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악역이 사건을 해결하는 도구라는 의미였다면, 이제는 악역 자체가 큰 포스를 지니고 어필한다. 이른바 ‘막장악역’의 출현이다. ‘피고인’에서 엄기준이 연기한 냉혹한 악역 차민호와 모태구가 여기에 속한다.
“기본적으로 대립되는 선악구도인데, 악역이 약하면 싱겁게 끝나게 되니 악역의 포스와 내공이 엄청나게 됐다. 오히려 선(善)이 언더독(게임·시합 등에서 승산이 적은 사람)이 된다. 그래야 험난한 극복과정이 생긴다. 그러려면 악역도 사람들을 홀릴 수 밖에 없는 힘과 매력, 마성 같은 게 필요하다.”
김재욱은 모태구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 모태구에 대해 탐구할 시간이 많았고, 여러 방향에서 접근했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에서 하버드 MBA 출신으로 최고급으로 치장하고 다니면서 살인을 즐기는 크리스찬 베일과 비슷한 결이 있다. ‘사이코패스 살인자’와 숨어사는 상류층 자제라는 점이 중요한 양 축이었다.”
김재욱은 주위에서도 모태구 캐릭터를 끌어들였다. 학창시절 계급적으로 친구들 위에 있다고 느끼는 부류, 사회에 나가서도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김재욱은 그런 사람의 애티튜드를 연구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인 것을 못느끼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데, 모태구는 그런 단계에 가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모태구의 비주얼도 ‘모태구 포스’를 뽑아내는 중요한 요인이다.
“머리를 뽀마드로 올리고,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슈트를 입는다. 정돈된 상류층 모습속에서 서늘함이 공존한다. 클래식함이 있다. 이게 모태구 포스다. 감독과도 상의를 했다.”
김재욱은 모태구가 이 정도의 나쁜 캐릭터인줄 알았냐고 묻자 “모태구도 중요하지만 내가 ‘보이스’를 선택하게 된 힘은 1~4부까지의 힘이다. 대본을 읽었을 때 손에 땀이 나고 뒤가 궁금했다. 이런 좋은 작품에 함께 하고픈 생각이 더 컸다”고 말했다.
김재욱은 모태구가 나오는 분량이 매회 5신(scene) 정도밖에 되지 않아 모태구를 흘려보내지 않고 매번 집중해 꽉꽉 담아야 했다. 그는 “모태구로 살았다는 건 오버인 것 같고, 촬영 사이에도 모태구라는 끈을 가지고 갔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면서 “집안에서 모태구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내기는 했다”고 했다.
김재욱은 모태구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되고, 감독 등 스태프의 노고가 컸다고 했다.
“제 연기만이 아니다. 흔들리는 눈과 손 동작을 카메라의 앵글과 조명, 분장을 통해 만들어 주신 거다. 모태구가 등장할 때 나오는 음악의 힘도 컸다. 이렇게 모태구 캐릭터가 나오게 됐다.”
모태구는 정신병원에서 더 센 악인에 의해 죽는다. 이를 김재욱은 “바람직한 결말”이라면서 “끊임 없는 악의 순환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최후인 15~16회를 찍기 위해 일주일동안 모든 걸 쏟아부었다.
“저(모태구)는 죽었지만 ‘보이스’가 시즌제가 됐으면 한다. 스릴러의 공포와 긴장감을 잘 살려낸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김재욱에게는 부잣집 아들이라는 시선이 있다. 사람들이 이 얼굴을 보고 가난할 거라고는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는 “동네가 강남이었을 뿐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김재욱은 캐릭터가 확실히 잡힌다. ‘커피프린스 1호점’이 끝나자 ‘마성의 게이’라는 독보적 캐릭터를 구축했다. 그래서인지 작품 수가 많지 않다.
“다작 욕심은 없다. 그래서 가난하다.(웃음) 외적인 필요에 의해 작품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다. 돈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무리해서 필모그라피를 늘려가는 것 보다, 내가 준비되고, 소신과 신념을 지킬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
멋있다. 김재욱이 계속 이 모습을 유지하길 바란다.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를 졸업한 김재욱은 동기들과 결성해 ‘서울마녀’등을 발표한 4인조 밴드 ‘월러스’에서 보컬과 기타를 담당하는 뮤지션이고, 패션 모델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배우를 하면서 모델은 근 10년간 공백기라고 했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