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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흰색 교향곡 1번 : 하얀 소녀(일부 확대), 1863, 캔버스에 유채, 213×107.9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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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회색과 흰색의 배치 1번(화가의 어머니·일부 확대), 1871, 캔버스에 유채, 144.3×162.4cm, 오르세 미술관 |
어머니의 상징이 된 이 그림
작품 속 母子의 숨은 속사정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문화예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이 코너는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좋아요’와 댓글도 콘텐츠 제작과 확산에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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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Note in blue and opal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역시나 너는 아직 어린애구나.
나이 육십줄에 닿은 안나 맥닐 휘슬러가 막 서른이 된 화가 아들, 제임스 휘슬러를 보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1863년의 어느 날. 안나는 영국 런던에서 아들을 만났다.
이는 8년 만에 이뤄진 재회였다. 못 본 사이 아들은 머리카락을 더 길렀다. 수염 또한 돌돌 말려 올라갈 만큼 가꿨다. 옷도 제법 달라붙게 입고, 구두도 꽤 빳빳했다. 다만, 그저 그뿐이었다. 촘촘하게 박힌 주근깨는 그대로였다. 발을 질질 끄는 습관, 괜히 주위를 둘러보는 버릇도 어릴 적과 똑같았다. 그래서였다. 간만에 본 아들 앞에서 아버지 매무새를 흉내내는 꼬마가 떠오른 것은.
그간 미국 북동부 등지에서 산 안나는, 런던행 배를 탄 후부터 수백 번 곱씹은 말이 있었다.
아들이 거기서 어떻게 살고 있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이는 일종의 다짐이었다. 하지만 막상 마주해보니 내뱉고 싶은 말이 꼬리를 물었다. 한 번 하면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결국에는 해버리고 말았다. 첫인사 직후 “보고 싶었다”나 “어떻게 지내느냐”와 같은 안부가 아닌, “발을 아직도 보기 싫게 끌고 다니니?”라는 면박을 말이다.
왜 참지 못했을까. 아들을 사랑해서였다. 왜 타이르지 않고 질책했을까. 이 또한 아들을 사랑해서였다. 여전히 철부지 같은 휘슬러가 보다 빨리 어른스러웠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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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Valparaiso Harbor, 1866, 캔버스에 유채, 76.5×51.51cm,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
하지만, 꾸중을 들은 아들의 표정은 급격하게 굳었다.
묘하게 거슬리던 신발 끄는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이와 함께 둘 사이 대화도 끊겨버렸다.
안나는 이날부터 아들과 함께 살았다.
안나는 아들의 일상을 살펴봤다. 그녀는 녀석이 일정에 맞춰 살아가기를 원했다. 이는 본인이 육십 평생 살아간 방식이기도 했다. 화가인 만큼 대부분 시간에는 그림만 그리고, 종종 틈을 내 개인 약속을 소화하는 자세도 바랐다.
녀석이 보여주는 모습은 기대와는 달랐다. 아들은 자유분방했다. 허구한 날 예고 없이 새벽에 나가선 밤에 들어오는 데 익숙했다. 안나는 이를 보고도 최대한 말을 아끼려고 했다. 하지만, 어질러진 방 청소를 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그것. 빨간색의 긴 머리카락만큼은 정말 참기가 어려웠다. 결국은 또 말하고 말았다. “너는 지금도 그 볼품없는 여자를 만나고 다니느냐”라고.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넌 아직도… 참았던 감정이 휘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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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모자를 쓴 휘슬러의 초상화, 1858, 캔버스에 유채, 46.3×38.1cm, Freer Gallery of Art |
“발을 아직도 보기 싫게 끌고 다니니?”
휘슬러는 어머니의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본 어머니는 생각보다도 더 반가웠다. 그러나 이 타박을 듣는 순간, 마음은 마법에서 풀린 듯 착 가라앉았다. 아, 역시나 어머니는 그대로구나. 이런 문장이 턱끝에서 찰랑거렸다.
사실, 휘슬러는 미국에 살던 어머니가 이곳으로 온다고 했을 때부터 마음을 졸였다.
어머니는 자기 신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지성과 정직을 최고로 치는 독실한 종교인이었다. 다만, 휘슬러가 보기에 성실함의 정도는 때때로 과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서일까. 어머니는 타인에게도 엄했다. 그녀는 본인 기준에서 바르지 않은 행태가 벌어지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휘슬러는 때때로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그 자체로 속이 답답해졌다. 그와 그녀 사이에 미 대륙과 영국 섬만큼의 거리가 생겼을 때, 내심 안도할 수밖에 없던 이유였다.
…그런데, 어머니가 이곳을 찾는다? 그것도 함께 살기 위해?
“비상이야. 나는 집을 비워야 해. 지붕부터 지하실까지 청소해야 해.” 휘슬러는 어머니가 오기 직전 친구에게 이런 편지도 썼다. 휘슬러는 이 내용 그대로 했다. 최선을 다해 집을 깔끔하게 했다. “집이 이게 뭐니.” 문을 연 어머니의 혼잣말 같은 한마디에 김이 새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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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그의 작업실에 있는 휘슬러, 1865, 캔버스에 유채, 62.8×46.3cm |
휘슬러는 어머니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어머니도 완전히 변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는 게, 놀랍게도 당신 선에서는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휘슬러의 일상을 놓고 싫은 티를 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너는 여전히 삶을 그렇게 허비하니?” 따위 잔소리를 쏟아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이번에도 참지 못했다. 가슴 밑바닥에서 숙성한 듯한, 그래서 더 딱딱하게 굳어버린 말을 했다. 빨간색의 긴 머리카락 한 올을 쥔 채, “너는 지금도 그 볼품없는 여자를 만나고 다니느냐”라는 숨 막히는 꾸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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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Wapping, 1860~1864, 캔버스에 유채, 72×101.8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
…집을 비워야 해.
앞서 휘슬러가 친구에게 쓴 편지 속 글은 그저 잡동사니를 치워야 한다는 말로만 볼 수는 없었다. 사실, 이는 어머니가 오기 전 먼저 와있던 이를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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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쿠르베, 아름다운 아일랜드 소녀(조안나 히퍼넌), 1865~1866 |
그 사람의 이름은 조안나 히퍼넌.
아일랜드 출신인 그녀는 휘슬러의 아홉 살 연하 연인이었다. 직업은 전문 모델이었는데, 문제라면 그게 문제였다. 어머니는 그녀를 결코 며느릿감으로 인정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당시 사회는 직업 모델을 곱게 여기지 않았다.
고작해야 거리의 여인보다 조금 낫게 대할 정도였다. 어머니는 저 멀리 대륙에 있을 때부터 그녀와의 교제만큼은 기를 쓰고 반대했다. 지금껏 휘슬러는 이를 모른 척하며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모두 다 어머니가 ‘이곳’에 없었던 덕이었다.
볼품없는 여자…? 휘슬러는 이번만큼은 어머니의 꾸지람을 흘려듣지 못했다. “어머니. 이제 좀 포기하세요.” 히퍼넌 뿐 아닌, 내 삶에 관한 모든 것을. 휘슬러는 망연자실한 어머니 앞에서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껏 어떻게 컸는데, 어머니는 아직도…. 눌렀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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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맥닐 휘슬러 |
안나 맥닐 휘슬러는 1834년에 아들 휘슬러를 품에 안았다.
당시 남편 조지 워싱턴 휘슬러와 안나, 어린 휘슬러는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웰 등에서 살았다. 남편 조지의 직업은 철도 기술자였다. 가족은 가장의 일자리를 위해 거처를 몇 번 옮긴 적도 있었다. 그사이 가족은 쓰라린 불행도 마주해야 했다. 안나가 휘슬러에 이어 낳은 아들 중 둘이나 죽고 만 것이었다. 이는 특히나 안나에게 큰 상처였다. 누군가는 그녀가 훗날 휘슬러에게 집착 아닌 집착을 하는 이유를 여기서부터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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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어린 시절) [William Edward Kilburn/Harvard University Libraries] |
안나와 그의 가족은 1842년, 바다 건너 러시아 땅까지 밟았다.
이 또한 남편 조지가 끌어온 변화였다. 그가 모스크바 일대 교통 공사를 추진하는 러시아에 ‘스카우트’ 된 결과였다.
안나는 이쯤 아들에게 화구(畵具)를 안겼다.
열한 살 때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제국 예술 아카데미에 등록도 시켰다.
안나가 아들에게 그림을 권한 데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안나는 아들이 어릴 적부터 너무 예민한 면을 갖고 있다고 봤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에게 어쩌다 색연필을 쥐여줬다. 아이는 곧장 선을 휘휘 그었다. 처음에는 그러다 관둘 줄 알았다. 그런데, 녀석은 종이를 꽉 채울 때까지 그간 본 적 없는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예술을 권한 것이었다. 안나는 아들의 그림을 스코틀랜드 출신의 화가 윌리엄 앨런에게 보여줄 기회도 있었다. “위대한 예술가는 나에게 ‘당신의 아들은 천재성을 갖고 있어요. 하지만, 그를 너무 몰아세우지는 마세요’라고 말했다.” 안나가 그날 일기장에 쓴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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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회색과 녹색의 교향곡, 1866~1872 |
휘슬러 또한 그림을 진지하게 대했다.
그러나 휘슬러는 예술가의 꿈을 굳혀가고 있을 때, 뜻밖 급류에 휩쓸리고 만다. 아버지가 죽은 것이다. 사인은 콜레라였다.
그때부터 휘슬러의 삶은 요동쳤다.
일단 타지에 머물 이유가 없어진 만큼, 다시 이사부터 했다. 간 곳은 미국 코네티컷주 폼프렛이었다. 휘슬러는 이쯤부터 어머니가 본인의 삶에 도 넘는 참견을 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는 당신의 남편이 한순간 없어진 탓일 터였다. 당신의 아들이 하루빨리 건실하게 크고, 든든한 가장 역할에 나서길 바랐기 때문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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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해안 |
휘슬러는 그래도 여전히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림을 먼저 권했던 어머니가 더는 그 길을 바라지 않았다. 비교적 여유가 있던 그때는 맞지만, 하루하루 살아남기 바쁜 지금은 틀리다고 보는 듯했다.
휘슬러는 좋게 보면 어머니의 바람, 노골적으로 말하면 강요에 따라 목사 수업을 받았다. 휘슬러는 쏟아지는 종이 뭉치 속에서 고통만 받았다. 그는 끝내 배우기를 포기했다. “신망도 있고, 안정도 찾을 수 있는 직업인데 대체 왜….” 어머니의 핀잔은 애써 무시했다.
그런 휘슬러가 가야 한 곳은 미국 육군사관학교였다.
그도 군인에 대한 환상이 있기야 했지만, 이 또한 어머니의 강권이 가장 큰 영향을 줬다. 휘슬러는 이곳에서 3년가량을 공부했다. 하지만 성적은 겨우 낙제를 면할 정도였다. 휘슬러는 곧 군복도 벗었다.
제발 그만….
휘슬러는 거듭 ‘실용적인’ 직업을 권하는 어머니 앞에서 이 말을 억눌렀다. 휘슬러는 행동으로 보였다. 그는 1855년,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프랑스 파리 땅을 밟았다. 뜻하지 않게 서랍 속에 넣어둬야 했던 꿈, 화가로 예술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이는 모성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도망이라면 도망이기도 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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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흰색 교향곡 2번 : 흰색 옷을 입은 작은 소녀, 1864, 캔버스에 유채, 76.5×51.1cm, 테이트 브리튼 |
역시나 그때도 화가의 삶은 쉽지 않았다. 특히 그 시절은, 아카데미 화풍에 따르지 않는 예술가의 일상은 더욱 춥고 배고플 때였다.
휘슬러는 스스로 그 험난한 길에 올랐다. 휘슬러에게는 나름의 그림 철학이 있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그것이었다. 휘슬러는 역사 내지 신화적 교훈, 교과서적인 구성과 배치를 강조하는 당장의 화풍에 거부감을 느꼈다. 왜 예술은 예술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가. 왜 굳이 교육과 가르침을 위한 도구 내지 수단으로 삼는가. 이런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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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흰색 교향곡 1번 : 하얀 소녀, 1863, 캔버스에 유채, 213×107.9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
휘슬러가 그런 발상을 갖고 그린 대표작이 1863년에 선보인 <흰색 교향곡 1번 : 하얀 소녀>였다.
이는 그의 연인 히퍼넌을 그린 초상화였다. 그림은 분명 아름다웠다. 다만,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것으로 무게추가 기울었다. 엄밀히 따지면 화폭에는 색감과 형태만 있을 뿐이었다. 즉, 이 안에는 그 어떤 숭고한 이야기도 없었다. 당연히 훈계도, 설교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휘슬러의 이 그림은 런던 왕립 아카데미와 파리 살롱 등 두 곳에서 다 퇴짜를 맞았다. 이 작품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연 낙선전에 걸렸다. 오직 아름다움만 탐구한 결과가 그려졌다는 데서 꽤 눈길을 끌기는 했다. 다만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19세기 희대의 문제작 <풀밭 위의 점심 식사>도 하필(?) 그 시기에 등장했다. 휘슬러의 도발적 실험이 오롯이 주목받지 못한 데는 이 배경도 있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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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흰색 교향곡 3번, 1865~1867, 캔버스에 유채, 51.1×76.8cm, 바버 미술관 |
휘슬러는 1859년부터는 런던에 터를 잡고 작품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잠재력이 터질 듯 말 듯한 여정의 연속이었다. 물론, 과거 노(老)화가의 말처럼 ‘비범한 천재성’이 있었기에 이름값은 착실히 쌓여갔다. 그러던 그때 어머니가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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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회색과 흰색의 배치 1번(화가의 어머니·일부 확대), 1871, 캔버스에 유채, 144.3×162.4cm, 오르세 미술관 |
“그냥 나를 그려보는 건 어떠니?”
1871년의 어느 날. 안나가 아들에게 말했다. 아들은 씩씩대고만 있었다. 약속 시간에 오기로 한 모델은 작정하고 펑크를 내려는 듯 올 기미가 없었다. 아들은 이미 작업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 모든 게 헛수고가 될 판이었다. 그래서 보다 못해 제안한 것이었다. 차라리 나를 그려보라고(휘슬러가 먼저 모델을 권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면…. 거기에 서보세요.”
아들은 어깨를 으쓱하곤 이렇게 말했다. 안나는 아들 앞에 섰다. 그녀가 갖고 있는 가장 경건한 복장으로 몸을 두른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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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회색과 흰색의 배치 1번(화가의 어머니·일부 확대), 1871, 캔버스에 유채, 144.3×162.4cm, 오르세 미술관 |
아들과 이렇게까지 길게 마주 보고 있던 적이 있었는가.
안나는 자신을 그리는 아들을 틈틈이 봤다. 때때로는 눈도 마주쳤다. 얼마간은 어색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에게서 죽은 그이가 보였다. 그 형상은 곧 어린 아들의 얼굴로 바뀌었다. 처음 화구를 쥐여줬을 때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떠올렸다. 곧이어 남편이 죽은 후 나도 모르게 몰아칠수록 어두워지던 말투, 신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관둔 후 무력해진 자세, 그쯤부터 급격하게 냉랭해진 공기….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우리 둘 사이가 마냥 가깝지만은 않게 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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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회색 배열, 화가의 초상화, 1872, 캔버스에 유채, 74.9×53.cm, Detroit Institute of Arts |
안나는 아들을 새삼스럽게 다시 봤다.
아이의 쓸어넘긴 머리 틈으로 흰색 가닥이 보였다. 이마와 입가에는 잔주름이 희미하게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면, 녀석도 벌써 서른일곱 살이었다. 언제 이렇게 컸니. 안나는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그녀가 어린애 대하듯 토해낸 잔소리 앞에서 아들이 보인 마지못한 수긍, 반발, 그리고 체념. 안나의 코끝이 갑작스럽게 시큰해졌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해서였는데….
안나는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는 평생 겪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더는 선 채로 있기가 힘들었다. “아들아.” 안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관절염이 나를 짓누르는구나. 자세를 돌린 채 앉아 있어도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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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장미와 분홍, 어머니의 낮잠, 1875년경 |
“그러세요.”
휘슬러는 이 말과 함께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의자를 꺼내 온 뒤 그녀를 앉혔다. 휘슬러는 어머니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깡마른 몸, 튀어나온 핏줄, 촘촘한 주름살도 볼 수 있었다. 늘 강하고 꼿꼿한 당신이었지만, 그런 그녀 또한 벌써 일흔을 향해 가고 있었다.
휘슬러도 어머니를 이렇게나 오래 응시하는 건 처음이었다.
휘슬러는 아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어머니를 가슴 깊이 사랑하고, 미워했다. 그녀를 진심으로 존경했으며, 그만큼 어려워했다. 휘슬러는 당시 연인 히퍼넌과 불화 끝에 연인 관계를 사실상 청산한 상태였다. 휘슬러는 이 일이 벌어진 데 대해 어머니의 지분이 상당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어머니가 온다는 소식에 함께 살던 히퍼넌을 쫓아내듯 내보낼 수밖에 없었으니. 원망의 마음이 다시 뒤룩뒤룩 덩치를 불렸다.
하지만….
휘슬러도 어머니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정말 맞지 않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향한 사랑만큼은 의심할 게 없었다. 복잡한 마음이었다. 복잡한 데다 입체적이기까지 한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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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회색과 흰색의 배치 1번(화가의 어머니·일부 확대), 1871, 캔버스에 유채, 144.3×162.4cm, 오르세 미술관 |
휘슬러가 그림에 옮겨 담은 어머니는 늙고 여위어보인다.
그녀에 대해선 어떠한 후광도, 보정도 없다. 흰 레이스가 달린 모자, 발등을 덮을 만큼 긴 검은 원피스는 엄숙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보통 화가가 어머니상을 그리면 의도적으로라도 인자한, 자애로운 느낌이 들게끔 한다. 휘슬러는 이 관행을 따르지 않고 외려 무거운 공기만 돋보이게 했다. 어머니의 발을 필요 이상으로 크게(못생기게) 그린 일, 무려 어머니를 그리고도 제목은 평소처럼 딱딱하게 <회색과 흰색의 배치 1번>로 붙인 일 등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 휘슬러가 이 그림에 악감정만 실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그녀를 무척 세심하게 그리지 않았는가. 휘슬러는 레이스 한 올, 머리카락 한 가닥도 허투루 표현하지 않았다. 휘슬러는 그림 한 점을 그리는 데 긴 시간을 쏟는 화가였다. 어머니는 나이와 관절염 탓에 오랫동안 한 자세로 있기가 힘든 상태였다. 그런 두 사람이 이런 완성작을 낸 일 자체가 서로를 향한 정성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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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휘슬러, 피아노에서 |
“고생했다.”
“고생하셨어요.”
둘은 동시에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까. 나를 견디느라, 저를 인도하느라 그간 애썼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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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 그리브스, 제임스 휘슬러의 초상화, 1869 |
안나는 이후에도 아들과 상당 기간 함께 살았다.
안나는 그 시간에도 아들을 돕고, 참견하고, 뒷바라지하고, 잔소리를 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래도 그녀는 휘슬러만큼이나 자유분방한 그의 친구들과 소통하고, 아들의 작품 판매에 적극 나서는 등 점점 더 열린 태도를 보였다. 휘슬러가 까다로운 소송에 휘말렸을 때도 끝까지 아들 편에 섰다. 그랬던 안나는 1881년 1월에 사망했다.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진 뒤 10년가량이 흐른 후였다. 당시 마흔일곱 살이었던 휘슬러는 이 일을 마음 깊이 슬퍼했다. 휘슬러는 이날 이후 어머니의 이름에서 ‘맥닐’을 떼온다. 자기 이름에 붙인다. 이는 그녀를 기억하는 그만의 방식이었으리라.
그리고 또 10년 후. 휘슬러는 생전 어머니를 그린 <회색과 흰색의 배치 1번> 덕에 비로소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었다. 프랑스 정부가 이 그림을 사들인 것이다. 그 콧대 높은 조직이 미국 태생 화가의 작품에 눈독을 들인 일 자체가 꽤 파격적인 행보였다. 이 그림은 공개 직후부터 대중의 강한 호불호만 이끌었다. 지인들 사이에선 “인간성을 극도로 절제한 실험적 그림”이라는 식의 의견도 있었지만, “차갑고 뻣뻣하다”는 투의 대중 비판도 상당했다.
그랬던 작품에 이제는 제작자 뜻과 무관하게 “모성의 상징”, “사랑의 흔적”과 같은 평이 따라붙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에는 어머니 덕에 삶이 잘 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휘슬러에게 최고 영예를 안겨준 모델은 연인 히퍼넌이 아닌, 어머니 안나였다.
휘슬러는 이후 영국 예술가협회 회장으로도 뽑혔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제로 한 강연도 활발히 하고, 스스로 미술 학교도 세웠다. 그런 그는 1903년 7월, 런던에서 사망했다. 향년 예순아홉 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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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미국 어머니의 날 기념 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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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ht for Her, 캐나다에 붙은 1차 세계대전 당시 포스터 |
휘슬러가 죽고도 <회색과 흰색의 배치 1번>은 거듭 유명세를 치렀다.
1934년, 미국 정부가 어머니의 날을 맞아 이 그림을 넣은 기념우표를 찍을 정도였다. 세계대전 당시에는 군 장병 모집을 위한 포스터로 쓰이기도 했다. 안나와 휘슬러 사이 복잡한 사연을 알았다면, 아울러 휘슬러의 심미(審美)주의적 예술관을 이해했다면 이 그림의 쓰임새는 달라졌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그림은 태어나는 순간 독자적인 운명을 갖기도 하니까. 제임스 ‘맥닐’ 휘슬러. 그에게 지금 상황을 전해주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참고자료>
휘슬러의 예술 강의, 제임스 휘슬러, 아르드
Memories Of James Mcneill Whistler, The Artist, Way, Thomas Robert, Sagwan Press
501 위대한 화가, 스티븐 파딩, 마로니에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