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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덕씨는 LA 코리아타운 웨스턴가에 자리한 팔래스뷰터 미용대학 학장과 오렌지카운티 롤라뷰티 오너이며 미용재료상과 화장용품 종합판매회사인 Palace Beauty, Inc. 사장을 맡고 있다. 16년 동안 별다른 굴곡없이 LA 한인사회에서 뷰티비즈니스의 대표주자로 자리하고 있다. 사진 / 김윤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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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야구 얘기-. 레오 듀로셔라는 인물은 1954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챔피언팀으로 이끌고 윌리 메이스라는 걸출한 타자를 길러낸 명감독이다. 4개팀을 거치며 24년 동안 3,740게임을 지휘해 2,009승을 쌓은 역량도 잘 알려져 있지만, 고전같은 명언 한 마디가 그의 야구인생만큼이나 유명하다.
”사람 좋으면 꼴찌(Nice guys finish last.)” 스포츠에서건 비즈니스에서건 크고 작은 승부를 경험한 분이라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조병덕 사장은 그저 좋기만 한 캐릭터를 갖고서도 성공한 비즈니스맨이다. 주변에서 그에 대해 거드는 말을 들려달라면 한결같이 약속이나 한 듯 “어이구, 사람 참 좋지요.”라고 운을 뗀다. 인상에서 성격이 나타난다지만 조 사장이야말로 정확하게 그렇다.
알이 큰 안경 너머의 눈매는 늘 웃음주름이 가시질 않는다. 상대방이 뭐라 뭐라 의견을 펼 때는 한 박자도 놓치지 않고 “그래요.” “아,그렇군요.” 라는 식이다. 맞장구 비율이 95% 이상은 되지 싶다. 면전에선 그래놓고 뒤돌아서서 딴소리? 적어도 조사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인성을 바탕으로 삭막하고 살벌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한가지 업종을 붙잡고 16년을 흐트러짐없이 오름세로 일관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최고경영자로서 후한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뭐랄까…답답할 정도로 원칙을 고수하면서 절대 무리하지 않는 분이지요. 당시 상황에선 화가 날 만큼 정도만을 고집하는 게 못마땅했지만 돌이켜보면 남편이 지켜온 방식이 우리 사업을 큰 업다운없이 일관되게 여기까지 이끌어온 힘이 아닐까 싶네요.”.
23년간의 결혼생활과 더불어 비즈니스 동반자로서 조사장을 빈틈없이 지켜봐온 부인 신디 조씨의 말이다.
원칙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으니 부딪힐 일도 부드럽게 넘길 수 있고, 변칙에 대한 유혹에도 눈을 돌릴 이유가 없으니 당당할 수 있다. 떳떳한 만큼 사업적 성과에 긍지와 자신감이 클 터이고, 그런 가운데서 여유와 배려, 인정을 잃을 이유가 없는 셈이다.
팔래스뷰티는 어느덧 LA 한인사회에서 미용과 화장용품의 대표 브랜드처럼 뿌리 내렸다. ‘아름다움이 한 곳에’라는 표어는 참 잘 어울린다.
“예쁘게 만들어 주는 물건은 다 갖춰놓자는 다짐으로 다른 업소들보다 매장 규모도 서너배 크게 시작했지요. 비슷한 업종의 매장들 때문에 아이템 선정에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쇼핑몰이 아닌 한남체인 마켓에 첫번째 매장을 얻었던 것이 행운이었지요. “
팔래스뷰티 한남체인점은 조사장이 나드리 화장품 미주총판을 시작한 지 6년만인 94년에 열었다. 단일 매장에서만 연간 300여만 달러씩 매출을 올릴 만큼 조사장의 미용비즈니스에 젖줄이 되고 있다. 주차여건 좋고, 사람 왕래가 많은 로케이션의 장점도 크겠지만 ‘고객지향적인 영업’이 아니었다면 팔래스뷰티의 이름값은 지금만큼 되지 않을 거라고 조사장은 단언한다.
“손님이 찾는 물건이 뭔가를 최우선적으로 챙겼지요. 없으면 다음에 찾아왔을 때 반드시 가져갈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그거야 판매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아닌가.새삼스럽다.
“그런데요, 미용재료나 화장품은 워낙 트렌드가 빠르잖습니까. 여간 품을 팔지 않으면 일일이 충당해가기가 쉽지 않거든요.”
‘팔래스뷰티에 가면 살 수 있다’는 인식이 퍼지다 보니 조사장이 지켜온 가장 기본적인 판매의 원칙은 사실 가장 무서운 경쟁력이 돼버렸다.
LA와 오렌지카운티 일원에만 팔래스뷰티 계열 매장이 10개까지 불어났다. 전체적으로 연간매출 1천만 달러까지 이르기도 했다. 매뉴팩처도 아닌 리테일 비즈니스임을 감안하면 로컬 비즈니스계에선 가히 신화적이라 할 만하다.
미용재료상을 겸하다보니 헤어살롱쪽에 자연 관심이 쏠렸다. 미용기술을 직접 배우려고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한인이 운영하는 미용교육기관이 없어서 재교육이라든가 라이센스를 딸 기회 자체가 안되더군요. 한국인들이 손 재주가 좋으니 이민와서 자여업으로 출발하기에 참 적합한 업종인데…학교를 운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그래서 생긴거지요.”
미국 주류사회에는 ‘Fantastic Sam’ ‘Super Cut’ ‘Great Clips’같은 프랜차이즈화된 유명 미용실이 있다. 코리아타운에만 한인이 꾸려가는 미용실이 300여개가 넘지만 타인종 시장으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팔래스뷰티 미용대학은 한인 미용업의 주류시장 진출을 염두에 두고 개설한 학교다.
승인절차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연방정부의 학자금 무상지원 프로그램을 얻어내 바야흐로 미용사관학교로서 나무랄 데 없는 시설과 여건을 갖췄다. 지난 3년 동안 300여명을 배출했다. 100여명의 학생 가운데 7할이 한국인들이지만 모든 강의를 영어로 실시하는 까닭은 주류사회 진출에 대비하라는 조사장,아니 조학장의 원칙론 때문이다. 학교운영의 중요성과 보람이 커지자 화장품 매장 7개를 정리해버렸다. 지난해 9월에는 가든그로브지역에서 16년 역사를 가진 롤라뷰티칼리지를 인수, 교육에 무게중심을 옮겨놓고 있다. 연간 매출이 금액으로만 따질 때 60%나 줄었지만 “학교운영에 집중할 수 있으니 좋다”는 조사장에게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소중하게 여기는 면모가 드러난다.
■ 꿈은 또
미용백화점이랄까. 헤어살롱,용품매장,스킨케어,학원 등 미용 관련 비즈니스를 한자리에 모은 종합뷰티센터 설립은 조사장의 꿈이다.
원스탑 미용 시스템을 갖추기 위한 경험과 기반이 충분하기에 머지 않은 장래에 번듯하게 실현하려 한다. 크고 작은 미용 관련 컨벤션과 세미나, 미팅 등에 빠짐없이 다니다보니 누구에게나 “미용산업의 전망은 매우 밝다”고 장담한다. 아름다워지려는 마음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영원할 테니 맞는 말이다.
■ 그가 말하는 성공요건
전문성과 근면 그리고 운을 꼽았다. 미용업에 대한 분명한 노하우는 사업주의 필수 덕목이라고 강조한다. 남보다 더 일해야 하고, 그런 성실과 노력이 운과 만났을 때 성공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 자신은 “아직 성공한 게 아니다”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 조병덕 사장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휘문고를 거쳐 홍익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80년 초 ‘쥬단학’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화장품에 입사,1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다.
이때 화장품 업계 사람들을 조금 알아 둔 게 지금의 미용업쪽으로 깊숙하게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됐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접고 81년 미국으로 유학, 아칸소대(Univ. of Arkansas)에서 MBA를 마쳤다. 학업을 끝낸 83년 그해 신디 조씨와 중매로 결혼한 뒤 LA 다운타운의 이른바 ‘자바시장’내 스웨터상에서 영업사원으로 로컬 비즈니스 경력을 출발했다.
85년에는 라하브라에서 직접 옷 가게를 운영하기도 했고, 88년에는 다시 LA다운타운으로 돌아가 생선 도매상 매니저로 일하는 등 현장 비즈니스에서 비교적 여러가지 경험을 한 편이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88년 당시 한국으로 외제화장품이 직접 수입되지 않을 때 미국에서 보따리장사격으로 화장품을 들여가 판로를 찾던 중 나드리 화장품측으로부터 미주 총판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고 본격적으로 화장품 판매업에 팔을 걷어부쳤다.
나드리 미주 총판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아예 미용재료 판매업으로 확대, 94년 올림픽가에 있는 한남체인 마켓 한켠 세탁소 자리를 얻어 지금의 팔래스뷰티 리테일매장을 시작했다. 부인 신디 조씨도 3년여 운영하던 옥스포드 팔래스 호텔내 기프트샵을 처분하고 이때부터 미용및 화장용품 판매에 전념하게 된다. | 황덕준 / 미주판 대표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