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새로운 경영 환경 만나게 돼”
규제 피하려 ‘성장 포기’ 피터팬 기업 양산
경제 성장 규모 반영 못한 시대착오 잣대
낡은 규제가 국내 기업들 성장 가로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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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티이미지 |
[헤럴드경제=김현일·박지영 기자] “자산이 2조원이 넘는 순간 규제 쓰나미가 시작됩니다. 이번에 집중투표제를 골자로 한 2차 상법개정이 통과되면서 이제 자산 2조원은 넘어서는 안되는 벽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변에선 어떻게 해서든 자산 2조원을 넘기지 않기 위해 사업 일부를 팔아서라도 자산을 1조9999억원에 맞추겠다는 이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최근 만난 한 기업인은 자산총액이 2조원을 넘어서면 완전히 새로운 경영 환경을 맞닥뜨리게 된다며 이같이 호소했다. 2조원이라는 구(舊)시대의 기준이 기업의 숨통을 조이고, 성장의 의지를 꺾고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2조원의 벽’에 갇힌 한국이다.
자산총액이 1조9999억원이었던 기업이 사업 호조에 힘입어 자산 2조원의 대기업 반열에 오르는 순간 기쁨은 잠시 쏟아지는 규제에 직면하는 것이 한국의 경영계의 현실이다. 당장 경영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사회 구성과 주주총회 운영방식 등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단지 자산 1억원 차이만으로도 기업이 놓이게 되는 경영 환경이 완전히 달라지는 셈이다.
우리나라 양대 기업규제법으로 꼽히는 상법과 자본시장법은 오랜 기간 자산총액 2조원 이상 기업을 겨냥해 수십 가지의 규제들을 적용해왔다.
상법에 따라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회사는 이사회에 사외이사를 3명 이상 둬야 하고, 이사의 과반을 사외이사로 구성해야 한다. 또한, 3명 이상의 감사위원으로 구성된 감사위원회를 반드시 설치하고 감사위원의 3분의 2 이상은 사외이사로 채워야 한다.
자본시장법의 경우 지난 2022년 8월부터 이사회에 여성 이사를 최소 1명 두도록 의무화했는데 역시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회사가 타깃이 됐다. 현재 논의 중인 ESG 공시 의무화도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회사부터 적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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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째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이라는 기준이 절대 불변의 원칙처럼 통용되고 있는 가운데 상법 1차·2차 개정은 재계를 ‘2조원의 덫’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다. 특히 최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2차 상법개정은 2조원의 벽을 더욱 단단하게 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차 상법개정으로 자산 2조원 이상인 기업이 이사를 선임할 때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고, 다른 이사들과 분리 선출하는 감사위원회 위원을 1명에서 2명으로 늘리도록 했다.
기업의 자산이 불어나는 경우는 대부분 사업 호조나 투자 확대 등에서 비롯된다. 영업활동으로 순이익이 늘어났거나 보유 중인 부동산 자산 가치가 올라가는 경우는 물론 신규 투자한 설비 역시 자산에 반영되면서 총 자산총액의 증가로 이어진다.
그러나 자산의 증가가 가져다주는 이점보다 규제의 충격이 커지는 것도 바로 이 때부터다. 한국경제인협회에 따르면 중소기업을 졸업하면 적용받는 규제는 57개에서 183개로 3배 가까이 늘어나고, 중견기업을 벗어나면 209개에서 274개로 40% 증가한다.
한국경제인협회와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올 1월 시장조사 전문기관 모노리서치에 의뢰해 매출 상위 600대 상장회사를 대상으로 상장유지비용을 조사한 결과 코스피 기업은 17.8%, 코스닥 기업은 6.0%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산 규모가 큰 대기업이 몰려 있는 코스피 시장의 특성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이는 자산 규모가 클수록 그만큼 치러야 하는 비용도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재계는 이번 상법 개정으로 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들은 집중투표제를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비용부담도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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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전문가들은 자산 2조원이라는 낡은 기준이 우리 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벽이 됐다고 말한다. 2조원 근처에 있는 기업들이 규제를 피하기 위해 더 이상 자산을 늘리는 것을 포기하고 현상 유지에만 매달리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스로 성장을 회피하는 ‘피터팬 증후군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2023년 중견기업 기본 통계에 따르면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기업은 301개인 반면, 중견에서 중소로 돌아간 기업은 574개로 조사됐다.
중소기업→중견기업→대기업으로 클수록 ‘규제’는 늘어나고 ‘지원’은 줄어드는 기형적인 시스템이 결국 기업들을 ‘어른’이 되기보다는 작은 ‘피터팬’에 머무르게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온다.
우리나라 10대 기업(자산총액 기준) 순위만 봐도 20년째 삼성·SK·현대차·LG·롯데·포스코·한화·GS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은 너무나 많은 규제의 대상이 되다 보니까 2조원 밑으로 낮추려고 한다. 기업이 커지면 쪼개려고 할 것”이라며 “기업을 키우려고 하지 않다보니까 고용 문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규제를 피하려 기업 규모를 작게 유지하는 소극적 경영이 이어질 경우 자산 2조원 이상 기업은 줄어들고 작은 기업들만 남아 겨우 연명하면서 양질의 일자리가 빠르게 사라질 것이란 지적이다.
공정거래법은 그동안 경제 규모의 성장을 반영해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꾸준히 상향해왔다. 2008년 자산총액 2조원에서 5조원으로 올린 이후 8년 만인 2016년 다시 10조원으로 끌어올렸다.
2021년부터는 국내총생산(GDP)의 0.5% 이상으로 바뀌면서 2024년 기준 자산총액 10조4000억원인 기업이 대상이 됐다.
반면, 상법이 제시하는 자산총액 기준은 여전히 2조원에 머물러 지금의 경제 성장과 기업 규모 확대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상법상 자산총액 2조원에 대해 “너무 옛날 기준”이라고 비판하며 “결국 기업들은 그 기준에 맞추려고 자산을 매각하거나 축소하려고 노력하고 분사하거나 분할하는 등의 편법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규제가 무서워서 스스로 성장을 포기하는 역설적인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선 결국 시대에 맞는 기준 재정립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 교수는 “지금은 작은 회사 한 곳도 자산이 2조원인 경우가 많다”며 “기준을 상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