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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백점짜리 남편이 빵점을 받기까지 두 계절이면 충분했습니다. 그 사이 달라진 것은 한가지 입니다. 옛 이웃이 이사를 가고, 새 이웃이 이사를 왔습니다.
남편의 수난시대는 신혼부부가 이사오면서 시작됐습니다. 지난 가을까지만 해도 같은 아파트에는 세살 다솔이의 동갑내기 친구인 준수와 민철이가 살았습니다. 엄마들의 나이도 비슷해서 우린 금세 친구가 됐습니다.
육아에 지친 엄마들은 소소히 나누는 ‘아줌마 수다’로 생활의 활기를 얻었습니다. 많은 순간 ‘수다의 밥상’엔 아이들의 아빠인 남편이 올랐습니다. 하지만 저희 남편은 열외였습니다.
“다솔이네 아빠는 너무도 자상하다”는게 이유였습니다.
‘쓰레기를 좀 버려줬으면 좋겠다’ ‘설거지를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 불만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저녁시간 엄마들이 준수나 민철이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가면 다솔이는 항상 아빠와 놀고 있다는 겁니다. 육아에 관심이 많아서 책도 읽고, 알아서 도와주니 얼마나 좋냐고 합니다. 그게 간섭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고 말해도 소용 없습니다. 그럼 하나도 안 도와주는 게 더 좋을 것 같냐는 질문엔 솔직히 ‘그렇다’고 답할 순 없으니까요.
‘자상한 아빠’인 남편은 보너스 점수를 얻으며 ‘자상한 남편’의 입지까지 굳혔습니다. 그때 우리 ‘엄마’들에겐 남편이 집안 일을 얼마만큼 도와주는 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 그리고 함께 놀아주며 육아에 동참해주는 그런 남편이 절실할 뿐이었습니다.
‘아스파라거스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그랬습니다. 저희 아랫집에 신혼 부부가 이사를 왔습니다. 이사를 도와주고 새댁과 같이 장을 봤습니다. 고마움의 인사로 스테이크를 구워 저희 집에 가져왔습니다.
“어? 아까 같이 장 볼 때, 아스파라거스는 안 샀던 것 같은데…”
못보던 재료로 사이드 디시를 준비했기에 제가 물었습니다.
“아 네, 제가 먹고 싶다고 해서 남편이 다시 가서 사 왔어요.” “남편이 마켓에 다시 가셨다고요? 그것도 하루종일 이사한 날 저녁에요? 메인도 아닌 사이드를 위해서?”
놀라움 반, 부러움 반이었습니다. 치열한 육아의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느라 진정으로 ‘자상한 남편’이 어떤 남편인지 잊고 있었나 봅니다. 백점짜리 남편은 아이만 잘 보는 남편은 아닐텐데 말이죠. 아내가 아스파라거스가 먹고 싶다면 하루종일 이사를 했어도, 짐을 나르느라 온몸이 뻐근할지라도 기꺼이 아스파라거스를 사다 주는 그런 남편인거죠. 한 겨울에도 새빨간 딸기를 구해다 주는, 밤 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주는 그런 남편 말입니다.
이후 ‘아스파라거스 사건’은 동네 남편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가 됐습니다. 다솔이 아빠 포함, ‘아빠 3인방’은 신혼인 새 신랑을 불러 앉혔습니다. 처음엔 “왜 그러셨냐?”고 곱게 묻더니 “안 사오면 아내가 내쫓냐?” “때리냐?”고 취조하고, 결국엔 “좀 더 편하게 사는 세상이 있다”며 교육에 들어갔습니다. 밤 하늘의 별은 따다 주는 게 아니라 그냥 보는 거라고 가르치라더군요.
하지만 새 신랑은 꿋꿋이 새댁을 도와 설겆이를 했고, 빨래를 했고, 청소를 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놀러 갔던 날에도 부엌에서 과일을 썰고 있었습니다. 남자도 과일을 깎을 수 있다는 것, 저는 그날 태어나서 처음 알았습니다. 물론 이 불평은 우리 아버지에게 먼저 해야겠지만요.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서 ‘아빠 3인방’은 해체됐습니다. 준수와 민철이네가 이사를 갔거든요. 그리고 얼마전 새로운 한인 이웃이 또 이사를 왔습니다. 이번에도 신혼부부 입니다.
같이 밥을 먹을 때마다 남편의 가사부담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대부분 설거지, 청소, 빨래는 남편 몫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로 ‘합의’를 봤다는 말에 저희 남편 “합의요? 그냥 안하셔도 되는데…. 더 편한 세상이 있는데…”라고 살짝 한마디 했습니다. 새 신랑, 지지 않았습니다.
“임신한 몸으로 힘들잖아요. 밥 해주는 것도 고마운데 설거지는 도와줘야죠.”
전세역전입니다. ‘자상한 아빠=자상한 남편’이라는 등호를 성립시키며 큰소리 치던 남편의 목소리가 힘을 잃어 갑니다. 더 편한 세상은 저에게 열렸습니다. 동네 새색시들이 우리 남편을 만날 때마다 물어줍니다. “설거지는 하셨어요?” “쓰레기는 버려 주셨어요?”
며칠 전엔 남편이 뜬금없이 파스타를 만들어 주겠다며 두 손 가득 장을 봐왔습니다. 앞치마 두르고 손수 요리를 했습니다. 다솔이 생긴 이후 처음보는 장면입니다. 설거지까지 친히 끝내셨습니다. 아침엔 쓰레기통도 깨끗이 버려져 있더군요.
남편은 종종 준수 아빠와 민철이 아빠가 보고 싶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시절이 그리운가 봅니다. 저도 준수 엄마와 민철이 엄마가 보고 싶습니다. 진정한 아줌마들과 나누는 ‘아줌마 수다’가 그립기도 하지만 내심 우리 남편을 최고라고 말해주던 그 칭찬이 더 듣고 싶은 것 같습니다.dhkimla@gmail.com //
*김동희씨는 한국과 LA,뉴욕에서 15년간 신문기자로 일했다.현재 뉴저지 프린스턴에 거주하며 취재현장만큼 치열한 육아현장에서 프리랜서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