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인생이란, 삶이란 모두에게 공평하다지만, 가끔은 정말로 뛰어넘을 수 없는 불공평한 재능이 있다. 이를테면 김광석의 목소리, 그 자체처럼.
그의 노래에는 언어로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알 수 없는 층위가 있다. 음악적 취향이 어떻든, 세대를 막론하고, 어떤 곡이든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그 순간 공간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감성과 기억이 환기되는가 하면 그 안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무언가에 가슴이 ‘쿵’하고 묵직하게 내려앉는 감각. 그럼에도 선하고, 부드럽고, 또 아련한 그 목소리에 듣는 이는 누구라도 자신의 감정 혹은 추억 한 조각을 불현듯 꺼내보게 된다.
그의 죽음이 어떤 경위였는지 알아내는 것조차 이따금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김광석의 노래는 그것만으로 완결된 하나의 세계였다. 노래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살아 있는 자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머물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 누군가의 회고와 기억이 담긴 것처럼 들리지만 정작 그 주체가 ‘그’인지, ‘그를 듣는 나’인지도 분간이 어려워질만큼 조용하게 마음에 스며드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이상하리 만큼, 여전히 우리 삶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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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석의 노래에는 언어로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알 수 없는 층위가 있다. 음악적 취향이 어떻든, 세대를 막론하고, 어떤 곡이든 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그 순간 공간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 감성과 기억이 환기되는가 하면 그 안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무언가에 가슴이 ‘쿵’하고 묵직하게 내려앉는 감각. 그럼에도 선하고, 부드럽고, 또 아련한 그 목소리에 듣는 이는 누구라도 자신의 감정 혹은 추억 한 조각을 불현듯 꺼내보게 된다. [유튜브 영상 캡처] |
설득도, 호소도, 선동도 없다…김광석의 목소리가 가진 ‘힘의 방향’
김광석의 목소리는 흔히 ‘기교가 없다’고 평가받지만 사실 그의 노래를 자세히 듣다 보면 이곳저곳에 다양한 테크닉들이 숨어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단어를 끝까지 밀지 않고 여백을 남기는 방식, 한 문장이 시작 또는 끝나는 지점에서 한숨과 비슷한 호흡을 담아 곡에 여운을 넣는 방식, 감정이 올라오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미세하게 낮추며 균형을 유지하는 방식 등 상당히 노련한 기술들이 그의 노래에 녹아들어있다.
다만 이 모든 것들은 그의 노래에서 퍼져나오는 깊고 거대한 정서의 파동에 자연스럽게 묻혀 있어 거의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의 목소리가 전달하는 감정의 결이 워낙 선명하다 보니, 듣는 이는 ‘어떻게 부르는가’를 감지하기 전에 ‘무엇이 느껴지는가’에 먼저 빨려 들어가게 된다.
대부분의 발라드 곡이 감정을 바깥으로 밀어올려 듣는 이를 감정적으로 강하게 동요시키는 방식이라면 김광석의 노래는 그 반대다. 절정으로 올리는 방법과 감정을 터뜨리는 방향도 일반적이지 않은, 조금은 다른 차원의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그의 목소리는 감정을 낮춤으로써 힘을 얻는 식이다.
분출이 아닌 가라앉음, 상승이 아닌 침잠. 그는 감정의 표면을 높이지 않고 감정의 온도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로 곡 전체를 덮어버린다. 이에 듣는 이는 강렬한 힘에 빠져들면서도 그 강렬함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분명히 알아내기 어렵다. 소리 자체의 방향이 바깥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가 아니라 안쪽에서 조용하게 울리는 구조가 특유의 목소리로 진동하기 때문이다.
즉, 그의 노래에는 외부를 향한 고백도, 설득도, 호소도 없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반드시 들려주겠다는 목적도 없고 감정을 과장해 전달하려는 강력한 의지도 없다. 이를 테면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굳이 애쓰지 않으면서도, 감정 밖으로 나와 그 감정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감각이다. 그렇기에 그의 노래는 ‘표현’의 장이 아닌 ‘기억과 회고’의 장이 되고 이를 듣는 이들은 그 공간에서 그와 함께 자기 자신의 감정과 기억을 재생하듯 마주하게 된다.
이렇다보니 김광석의 노래를 들을 때 우리는 ‘김광석이 부른 노래’를 듣는 동시에 ‘내가 잊고 있던 기억과 감성을 누군가 대신 말해주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감정을 강하게 밀어 넣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는 듣는 이들이 들어갈 수 있는 여백이 생긴다.
그의 서늘한 듯 부드러운 목소리 안에서 보호받으며 타인의 감정은 걸러지고, 듣는 이의 감정은 간섭받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여백은 청자의 기억으로 채워지기에, 우리는 언제나 그의 노래에서 객관적인 거리감과 지독한 친밀감을 함께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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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출이 아닌 가라앉음, 상승이 아닌 침잠. 김광석은 감정의 표면을 높이지 않고 감정의 온도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로 곡 전체를 덮어버린다. 이에 듣는 이는 강렬한 힘에 빠져들면서도 그 강렬함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분명히 알아내기 어렵다. 소리 자체의 방향이 바깥을 향해 외치는 목소리가 아니라 안쪽에서 조용하게 울리는 구조가 특유의 목소리로 진동하기 때문이다. [연합] |
소소하기에 진실된 ‘삶의 감각’…일상의 언어가 울리는 ‘심연의 깊이’
김광석의 노래가 마음 깊은 곳을 쉬이 건드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곡 대부분이 삶의 ‘큰 이야기’보다 일상의 미세하고 소박한 장면들을 섬세하게 포착해 담담하게 전달하는 능력 때문이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의 작고 고요한 방의 풍경, ‘서른 즈음에’ 속 일상적 삶의 체념,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련한 옛 시절의 순간들. 김광석은 웅장한 클라이맥스나 갈등 구조가 없는 서사를 택하고 표현하는 데 탁월한 감각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이같은 평범한 순간들을 특유의 조금은 허무한듯, 먹먹하게 노래하는 방식을 통해 더욱 깊고 넓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앞서 서술했듯, 김광석의 목소리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그는 ‘삶의 감각’에 최대한의 근접치로 접근해 노래로 옮겨 표현할 줄 아는 목소리를 가졌다. 그의 노래는 슬픔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슬픔을 과장된 비극으로 소모하지 않으며 사랑을 노래할 때도 화려한 설렘이 아닌, 인간의 마음 속에 저며든 미세한 ‘가슴 시림’을 예리하게 포착해 전달한다.
이에 그가 노래하는 ‘일상의 결’은 듣는 이에게 곧 ‘인생의 결’로 확장되고, 그의 목소리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경험으로 번역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김광석의 노래는 시대와 세대, 경험을 가리지 않고 같은 지점에 내려앉는다. 그의 목소리는 어떤 특정한 이야기와 감정을 호소하거나 강요하지 않음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듣는 이들은 저마다 다른 삶의 장면을 동일한 결로 떠올리고 그 안에 고요하게 빠져든다. 그렇게 김광석의 노래는 개별적인 경험을 품는 동시에 개인을 뛰어넘는 감흥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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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석의 노래는 시대와 세대, 경험을 가리지 않고 같은 지점에 내려앉는다. 그의 목소리는 어떤 특정한 이야기와 감정을 호소하거나 강요하지 않음에도 듣는 이들은 저마다 다른 삶의 장면을 동일한 결로 떠올리고 그 안에 고요하게 빠져든다. 그렇게 김광석의 노래는 개별적인 경험을 품는 동시에 개인을 뛰어넘는 감흥을 만들어낸다. [뉴시스] |
“광석이는 왜 그렇게 일찍 갔다니”…우리는 늙어가고, 그는 그 곳에 그대로 있네요
김광석의 목소리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삶에서 반복 재생되지만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같은 지점에서 미묘한 단절이 발생한다. 그의 노래는 여전히 생생하게 들리지만 그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문득 ‘노래 이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서른 즈음’을 지난 40대의 김광석, 그만의 감수성으로 삶을 지나온 50대의 김광석, 더 깊은 경험과 사유를 통해 아마도 인간에 대한 이해에 닿았을 60대의 김광석을 들을 수 없는 사실은 상당히 아프다. 우리는 그 모든 가능성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남겨진 우리의 생애 안에서 결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의 목소리는 늘 그 자리에서 완결되고, 그 완결이 반복될 때마다 부재의 무게는 짙어진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참 슬프다. 과거의 가수이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정지된 현재’로 남아 있기에, 들을 때마다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가슴 어딘가 시려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앞으로의 김광석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 그 목소리가 단 한 번도 나이 들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 그 아쉬움이 그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불현듯 사무치게 밀려온다.
김광석의 부재는 그의 노래를 옅게 만들지 않고 노래의 깊이를 더 증폭한다. 남아 있는 목소리만으로도 인간의 삶을 오래 비추는 힘을 가진 가수가 얼마나 드물던가.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이상할만큼이나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건다. 마치 그가 떠난 이후에도 시간이 계속 흐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목소리가 남긴 어떤 조각이 우리 곁에 조용히 머물러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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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석의 노래는 우리가 떠나도, 시간이 지나도, 그의 삶을 품은 채 남아 울릴 것이다. [연합] |
김광석의 목소리가 도달할 수 있었던 길은 끝내 펼쳐지지 못했고, 그 길의 빈자리는 이제 우리 각자의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다.우리 곁에 있었다면, 더 연륜이 묻어났을 음색, 더 깊은 곳에 다다랐을 호흡, 다르게 울려퍼졌을 단어들. 그 가능성들은 모두 멈췄고, 그 멈춤 안에서 우리만이 계속 나이를 먹는다.
더 이상 새로운 김광석의 노래는 없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그의 노래가 들릴 때마다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되는지도 모른다. 멈춰 있는 목소리와 계속 살아가는 우리가 같은 시간에 서게 되는 그 찰나의 시간에 다가오는 공백과 여백에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아쉬움을 닮은 감정을 마주하기에. 공백이 지나가면 노래는 끝나고, 시간은 다시 흘러간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의 노래는 시간이 흘러 우리가 떠난 뒤에도, 그의 삶을 품은 채 그 자리에 남아 누군가에게 울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