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가정이 무너진다

[헤럴드경제=서병기 기자]요즘 드라마와 영화를 보면 뚜렷한 흐름이 있다. 폭력과 위험에 방치된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거나 권력과 자본이 벌이는 암투와 음모에 희생된 평범한 가정의 복수를 그리고 있다. 둘은 함께 얽혀 있기도 하다. 전자는 영화 ‘도가니’에서 시작돼 ‘우아한 거짓말’과 ‘방황하는 칼날’‘한공주’‘도희야’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드라마도 고교생 딸을 재벌가의 딸(김성령)의 내연남과 남편(김상중)에 의해 잃은 백홍석(손현주)의 이야기를 다룬 ‘추적자’와 유괴당한 9살 딸 샛별이를 구하기 위한 엄마(이보영)의 눈물겨운 사투를 그린 ‘신의 선물-14일’이 그런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도가니’와 ‘추적자’가 나올 때만 해도 아이를 다루는 내용치고는 좀 세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세월호 침몰과 어처구니 없는 구난 시스템을 목격하면서 아이들을 다루는 이런 콘텐츠의 강도가 세다는 느낌은 이내 사라졌다. 현실에서는 그것보다도 더 불행한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겠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슬픈 일이다.

‘호텔킹’ 1회 첫장면은 과거 같으면 아이들의 학대라며 크게 문제가 될만한 내용을 담았다. 이동욱이 제이든 시절 미국 뒷골목에서 동생과 함께 앵벌이를 하다 돈이 적다며 어른들에게 맞는 장면은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했다. 아이들을 혹독한 상황속에 집어넣는 것은 강력한 극성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다. ‘호텔킹’에서도 이동욱이 어떻게 ‘호텔괴물’이 됐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어린 시절 어두운 과거를 보여주었겠지만, 시청자가 자극에 둔감해진 탓도 있다.

가진 자들의 이윤추구는 평범한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사진은 ‘골든 크로스‘에서 외국계 기업의 한국지사장인 마이클 장으로 분한 엄기준. 외모는 귀엽기까지 하다

자식이 어이없게 당하는 모습을 보는 시청자나 관객은 분노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가해자가 죄의식이 전혀 없거나, 권력과 명예를 잃지 않으려고 계속 탐욕을 보인다면 그 분노는 배가된다. 여기에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파헤쳐야할 공권력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분노는 2차, 3차로 이어진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눈에 보이는 게 없다. ‘신의 선물’에서 이보영은 딸을 찾기 위해 피의자에게 밟히고 있는 상황에서도 바지 가랑이를 놓치지 않는다. 아이를 잃은 데 대한 복수는 거의 사적인 차원에서 머물고 있다. 이른바 자구노력이다. 공권력에 기댈 수 없는 상황에서 사적복수를 감행해야 한다. ‘추적자’에서 말단형사 손현주를 도와주는 사람은 몇몇 후배 형사밖에 없다. ‘신의 선물’에서 이보영은 전직형사로 흥신소를 차리고 있는 조승우 정도가 도와준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잃은 아버지(정재영)가 직접 총을 들고 법인을 잡으러 나서야 했으며, ‘한공주’에서는 끔찍한 청소년범죄의 피해자가 오히려 도망다녀야 하고 결국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었다.

KBS 수목극 ‘골든크로스’에서 서민은 경제적 어려움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마저 위채롭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강도윤(김강우)은 여동생을 잃은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그의 아버지(이대연)가 딸을 죽인 살인범으로 누명을 쓰다가, 결국 여동생을 죽인 경제관료 서동하(정보석)에게 아버지까지 잃게 된다. 이 거대한 음모를 파헤쳐야 하는 김강우를 돕는 주변의 힘은 미약하다. 사건 내막을 알고 있는 인터넷 매체의 갈상준 기자와 의식있는 한 명의 국회의원 정도다. 이들이 싸워야 할 상대는 대한민국 경제를 움직이는 경제관료와 법무법인 신명, 돈을 위해서라면 무슨 악행도 벌일 수 있는 외국계 기업의 합병전문가 마이클 장(엄기준) 등 모두 버겁다.

김강우의 가족 두 명을 죽인 서동하는 “대의를 위해서는 피래미 한 명 정도는 희생되야 하는 것 아니야”라고 말하며 힘없는 자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긴다. 상위 0.001%의 우리나라 경제를 움직이는 비밀 클럽 ‘골든 크로스’의 정점에 있는 전 경제기획원 장관이자 정보석의 장인인 김재갑(이호재)은 더욱 가관이다. “가문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는데, 그렇게 하는 게 곧 애국하는 거였다”고 말하는 김재갑을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평범한 가정에 위해를 가하는 범인도 ‘추적자‘에서는 대통령후보였고 ‘신의 선물’에서는 대통령의 부인이었다. ‘쓰리데이즈‘에서는 정계와 군, 재계를 주무르는 미치광이 거대자본가 김도진(최원영), ‘골든크로스’에서는 경제관료와 법무법인, 기업합병을 담당하는 외국계 기업 등 권력 상층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드라마들이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기 어렵다. 국가재난이나 아이들이 당하는 수난을 구조해줄 국가 안전망은 없고, 아이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기성세대의 죄의식과 부채의식이 이런 드라마를 양상하고 있지만, 이런 드라마를 보면 분노와 함께 허탈감도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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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기 선임기자@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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