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희의 커피 이야기] 비오는 날엔 모카포트로 추출한 커피

며칠째 비가 내렸다. 이곳 LA에서는 비 오는 날이 소중하다.

타닥타닥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은 한가하니 소파에 비스듬히 누이지만 몸은 어느새 밀가루에 김치를 송송 썰어 파전을 대신할 김치전을 부치고 먹다 남은 막걸리를 기대하며 냉장고를 뒤진다. 꼭 김치전이 아니어도 좋고 막걸리가 없어도 좋다. 빗소리에 어울리는 어떤 음식이든 좋다. 빗소리는 항상 그렇게 나를 한가로운 어떤 시간으로 안내한다.

좋은 사람들이 같이 있다면 더더욱 좋다. 아무렇게나 서로의 몸을 던져놓고 아무 소리나 지껄여도 빗소리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 게다가 잠시 비라도 그쳐 밖으로 나가면 구름 사이로 잠시 떨어지는 볕뉘를 만나고 물기를 잔뜩 머금은 파란 바람이 불기라도 한다면 바로 그때 순간과 영원이 교차하는 천국의 경계에 선 듯한 경험하기도 한다.

rainy coffee-malee

Photo / malee

비 오는 날이면 유독 맛이 깊어지는 것들이 있다. 앞에 말한 막걸리에 파전뿐 아니라 비 오는 날이면 더 깊어지는 담배맛이 그렇고 커피 향이 그렇다.

담배는 진즉에 사정이 있어 끊었고 그나마 마시던 커피도 몇 달 전 요단강에 한 발 담그고 나왔더니 하루 한잔으로 그 양을 줄여놔서 맘대로 즐기지도 못한다. 그나마 그 한잔도 이런저런 샘플 커피 맛을 테이스팅 하는 것에 항상 투자해야 하니 실제로는 ‘진짜 나’를 위해 마시는 커피는 거의 없다.

그렇게 커피도 맘껏 즐길 수 없어 마구 삐뚤어지고 싶은 마음에 젖어드는 비 오는 날이 계속되는 와중에 타닥타닥 듣기 좋던 빗소리마저도 그다지 반갑지가 않아졌다. 이유인즉슨 커피 주문은 들어오는데 커피를 볶을 수가 없어서다. 비 오는 날은 불의 세기 조절이 잘 안 된다. 커피콩에 열이 쉽게 흡수되지 않고 열을 높이면 전체 볶는 시간이 줄어들어 커피의 겉과 속이 다르게 익어버리기 일쑤기 때문이다.

“빗소리 좋다”를 연발하던 입에서 며칠째 “비야 그쳐라”만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는 내가 참 웃긴다.

그래. 인생 뭐 있나?. 커피 오늘 못 볶으면 내일 볶고 이번 주 못 볶으면 다음 주에 볶으면 되지.

다음 주면 다시 비가 온다고 한다. 빗소리가 타닥타닥 들리는 날에는 모카포트로 추출한 커피를 추천하고 싶다. 커피는 상관없다. 빗소리가 경쾌하게 들린다면 상큼한 놈으로 비가 주는 우울을 더 깊이 즐기고 싶다면 묵직한 놈으로 고르면 된다.

비 오는 날, 축축한 공기 가운데 퍼지는 모카포트에서 추출된 농축된 커피의 맛과 향이, 그리고 추출이 시작되면 흘러나오는 취~익 취~익 소리가 타닥타닥 빗소리와 어우러지면서 내는 그 맛있는 소리가 그리고 그 흠없이 빛나는 은색 포트로 흘러나오는 에스프레소의 우아한 갈색 무늬가 우리의 눈과 귀와 코와 입을 지금껏 경험치 못한 다른 수준의 만족감으로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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