜드민트페스티벌(국내 최대 규모 인디 음악 페스티벌) 수변 무대(메인 스테이지 88잔디마당보다 규모가 작은 스테이지)로 출발했을 거예요. (웃음)” 그에게도 어쩌면 ‘홍대 마녀’라는 별칭이 붙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분노와 인내, 자책의 시간은 지났다. 홍대를 등지고 전주로 내려가 지내는 동안 오지은의 시선도 확장됐다. 작가로 활동하며 출판계의 동향을 살폈고, 해외 음악 환경을 보며 “한국 인디신의 성별 편견이 기형적인지” 객관적으로 인지하게 됐다.
심경의 변화가 찾아온 것은 후배들이 마주한 현실을 보게 되면서다. 김사월, 안다영, 정우 등 자기 음악 세계를 잘 가꿔가는 ‘인디신의 대장주’들이 그에게 먼저 찾아와 고단함을 쏟아놨다.
“어느 순간 후배들이 다 부장급이 돼 있고, 자신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가는데 굳이 멀리 있는 저를 찾아와 속내를 꺼내더라고요. 다른 곳에 이야기할 수 없는 고민이었고, 제가 오래 붙잡고 싶지 않고 없애버리고 싶었던 고민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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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희 페스티벌’ 출연자들 [마포아트센터 제공] |
오지은이 겪어온 감정의 시간은 과거가 아니었다. 구조적 불균형과 모순, 숱한 편견이 여전했다. 오지은이 자신을 향해 던진 돌팔매질을 후배들도 도돌이표처럼 반복하고 있었다. 그는 “제가 혼자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다르게 보였다”며 “지금도 여전하며, 어쩌면 더 심각해진 편향적 환경“이라고 했다.
그는 “예전엔 그래도 ‘유희열의 스케치북’ 같은 방송이 있었고, 그랜드민트페스티벌 잔디마당 오후 4시 무대에 오르면 사람들이 내 공연을 보러오지 않더라도 페스티벌 현장에서 오다가다 눈에 띄었다”며 “하지만 알고리즘의 시대가 된 지금은 ‘아는 사람만 아는’ 격차가 너무 커졌다”고 봤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후배들이 찾아오는 날들이 많아지며, 오지은의 안에 확신 하나가 생겼다. 후배 여성 창작자들은 더 이상 “가능성 있는 신인”이 아니라 이미 각자의 시대를 만든 거장들이었다.
“이 사람들만 모아도 이미 하루 페스티벌이 되겠더라고요.” 그의 마음이 요동쳤다. “누가 해줬으면 좋겠는데, 뭔가 좀 쎄한데 설마…. 나인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그는 결국 자신의 삶을 잠시 멈췄다. 4년에 한 번씩 열어오던 브랜드 공연 ‘고사리의 밤’을 취소했고, 출간 예정이던 전주 생활 에세이 일정도 미뤘다. 대신 4개월 동안 사실상 무보수로 ‘영희 페스티벌’ 준비에 매달렸다.
“다들 말도 안 되게 적은 개런티로 참여해 줬어요. 김윤아 선배는 기획안을 듣더니 30초 만에 ‘할게요’라고 하셨고, 선우정아 씨는 일면식도 없는 데 흔쾌히 함께해주셨어요. 다들 이 판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거죠.”
라인업조차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블라인드 티켓은 1분 만에 매진됐다. 마포아트센터의 1004석 극장을 비롯해 3개 공연장을 3일간 가동하는 페스티벌의 놀라운 성과다. 그 소식을 들은 날, 오지은은 전주의 집에서 혼자 울었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분함이 뒤섞였다.
“‘삼국지’ 같은 데 나오는 눈물이었어요. 너무 분해서 찻잔을 쥐어짜며 흘리는 거친 눈물 있잖아요.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 관객들이 이렇게 원하고 있었잖아’ 이런 마음이 들었어요.“
무수히 많은 날이 지나갔다. 20년간 홍대신에서 들어온 수많은 편견의 소리,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면서도 자신을 탓해야 했던 그날들이 파노라마가 돼 떠올랐다. 그는 “그날 관객들이 여성 뮤지션에게 씌워진 편견과 오독에 대해 1분 만에 ‘그것은 아니다’라는 증거를 보여준 것”이라고 했다.
‘영희 페스티벌’은 오랜 시간 뚝 떨어진 섬처럼 존재해 왔던 여성 뮤지션들을 모았다. “바다 위에 홀로 선 섬들을 이으면 온전한 하나의 별자리가 될 것”이라며 “이 페스티벌 자체 홍대 여성 뮤지션들의 계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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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희 페스티벌’ 출연자들 [마포아트센터 제공] |
오지은은 한 때 자신을 가뒀던 피해의식과 섀도복싱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작가로 경험한 출판계, 문학계의 진화를 보며 음악 신도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봤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자가 벗어놓고 간 슬립’에 대한 묘사를 보면서도 저 자신이 그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파스타를 만드는 중년 남성 주인공의 시선에 저를 이입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어요.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을 때도 거친 남성의 마음에 빙의했고요. 그게 더 ‘멋지고 거대한 주류 문학’인 것처럼 교육받았으니까요. 여자 작가들의 내밀한 글은 ‘사변적이고 얄팍한 여류 문학’이라 치부하던 90년대의 정서였죠.”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을 받을 즈음을 전후로 문학계는 달라졌다. 그는 “젊은 작가상 수상자 10명이 전원 여성이어도 대중과 평단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며 “음악신은 너무도 오래된 문법 속에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영희 페스티벌’은 정체된 음악신에 던지는 “가장 세련된 질문이자 답변”이다.
세상의 모든 ‘영희’를 위한 이 축제에선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여성 창작자를 모았다. 김윤아, 이상은, 선우정아 등을 비롯해 김사월, 요조, 안신애, 안다영, 이랑 등 동시대 여성 음악가들이 무대에 선다. 음악뿐 아니라 북토크, 영화 GV(관객과의 대화), 전시, 코미디까지 함께 묶었다. 그는 “음악을 시작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어려운 시기는 가능하면 짧게, 마땅히 누려야 할 영광과 기쁨을 온전히 누리고 자기를 의심하는 시기는 짧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올해 무대에선 다음 해를 기약하며 초대하고 싶은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을 선곡해 부르기로 했다. 테일러 스위프트, 빌리 아일리시가 이들이 선택한 차기 ‘영희 페스티벌’ 주자들이다.
오지은은 “현재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싱어송라이터는 로제씨라고 생각한다”며 “‘강남스타일’의 싸이가 훌륭한 송라이터이자 프로듀서라고 이야기하나 로제씨에 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로제, 씨엘, 아이유 같은 훌륭한 여성 음악인을 모시고 싶다”며 웃었다.
오지은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미래는 역설적으로 ‘영희 페스티벌’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세상이다. 여성 창작자를 굳이 따로 묶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 대형 페스티벌의 메인 무대에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헤드라이너로 서는 일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시대다. 그때까지 ‘영희 페스티벌’은 달린다.
오지은은 “이곳은 여성 창작자들만 위한 무대는 아니다. 자기 부정과 저평가를 당해본 기억이 있는 모든 사람, 마음 안에 ‘영희’를 안고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한 축제”라며 “궁극적으로 이 페스티벌의 폐지를 꿈꾼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