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국가를 구성하는 계층을 지배자, 군인, 생산자로 나눴다. 세 계층이 각각 지혜, 용기, 절제의 덕으로 조화를 이루면 그 국가나 사회는 정의롭게 된다고 플라톤은 주장한다. 이 때 조화란 용기와 절제가 이성(지혜)에 의해 통제받는 상태다. 정치가 권력기관의 남용이나 생산자의 탐욕에 휘둘린다면 국가의 조화는 이뤄지기 어렵다. 재정도 국가의 중요한 행위다. 재정 정책이 지혜롭게 펼쳐지지 못하고 특정 계층의 이해에 종속되거나 포퓰리즘에 흔들린다면 나라 살림도 위태로워질 수 있다.
요즘 채권 시장이 난리다. 중앙은행들이 기준금리를 내리기 시작했는데 장기채권 가격은 오히려 급락하고 있다. 9월까지 하락세이던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장기채권(10년 만기) 금리는 10월 급 반등했다. 미국은 트럼프 후보와 공화당이 11월 대선과 상하원 선거에서 모두 이기면 감세정책이 강화돼 이미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재정적자가 더 심화될 것이란 우려 탓이다. 역시 나라 빚 많은 유럽이 경기부양 등을 위한 재정지출 필요성이 커진 것도 국채의 리스크 프리미엄이 높아진 이유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오랜 기간 유지된 초저금리, 그리고 뒤이은 인플레이션으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을 읽는 게 금융시장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했었다. 지금은 어떨까?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조이기도 풀기도 애매하다. 자칫 경기가 나빠지거나 인플레이션이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중앙은행이 금융시장에 큰 변동성을 만들기 어렵다는 뜻이다. 채권시장은 주식 시장보다 규모가 더 크다. 가장 비중이 큰 게 국채다. 국채 금리는 다른 금리 상품의 기준이 된다. 기준금리는 연방준비제도(Fed)가 정하지만, 국채 금리는 재정 건전성, 발행 규모(수급) 등에 따라 시장에서 정해진다. 디스인플레이션(disinflation) 국면에서는 재정의 중요성이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 재정 3개 블랙홀…저출산고령화, 국방비 부담, 친환경 전환
정부 재정이 필요한 곳은 날로 늘어나고 있다. 저출산고령화는 전 지구적 과제다. 세수는 줄고 (노인) 복지 비용만 늘어나면 재정에 엄청난 부담이다. 미-중 갈등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불안 등으로 각국의 국방비 부담이 커지고 있다. 친환경 전환 비용도 어마어마하다. 기반 시설을 새로 구축하고 기술 개발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민간에 앞서 공공에서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경제에서 정부의 재정정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졌다는 뜻이다. 특히 앞서 언급한 새로운 장기 재정 수요들은 효과적인 정책과 어우러져야 민간의 적극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 중국처럼 경제가 어려워진 곳에서도 위기 극복을 위해 재정의 역할은 중요하다.
재정 정책을 잘 파악해야 그 나라 경제의 흐름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시대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생산적인 곳에 쓰여야 하고 지속 가능한 세원(稅源)으로 연결돼야 한다. 연구개발이나 신산업 기반 구축 등이 좋은 사례다. 재정이 닦은 길로 민간 자본이 유입된다면 성공이다. 증시는 중요한 매개다. 자본시장 발전의 필요조건은 합리적 지배구조다. 지배구조가 합리적이어야 시장이 제대로 작동한다.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야 생산이 활발해져 정부 세수로 이어진다. 재정이 잘 못 쓰이면 빚만 늘어난다. 재정 파탄의 사례는 많다.
▶ ‘키다리 아저씨’ 중앙은행의 변심…빚으로 지탱한 성장
정부도 돈이 필요한 곳은 많은데 마련할 곳이 마땅치 않은 게 문제다. 초 저금리시대에는 정부가 발행하는 채권을 중앙은행들이 사줬다. 중앙은행이 시중에 돈을 푸는 양적완화다. 쉽고 싸게 돈을 빌리게 되면서 전세계적으로 부채가 급증했다. 2022년 이후 물가와의 전쟁으로 중앙은행의 정부 채권 매입도 멈췄다. 이자율이 높아지면서 부담은 커졌는데 국채를 사주던 든든한 수요자는 사라진 셈이다.
유럽은 인구 고령화와 산업 노후화에 동시에 직면하면서 성장 엔진이 급랭했다. 미-중 갈등으로 주요 시장이던 중국이 경쟁자로 돌변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값 싼 러시아 산 천연가스를 사기도 어렵게 됐다. 주요국 모두 안보위협에 노출되며 이젠 예산지출을 늘려서라도 대치해야 하는 적대국이 됐다. 성장동력이 약해지면서 친환경 경제체제로 전환하는 비용도 충당하기 어려워졌다. 미국과의 경제 격차도 크게 벌어졌다. 2002년 유럽연합(EU) 15개국의 구매력평가기준 국내총생산(GDP)은 미국보다 4%포인트 정도 많았다. 지난해 말에는 미국이 EU 27개국보다 12%포인트 더 많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료를 보면 1995년 이후 2023년까지 근로자 1시간당 GDP 상승률은 미국이 56%, EU가 40%다. 더딘 성장에 세수까지 부족해지며 재정건전성은 유럽의 숙제가 됐다.
▶ 글로벌 재정전쟁…증세도 불사
최근 프랑스와 영국이 증세 방안을 내놨다. 더 걷지 않으면 씀씀이를 감당할 수 없음을 인정한 셈이다. 증세는 정치에 치명적이다. 이 때문인지 영국과 프랑스 모두 최근 총선에서 새롭게 다수당이 된 세력들이 증세를 주도하고 있다. 근로소득 보다 자본소득으로 돈을 많이 번 기업과 부유층에게 세금을 더 걷으려는 시도다. 근로소득으로는 자본소득을 앞서기 어렵다. 경제 양극화가 심해지는 이유다.
재정의 효율적 투입이 중요하다. 저출산고령화 극복과 양극화 해소, 산업구조 개편과 국방재원 확보 등의 과제 해결은 국가 경쟁력과 직결된다. 국가가 이 같은 과제들을 외면한다면 세금을 걷는 이유가 모호해진다. 재정건전성이 높은 게 자랑만도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를 보면 저소득 개발도상국의 정부 총 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53.5%다. 중소득신흥국은 70.8%, 선진국은 109.4%다. 정부 수입과 지출은 선진국 35%, 40% 중소득신흥국 27%, 32.6%, 저소득개도국 15.4%, 19.1%다. 우리나라 정부 재정은 부채 비율(53%)이 낮지만 수입(22.1%)과 지출(22.6%)도 적다. 재정의 역할 수준이 선진국 보다 신흥국에 가깝다는 뜻이다. 2023~2050년 우리나라의 연금지출의 예정액은 GDP 대비 47.7% 늘어날 전망이다. 주요 선진국 중 최고이고, 선진국 평균(16.2%)의 3배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 정부를 위한 재정, 국민을 위한 재정
국제통화기금(IMF)은 2024년 말 전세계 공공부채가 100조 달러를 돌파해 글로벌 GDP의 93%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빚의 적정 규모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지만 GDP 보다 작아야 한다는 게 일반적이다. 빚이 GDP와 비슷한데 성장률이 이자율만 못하면 빚을 줄여야 한다. GDP 보다 빚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면 빚을 더 내서라도 경기를 부양해 성장률을 높일 만하다. 우리나라는 정부 빚은 적지만 기업과 가계의 빚은 GDP와 맞먹는다. 정부 빚을 좀 늘리더라도 기업과 가계의 빚을 줄이는 게 성장에 유리할 수 있다.
윤석렬 대통령은 4일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독한 내년 예산안 국회 시정연설에서 “(지난 2년 반 동안) 시장경제와 건전재정 기조를 정착시키고…(중략)…규제를 혁파해서 국가의 성장동력을 되살렸다”고 밝혔다.
현 정부는 출범 이래 긴축 재정을 유지하고 있다. 세수 부족에도 적자 국채 발행은 피한다는 방침이다. 우리 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지난해 1.7%, 올해 2.4%, 내년 2.2%다. 글로벌 평균은 각각 3.3%, 3.2%, 3.2%다. 올해와 내년 전망은 하락할 확률이 커지고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국회 국정감사에서 “올해 성장률이 2.2∼2.3% 정도로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