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시대 포교의 시작…교단의 형성 ‘기원정사’와 첫 여성 출가 ‘바이살리’ [정용식의 사찰 기행]

(60) 인도 성지순례기 일곱 번째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 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인도 쉬라바스티 기원정사



인도 성지 순례에 대한 7번째 마지막 글이다. 부처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며 가르침을 체계화하고,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포교의 거점으로 삼았던 사위성의 ‘기원정사’는 부처 깨달음의 길이 마침내 불교 교단으로 승화된 곳이다. 이교도들의 저항과 대립으로 음해 등 온갖 어려움을 많이 겪은 곳이지만 불교 교단의 명성이 북인도 전역으로 뻗어나가며 교세를 확장했던 곳이기도 하다. 부처의 마지막 안거지로 알려진 바이살리에서는 여성 출가를 처음으로 받아들여 비구니 승단이 탄생했다. 이로써 소위 불교 교단을 이루는 네 부류인 사부대중(출가한 남녀 수행승과 재가의 남녀신도)이 완성됐다.

부처는 룸비니에서 태어나 출가 후 라즈기르에서 첫 탁발을 하고 부다가야로 내려가서 6년의 고행 후 깨달음을 얻고, 말년에는 쉬라바스티 기원정사에 정착했다. 그리고 79세 노구를 이끌고 라즈기르 영축산에 다시 갔다가 바이살리를 거쳐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들었다.

부처의 탄생지 네팔 룸비니에서 국경을 넘어 차로 4시간 정도 가다 보면 성지순례 마지막 여정지 쉬라바스티(사위성)에 도착한다. 쉬라바스티는 부처 시대엔 인도 16대국 중 마가다국(왕사성) 다음으로 강성한 나라였던 코살라국의 수도 사위성으로 불린다. 부처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사원인 기원정사가 있고 부처가 생애 최대의 신통력(기적)을 보인 ‘천불화현’의 성지이다.

쉬라바스티는 부처의 고향과 가깝고 위도가 동일하다고 한다.

사위성의 기원정사


기원정사


부처 시절 인도의 동쪽은 왕사성을 수도로 하는 마가다국과 서쪽은 사위성을 수도로 하는 코살라국이 양강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미 왕사성(죽림정사가 있는 라지기르)에서 백성들과 왕국으로부터 많은 지지세를 확보한 부처로선 포교의 확장을 위해선 다음 목표를 사위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사위성은 인도식 지명으론 ‘쉬라바스티’인데 보수적인 데다 이교도들이 득세하던 곳이었다. 상업을 통해 많은 돈을 축적했던 사위성의 재벌 수닷타 장자(長子, 큰 상인)가 사업과 관련해 왕사성의 처남 집에 들렀다가 부처를 만나 인연을 맺게 되고 깨달음을 얻어 한평생 재가신도가 됐다.

기원정사 내 승려들 모습


수닷타 장자는 절을 지어 부처에게 보시하고자 해 부처의 첫째 제자 사리불과 함께 사위성으로 가서 제타 왕자의 개인 숲이었던 유희원을 비싸게 사들여 ‘기원정사’를 지었다. 기원정사는 ‘기수급고독원정사’(왕자의 한자식 표기인 ‘기수’ + 수닷타의 별칭인 ‘급고독’의 결합)의 준말이며 낙성식 때 부처가 제자들과 함께 들어오게 돼 55세부터 78세까지 24년을 계속 머물며 18안거를 보냈다. ‘기원정사’는 많은 이교도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해 사위성의 랜드마크가 될 정도로 7층의 크고 화려한 건축물로 지었다. 지금은 부처가 머물렀던 곳, 법당, 승원, 사리불, 아난존자 등 제자들의 거처, 승탑, 사리탑, 우물터 등의 흔적(유적)들과 아난다 존자 보리수가 남아 있다.

기원정사 내 승려 모습


우리 순례단은 부처님이 머물렀다는 여래향실 주변에 둘러앉아 금강경 일부를 독송했다. 여래향실 앞에는 향을 피우고 기도할 수 있는 제단이 있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여러 날씩 머물며 기도하는 듯한 동남아 승려들도 보였다.

부처가 제자들에게 금강경을 설법한 장소인 기원정사 금강보좌


여래향실 동북쪽엔 부처가 기원정사에 머물 때 제자들에게 금강경을 설법했다고 하는 자리가 있다. 그곳에서 동남아 스님이 몇 사람 신도를 앞에 두고 염불에 열중이다.

지난해 11월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의 인도·네팔 불교 성지순례 중 인도 쉬라바스티 기원정사 금강보좌에서 정원주 중앙신도회장이 기도하는 모습.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제공]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순례단의 정원주 회장이 그곳에서 기도하는데 햇살 기운이 유독 그곳만을 비추고 있어 누군가 사진에 담았다.

부처와 제자 수보리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된 ‘금강경’은 우리에게 가장 널리 퍼진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이며 조계종의 근본 경전이다.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상호의존적이기에 자신과 세상에 대한 잘못된 집착을 벗어나라’는 것이 주 내용이다.

기원정사 내 아난다 보리수


대단한 규모의 기원정사를 한 바퀴 돌아보는데 각국의 스님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기도하고 있다. 아난다 보리수 근방엔 특별히 많은 사람이 붐볐다. 아난다 존자가 부다가야에 있는 금강좌 보리수 묘목을 가져와 심어 부처가 기원정사에 없을 때 부처를 뵙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버티다 보니 지금은 여러 기둥에 의지하고 있다. 아소카 대왕도 이곳을 찾아와 높이 21m 두 개의 석주와 탑, 승원을 지었다고 한다.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부처가 신통력을 발현한 천불화현 탑지


기원정사 인근 천불화현탑지


부처는 수행자가 재가자에게 신통력을 보이는 것을 금하였는데, 사위성이 자이나교와 이교도들의 사상이 팽배하자 이를 극복하고자 부처가 수많은 기적을 드러내 보인 곳이 ‘천불화현’이다. 기원정사에서 1㎞ 정도 지점 작은 언덕 위에 세 가지 신통력을 보인 자리에 세워진 탑과 유적을 ‘천불화현탑지’(千佛化現塔址)라고 한다.

천불화현탑지를 방문한 성지순례단 모습


유적지 벽돌 위에 석양이 드리우니 순례단은 벽돌 위를 걸으며 이를 배경으로 인생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이곳에서 신통력을 보이고 곧바로 천상 세계 도리천에 올라가 도리천에 천신으로 태어난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하고 상카시아로 하강했다고 한다. 8대 성지 중 하나인 ‘상카시아’를 가보지 못한 서운함을 조금이라도 달랬다.

기원정사 인근 수잣타 집터


기원정사와 가까운 거리에 재벌 수잣타 집터가 있다. 집터의 모양을 가늠하기 힘든 비슷한 벽돌 유적만을 남겨두고 있다.

수잣타 집터


아마도 ‘수잣타’ 집터에 그를 기리는 탑(수잣타 스투파)을 세웠던 유적인 듯 보인다. 유적지 벽돌 꼭대기까지 올라가 볼 수 있게 돼있다.

앙구리 말라 집터


그 인근에는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살인자가 됐다가 부처를 만나 불교에 귀의한 후에 죽음을 맞이한 ‘앙구리 말라’ 집터에 세워진 탑의 유적지가 있었지만 담장 밖에서 살펴보고만 떠났다.

여성 출가의 시작, 바이살리


바이살리 시내 모습


8대 성지 중 한 곳인 ‘바이살리’는 부처가 가장 사랑했던 도시라고 하는데 부처의 열반 여정이 시작된 곳이다. ‘라지기르’의 나란다 대학 유적지에서 4시간 정도 이동하면 바이살리가 나오고 이곳에는 원숭이 왕이 부처께 꿀을 봉양했다는 원숭이 연못과 열반할 것을 선포한 대림정사터가 있다.

바이살리 대림정사 내 아난존자 사리탑과 아소카 석주


대림정사터에는 아난존자의 사리탑과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존된 아소카 석주가 있다.

대림정사 내 아난존자 사리탑


이른 아침에 방문했는데 유별나게 안개가 자욱해 한 치 앞을 살펴보기 힘들어 높게 솟은 사리탑과 석주만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온다.

대림정사 내 아소카 석주


탑 옆에 온전하게 보존된 아소카 석주는 13m 정도 높이로 석주 정상에는 사자 한 마리가 북쪽을 향해 앉아 있다. 바이살리에서 부처는 마지막 안거를 보내면서 자신의 열반을 예고했고, 열반한 이후 사리는 여덟 개로 나눠졌다. 그중 하나를 이곳 바이살리에 모셨는데 지금은 근본사리탑 기단부만 남겨있다.

‘바이살리’는 시대를 앞서가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우선은 아난다 존자의 간청으로 견고한 계급사회 시대에 여성 출가를 허락해 비구니 승단이 최초로 출발한 곳이다. 또 바이살리는 상업이 발달하고 자유분방한 곳이다 보니 부처 사후에 비구들이 이전의 엄격한 규율들을 완화해 실시했다. 이에 따라 이를 반대한 보수파인 상좌부와 인정하는 진보파인 대중부로 분열하게 되는 곳이기도 했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는 문장으로 알려진 경전 ‘유마경’의 저자 유마거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유마경은 ‘개인의 해탈이 아닌 중생과 더불어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대승불교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고 ‘중생과 부처는 둘이 아니다’라는 불이(不二) 사상의 근원이었다.

대림정사 내 케사리아 대탑


부처는 이곳에서 생애의 마지막 안거를 하면서 ‘완전한 열반’에 들 것을 선포하고 쿠시나가라로 향했다. 부처가 쿠시나가라로 가는 열반 길을 흠모해 쫓아 따라온 리치비족과 마지막 헤어진 곳에 아소카 대왕이 큰 탑을 세웠다. 그 탑이 아직도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케사리아 대탑’이다. 높이 46m, 둘레 427m로 인도에서 가장 큰 탑 중 하나라고 알려진 만큼 반만 정돈돼 있고 반은 아예 산처럼 방치돼 있다. 탑이 아니라 그냥 동네 뒷산처럼 보이는 탑의 상단부는 파괴됐고 중간부에 많은 감실들이 있으나 그 안의 부처들도 파괴돼 온전히 보존된 것이 없다. 낮이 가까워지는데도 여전히 안개가 자욱해 산처럼 거대한 탑 주변을 한 바퀴 도는 데 무서움을 느낄 정도다.

반야트리 나무


탑 뒤편에 높이 20여m, 너비 30여m 이상 됨직한 엄청나게 큰 ‘반야트리’ 나무가 안개 속에 모습을 드러내니 그 속에서 나무 신이 곧 튀어나올 성싶다.

달마대사가 동쪽으로 간 이유는?


쉬라바스티 기원정사


인도에는 8대 성지 외에도 불교 건축예술이 총망라된 석굴과 대탑 등 불교 유적들이 많다.

성지순례 과정에서 접한 영축산의 자연동굴이나, 전정각산의 유영굴도 있지만, 총 30여개의 석굴이 모여 있는 ‘아잔타 석굴군’은 벽화와 부조장식, 조각 등 불교미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 등 세 종교의 석굴 34개가 2㎞에 걸쳐 조성된 ‘엘로라 석굴’을 포함해 인도에는 불교 석굴만도 900여개나 된다. 그리고 인도 전역에 탑 8만4000개와 사원 8만4000개를 세웠다는 아소카왕이 죽은 왕비를 기리기 위해 왕비의 고향에 세웠다는 ‘산치대탑’은 총 8기의 탑 중 3기가 남아있다. 각 탑문과 기둥들에 새겨진 대형 부조와 조각들은 인도 불교 조각의 백미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어 성지순례자들도 종종 찾는 곳이다.

인도 성지순례 글을 마치며 인도 승려 달마대사가 왜 동쪽(중국)으로 갔을까 새삼 궁금해진다. 중국으로 가서 양무제와 선문답 논쟁하며 선종(禪宗)을 창시한 달마대사는 하남성 소림사에서 면벽(面壁)수행했으며 선종의 6대조사 혜능대사는 광동성 광효사에서 머물렀다. 조계종의 원류(뿌리)를 간직한 중국의 사찰들이다. 인도 성지에서 조계종의 뿌리를 찾아 중국 선종성지로 갈 날도 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11월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의 인도·네팔 불교 성지순례 중 인도 4대 종교(불교·힌두교·자이나교·시크교) 대표자들이 정원주 중앙신도회장(오른쪽 네번째) 등 순례단을 환영하는 모습.


성지순례를 마치고 호텔에 들어오니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인도어와 한국어를 혼용해 게시돼 있고 인도 불교 지도자들이 반겨준다. 아니, 종교 간 화합을 위한 힌두교, 자이나교, 시크교까지 4대 종교 대표자들도 함께 있었다.

그렇게 인도의 밤은 깊어갔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민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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