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노아’, 폭력과 구원 사이 ‘신의 뜻’…신탁받은 자의 고뇌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방주가 만들어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씻을 수 없는 죄 속에 살던 ‘카인의 후예’들은 배에 오르기 위해 개미떼처럼 모여든다. 방주를 방어하는 신의 대리인은 배에 오르려는 인간들을 짓밟아 뭉개고, 내팽개쳐 버린다. 살육과 학살이다.

아비규환의 지옥도 앞에서 신탁받은 자, ‘노아’(러셀 크로 분)는 과연 인간의 죄는 사함받을 수 있는지 회의하고 절망한다. 하지만 번민도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들 사이, 생사의 갈림길을 막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신탁과 구원은 파괴와 학살로 이루어진 피의 사명이 된다.

‘블랙 스완’으로 유명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신작 ‘노아’는 성서 속 ‘노아의 방주’ 신화를 영상으로 옮긴 작품이다. ‘노아의 방주’를 중심으로 창세기로부터 내려오는 성서의 역사를 담아내려는 거대한 야심, 그리고 대규모 물량을 동원해 구현한 스펙터클이 일단 눈이 간다. 드라마는 선민과 신탁에서 선민사상과 남성 우위, 장자 계승 등 성서의 근간이 되는 모티브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노아의 이야기를 상상을 보태고 인간적인 색을 덧입혀 재구성했다. 그 중심에는 신탁받은 자로서 노아의 고뇌가 있다. 영화사에 따르면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신의 사명을 마친 노아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했다. ‘신의 사명을 마친 노아는 왜 포도주를 마시고 정신을 잃어 벌거벗을 정도로 취했으며, 아들들에게 험한 소리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방주에 올라타 내릴 때까지 단 한마디 오가는 말이 나와있지도 않은 성서의 시간을 타락한 세상의 속죄와 구원을 고민하는 인간의 시간으로 재해석했다. 


영화는 신의 인간 창조 후 아담으로부터 내려오는 계보를 짧게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금지의 과실을 탐한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내려온 아담은 카인과 아벨, 셋을 낳았고,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서 타락한다. 카인의 후손들은 타락한 세상을 이루고, 셋으로부터 내려온 노아의 가족-노아와 아내(제니퍼 코넬리 분), 그리고 세 아들 샘과 함, 야벳은 카인의 후손들과 섞이지 않고 신의 뜻을 구하며 살고 있다. 노아는 꿈과 환영에 나타난 신의 계시를 조부 므둣셀라(앤서니 홉킨스 분)의 도움으로 해석하고, 타락한 인간을 멸망시키고 세상을 씻을 ‘대홍수’를 예비한다. 그것이 바로 거대한 방주를 지어 인간을 제외한 세상의 모든 생명체를 실어 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꿈에 나타난 계시의 의미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노아의 고뇌는 절도와 간음, 살인 등으로 가득찬 타락한 인간성에 대한 절망을 거쳐 신의 사명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진다. 노아는 신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그 번뇌의 끝에서 “나(의 가족)는 최후의 인간이 될 것인가, 새로운 세상 최초의 인간이 될 것인가”라는 마지막 물음에 당도한다. 그러나 노아의 반대편에 선 자, 타락한 인간의 우두머리인 카인의 후손 두발가인(레이 위슨턴 분)은 “신은 우리에게 노동을 해 먹고 살게 하셨고,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으니 뭐가 문제냐”며 “신은 왜 우리 인간을 버리려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신의 뜻 대신 인간의 뜻으로 살고, 완성된 방주를 빼앗으려 타락한 모든 사람들을 동원해 공격한다. 하지만 노아를 돕는 거대한 바위인간 ‘감시자들’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다. 신이 보내 세상의 빛으로 왔으나 타락한 인간을 도운 죄로 바위 거인이 된 ‘감시자들’의 존재는 마치 ‘트랜스포머’의 외계 로봇을 보는 듯 다소 우스꽝스럽지만, 영화는 웅장하고 비장한 정조로 신화의 세계를 지어냈다.

각각 신의 뜻과 인간의 뜻, 선한 자와 타락한 자,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를 상징하는 노아와 두발가인의 갈등과 대립이 드라마의 중심에 놓인다. 여기에 더해 노아가 구해 배에 태웠으며 후일 장자 샘의 아내가 되는 일라(엠마 왓슨 분), 신의 계시를 두고 아버지와 대립하는 둘째 아들 함이 극적인 긴장의 또 다른 축을 이룬다. 


영화는 결국, 택함받은 백성의 구원과 버림받은 죄인 족속의 절멸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 어느 편에 속하는가는 인간의 뜻도 아니고, 개인의 선악문제도 아니다. ‘타락’은 인류가 안은 천형이며, 그래서 인간적으로 무고한 자들까지도 씻김을 위해 대홍수 속으로 쓸려 들어가는 것이다. 노아는 그것을 깨닫고 “하느님은 내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기 때문에 선택받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노아의 물음도, 두발가인의 외침도 모두 집어삼키는 것은 신의 뜻이며 신이 예정한 길이다. 인간은 신의 뜻을 묻지 못하며, 다만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떤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불편하다. 바위거인인 ‘감시자들’에게 무자비하게 살육되고 학살되는 장면은 차라리 하나의 상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으로부터 ‘신의 뜻’이라는 이름의, 모든 ‘종교적 근본주의’가 품고 있는, 타자를 향한 음험한 폭력과 배제의 욕망을 보는 것은 과잉된 것일까?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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