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굴욕을 참아야 지켜낼 수 있었던 나라의 비극…”

-내달 3일 개봉 ‘남한산성’서 최명길役
김윤식이 맡은 척화파 김상헌과 격론
-마음은 같은데 다른 얘기를 하는 상황
380년전 병자호란 시기나 지금이나 비슷
“상상력 가미 없이 내 느낌으로만 연기”

10월 3일 개봉하는 영화 ‘남한산성’의 시대적 배경은 병자호란이다.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침입해 새로운 군신관계를 요구한다.

청 대군이 공격해오자 몸을 피해 들어간 남한산성에서 고립된 인조는 조정이 청과의 화친을 통해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와 청과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로 나눠지자 선택의 고민에 빠진다. 70만 부의 판매고를 올린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여기서 이병헌은 주화파인 이조판서 최명길을 맡았고, 청의 치욕스런 공격에 끝까지 맞서싸우자는 예조판서 김상헌은 김윤석이 연기한다. 영화의 압권은 임금을 사이에 두고 두 신하가 벌이는 100분토론 같은 격론을 벌일 때다. 관객은 원테이크로 촬영된 격론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두 신하의 논쟁은 누가 맞고 틀리다는 수준을 넘어 신념과 철학의 대립으로 느껴지고, 말이 부딪칠 때의 멋과 치열함, 울림이 있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다”(최명길)

“한 나라의 군왕이 오랑캐에 맞서 떳떳한 죽음을 맞을지언정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적인 삶을 구걸하려 하는가”(김상헌)

인조(박해일)가 두 입장중 어떤 걸 선택하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갈린다. 백성이 사느냐, 죽느냐도 결정된다. 이병헌은 “이번 영화에서 전투신도 있지만 칼보다 더 날카롭게 힘이 있었던 게 두사람의 대사였다”면서 “최명길은 많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데, 소신있게 외로운 싸움을 한 거다. 어떤 시점에 태어나 어떤 시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역적이 되거나 영웅이 된다”고 말했다.

황동혁 감독이 “380년전 역사와 현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 점에서 이 영화는 현재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렇다면 이병헌은 주화파와 척화파의 입장중 누구를 더 지지할까?

“시나리오를 다 읽고나서도 누가 옳다 그르다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50 대 50으로 각자 설득력과 논리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더 슬펐다. 마음은 같은데, 다른 얘기를 하고 있지 않나? 비극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백성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라는 최명길의 대사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양쪽 입장중 하나를 선택할 수는 없어도 0.0001%라도 최명길에게 조금 더 마음이 간 것 같다.”

이병헌은 “최명길이 임금에게 ‘환궁하더라도 김상헌을 버리면 안된다. 그분은 충신이다’고 말한다”면서 “그렇게 중차대한 상황에서 싸우고 있는 상대를 그렇게 평가했다면 대단한 객관성과 엄밀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자신이 맡은 최명길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최명길이 임금이 청나라 칸에게 치욕적인 3배9고두를 하는 삼전도 굴욕 장면에서는 오열한다. 그전 왕에게 신하복을 입고, 어디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된다는 적장의 요구수칙을 읽을 때도 참담한 심정이 잘 전달된다”고 했다. 그래서 인조도 두 입장중 하나를 선택하지만, 결정과정에서 양쪽 입장에 귀 기울인다. 의견이 달라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최명길을 연기 하면서 개인적으로 느낀 점은 나라를 운영해나가는 사람들이 욕도 많이 먹지만 힘들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것이다. 만약 나라면 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겠다. 내 판단 하나로 수백만 명의 삶이 결정되고, 나라 전체의 생사를 구분짓는 결정이라면 나의 생각이 있다고 해도 제대로 말을 못하겠다. 내 삶을 걸고 하는 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삶을 걸고 하는 거니까.”

이병헌은 아무래도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 더 방점을 찍는 것 같았다. 그래서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 논리를 설파한 최명길이 적역이다. “김상헌 역이 아니고 최명길 역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최명길 역이 좋았다.”

하지만 이병헌이 ‘광해, 왕이 된 남자’ 등 사극 출연이 처음이 아님에도 ‘남한산성’에서의 연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했다.

‘어느 작품보다 진지하게 임했고 대사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있었던 역사라 왜곡시켜도 안된다. 나만의 상상을 가미하지도 않았다. 어려운 점은 감독과 상의를 했지만, 별로 기댈 곳이 없어 온전히 내 느낌으로 판단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조선 백성들과 장병이 있는 남한산성을 향해 포를 쏘는 청나라 칸에게 “제발 멈춰주시오. 백성은 아무 죄가 없습니다”를 가장 기억나는 대사로 꼽았다. 격서 운반의 중책을 맡은 대장장이 서날새를 연기한 고수의 “나 왕때문에 하는 것 아닙니다”라는 대사도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고수는 민초들의 삶의 실제적인 부분을 얘기했다. 나와 내 가족을 살린다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이병헌은 배우들의 역할 배분이 잘돼 어느 누구 하나 튀지 않고 조화를 이룬 것을 황동혁 감독의 공으로 돌렸다. 황 감독을 “정확하고 예리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병헌은 ‘광해’ ‘내부자들’처럼 흥행영화뿐만 아니라 ‘싱글라이더’ 같은 다양성 영화에도 출연한다. 9년 만에 드라마인 김은숙 작가의 차기작 ‘미스터 션샤인’에도 출연한다

“주변 사람들의 얘기나 전략에 따라 영화를 선택하는 것 아니다. 내가 신나게 봤느냐, 마음속의 울림으로 결정한다. 앞으로도 다양한 관점을 지니고 있고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해보고 싶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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