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 절도 등 혐의
A씨 “한국·베네수엘라 문화 달라…고의 없었다”
유죄지만 이례적 선처…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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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참고용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
[헤럴드경제=안세연 기자] 한국 문화를 동경해 유학까지 온 베네수엘라 명문대생 졸업생이 범죄에 연루됐다. 취미는 K팝 커버댄스 공연.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은 엑소(EXO). 20대 여성 A씨는 외교관이 되는 것을 목표로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에서 석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문제는 한국에 온 지 불과 5개월 됐을 때 생겼다. 대학원에 다니던 A씨는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다. 한 가구 회사에서 월급 300만원을 제안했다. 온라인 결제에 서툰 고객이 현관문 앞에 놔둔 계약금을 회사에 전달하는 업무였다. 겉보기엔 그럴 듯했지만 사실은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 업무였다.
이 사건은 통상적인 사건과 달랐다. 언어의 문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문화가 달랐다. 베네수엘라는 납치·강도 등 강력 사건은 있어도 보이스피싱 등 지능 범죄가 거의 없다.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때문에 고액의 현금 거래가 일반적이다. A씨는 “현금을 전달하는 게 범죄라고 생각한 적 없다”고 주장했다.
베네수엘라 대사·영사 대리까지 재판부에 A씨의 무죄를 탄원하는 서신·동영상을 제출했다.
A씨의 유·무죄에 대해 국민참여재판이 열렸다. 배심원들의 판단은 어땠을까. 지난 12일 서울서부지법 에서 오전 11시에 시작된 재판은 다음날 자정을 넘겨 끝이 났다. 13시간의 공방을 기록했다.
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형사재판이다. 배심원들은 피고인의 유·무죄에 대해 판단하고, 적절한 양형을 재판부에 제안한다. 재판부는 이를 반드시 따를 의무는 없지만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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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참고용 이미지. [게티이미지뱅크] |
A씨는 지난 2023년 9월~11월께 2개월간 7회에 걸쳐 2억원 상당의 보잉스피싱 피해액을 조직 상부에 전달한 혐의를 받았다. 검사는 “A씨가 보이스피싱에 가담한 것에 대해 미필적 고의가 인정된다”고 주장했다. 미필적 고의란 범죄라는 결과를 예상했지만 범죄가 이뤄져도 상관없다는 심리 상태다.
검사는 그 근거로 크게 2가지를 제시했다. 첫 번째로 “채용·업무 과정이 이례적이었다”고 했고, 두 번째로 “피고인(A씨) 본인도 범죄일까 봐 불안한 태도를 보였다”고 밝혔다.
첫 번째 주장에 대해 검사는 “채용 당시 A씨는 대면 면접이나 화상 면접을 진행하지 않았다”며 “텔레그램을 통해 메신저로만 면접을 봤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라고 했다. 이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땐 현금을 사용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며, 수시로 입고 있는 복장을 촬영해 전송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검사는 두 번째 주장에 대해선 A씨가 업무 중 상위 조직원에게 불안함을 드러낸 메시지를 제시했다.
화장실에서 현금을 촬영하라는 지시에 A씨가 “사람들이 이 안에서 뭘 한다고 생각할까요?”라고 보낸 메시지였다. ATM에서 6차례에 걸쳐 통장의 돈을 출금하라는 지시에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여기 6번이나 다시 오면 의심할 것 같아요”라고 보낸 메시지도 제시했다.
검사는 해당 메시지에 대해 “A씨 본인도 거액의 현금을 전달하거나 출금하는 일 자체가 불안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며 “보이스피싱에 대해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강조했다.
검사는 통역을 거쳐 A씨를 집중적으로 추궁했다. 하지만 A씨가 답변을 이어갈수록 한국 문화에 서툴렀다는 점만 확인됐다. 검사는 종종 한숨을 쉬며 답답한 모습을 보였다. 다음과 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A씨 : “저는 한국에서 두려움을 느낀 적이 별로 없습니다. 한국은 안전한 국가라고 생각했습니다.”
A씨 : “정직하게 말씀드리면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항상 저를 믿었습니다.”
A씨 : “상사의 사진, 가족 사진, 전화번호가 있었어요. 특별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A씨 :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밀번호잖아요. 어떤 사람은 알려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알려주지 않기도 하니까요.”
A씨 : “한국에선 이웃끼리 소음을 내지 않는 게 예의라고 배웠습니다. 방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통상 형사재판에서 검사의 질문에 납득될 만한 해명을 못 할 경우 불리하게 작용한다. 특히 보이스피싱 사건에선 “범죄인지 몰랐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외국인인 A씨는 예외였다. 단순히 “이상하지 않았다”고만 답변해도 ‘외국인이라 그럴 수 있겠다’는 반응이 방청석에서 나왔다.
저녁 5시께, 배심원들의 휴식을 위해 재판이 20분 정도 휴정됐다. 재판이 다시 열리자 A씨의 변호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변호인은 베네수엘라와 한국 문화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에 변론을 집중했다. 또한 “A씨가 한국 생활을 동경해서 유학까지 온 만큼 한국 생활을 방해하는 범죄에 고의로 가담했을 리가 없다”고 강조했다. 검사의 주장과 달리 채용·근무방법에 대해 수상한 점도 없었다고 반박했다.
A씨 측은 “베네수엘라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국가”라며 “부동산 거래·가구 구입·인테리어 등 대부분의 거래가 달러 현금으로 이뤄진다”고 밝혔다. 이어 “베네수엘라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나고 자란 A씨 입장에선 현금을 전달하는 게 범죄라는 것을 인식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베네수엘라에선 납치·강도 등 강력범죄는 일어나더라도 한국처럼 전화로 금융사기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한국처럼 교통카드 시스템이 없어 현금으로 비용을 지급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했다. A씨가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때 현금을 썼다고 해서 이례적이지 않다는 취지다.
A씨 측은 비대면 화상채팅으로 채용한 것에 대해서도 “베네수엘라에서 지방·해외 관련 업무는 비대면 화상채팅을 통해 채용되는 경우가 많다”며 “베네수엘라는 인건비가 싸기 때문에 해외 기업이 화상채팅으로 필요한 인력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A씨가 범죄를 저지를 동기가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A씨 측은 “베네수엘라에서 케이팝 댄스 커버 그룹으로 수차례 수상할 만큼 한국과 한국 문화를 사랑하는 학생”이라며 “베네수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학을 졸업한 뒤 연세대 국제대학원,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에 동시 합격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한국에서 소중한 꿈을 이루기 위해 유학 생활을 지속하고자 지원한 것”이라며 “업무를 통해 얻은 일당은 총 63만 5000원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학원 석사 과정과 본인의 모든 장래를 포기하고 외국에서 중범죄자가 될 만한 동기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채용·업무 방법도 수상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A씨 측은 “지원할 때 회사 이름·사이트를 검색해서 회사가 실제 존재하는지 확인한 후 업무를 시작했다”며 “업무 시작 전 아는 경찰관에게 ‘이 회사 괜찮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해당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고령의 고객들이 온라인 업무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구체적인 설명을 들었다”며 “업무 시작 전 계약서, 비상 연락망, 외국인 등록증, 여권 사진, 이력서까지 교부했기 때문에 한국에 온 지 6개월 밖에 안 된 외국인 A씨 입장에선 수상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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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대리가 A씨의 재판부에 제출한 영상 편지. A씨의 무죄를 탄원하는 내용이다. 베네수엘라 대사관 측 동의를 받아 공개. [A씨 변호인 제공] |
A씨의 지인들은 재판부에 무죄를 탄원하는 서면을 제출했다. 주한 베네수엘라 대사관의 서신, 대사 대리의 영상 편지,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지도 교수의 탄원서 등 이었다.
내용은 대체로 비슷했다. 대사관은 “A씨는 양국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로 이화여대 국제대학원에 진학했다”며 “베네수엘라에서 보이스피싱 범죄가 전무한 점을 고려하면 A씨는 자신의 행동이 범죄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적었다.
대사 대리는 영상 편지를 통해 “A씨는 항상 올바르고 선한 행동을 보였다”며 “베네수엘라와 한국의 문화적 차이, 지식 부족으로 인해 생긴 비자발적 실수를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대사관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경고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한국을 존중하는 태도를 항상 유지하겠다”고 말했다.
지도교수는 탄원서에서 “A씨는 형사 사건이 제기된 상황에서도 성실하게 학업에 증진했다”며 “대부분의 과목에 A학점을 취득했다”고 적었다. 이어 “A씨는 사회 정의, 차별 철폐, 난민,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며 “더 나은 사회를 이루고자 노력할 뿐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적었다.
밤 9시께, A씨는 울먹이며 최후진술을 했다.
A씨는 “저 때문에 피해를 본 모든 분께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 싶다”며 “한국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았더라도 이런 피해를 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보이스피싱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며 “한국에 오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했는데 고의로 절대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저를 위해 탄원서·영상 편지를 남겨준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며 “배심원 여러분과 재판부에서 이분들의 소중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줬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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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원 [헤럴드경제DB] |
밤 9시 20분께, 마침내 변론이 종결됐다. 배심원들은 늦은 저녁을 도시락으로 떼운 뒤 유·무죄에 대한 평의에 들어갔다. 약 2시간 30분 뒤 결과가 나왔다.
법은 냉정했다. 유죄였다. 단, 2억원이라는 피해액에 비해 이례적인 선처가 이뤄졌다.
배심원 7명이 만장일치 의견으로 유죄 의견을 밝혔다. 양형에 대해선 4명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적당하다는 의견을 냈고, 나머지 3명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적당하다고 봤다.
서울서부지법 11형사부(부장 김우현)는 배심원들의 의견을 존중해 유죄를 선고했다. 형량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었다.
유죄의 이유에 대해 재판부는 “A씨가 현금 수거 업무를 담당하게 된 경위, 업무의 구체적인 내용, 현금 수거 횟수와 규모, 전달 방법, 보수, 나이와 지능 등을 볼 때 통상적인 경우와 달리 매우 이례적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양형의 배경에 대해 “보이스피싱은 피해가 지속적으로 양상하는 반면 피해 회복이 사실상 어려운 범죄”라고 지적했다. 단, “피고인(A씨)은 베네수엘라 국적의 외국인”이라며 “범행 당시 한국에 온 지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점을 고려해 보이스피싱 범행 사례를 구체적으로 알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러면서 “확정적 고의를 갖고 범행에 가담했다고 보긴 어렵다”며 “범행으로 얻은 실제 이익(약 65만원)이 피해액(약 2억원)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금액인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A씨의 변호인, 법률사무소 담덕의 박지윤 변호사는 “무죄 평결이 나오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다”면서도 “비슷한 혐의를 받은 보이스피싱 수거책에게 선고되는 형량에 비해 현저히 낮은 처벌이 이뤄져 다행”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보이스피싱 수거책 사건에서도 ‘고의’에 관해 형사소송법상 엄격한 증명의 원칙이 지켜지길 바란다”며 “향후 유사 사안에서도 최선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선고가 이뤄지는 동안 A씨는 고개를 숙인 채 울먹였다. 선고는 자정을 넘긴 시각에 이뤄졌지만 방청석엔 A씨의 친구 등 10명이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선고 직후 A씨는 울먹이며 방청석으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A씨를 안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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