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비즈] 산재 처리 ‘속도전’의 위험성


정부는 지난해 9월 평균 227일 소요되는 업무상 질병 산재 처리 기간을 오는 2027년까지 평균 120일로 단축하겠다는 대책을 발표하였다. 이후 근로복지공단이 관련 규정 및 절차 변경 등을 추진한 결과, 최근 근골격계 질병 처리 기간이 30일 정도 줄어드는 등 구체적 결과가 확인된다.

신속한 산재 결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처리 기간 장기화에 대한 구조적 진단 없이 기간 단축만을 지상 목표로 한다면 졸속 행정이 될 수 있다. 신속성만을 최우선 가치로 삼을 경우 산재 행정의 정확성과 공정성, 그리고 궁극적인 산재 예방 기능까지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산재보험 정책은 속도만을 내세우고 있어 심히 우려된다.

산재 판정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고도의 전문 의사결정 과정이다. 재해자의 작업환경 및 유해·위험인자 노출 수준, 업무 강도, 질병 경과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로복지공단은 공정하고 정확한 산재 판정에 필요한 역학조사 등 전문 조사 대상 축소,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 심의 제외 확대, 특별진찰 대상 최소화 및 평가 단계 단순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 재해조사가 축소되면 객관적 근거에 기반한 산재 판정이 어려워지고, 특히 과로사를 비롯한 직업성 암, 정신질환 등 복잡한 사건일수록 오판 가능성이 높아진다. 판정의 오류가 늘어나면 산재 재심사 청구 및 소송이 증가할 수 있는데, 이는 전체 처리 기간을 더 늘리고 사회적 비용이 증가하는 역설을 낳는다.

근본적으로 산재 처리 장기화는 조사 인력의 양적·질적 부족 문제에서 기인한다. 인력 규모와 조사 역량을 강화하지 않은 ‘속도전’으로 조사 품질이 저하됐고 공단 담당자들은 시간 압박과 업무 과중으로 재해조사 업무를 꺼리는 악순환이 굳어진 지 오래다. 공단이 작년 하반기 집중 처리 기간을 운영한 것이 처리 기간 단축에 기여한 것으로 보이나, 이는 내부 인력의 과부하를 의미하며 지속 가능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산재보험 제도는 단순히 산재 여부 판정을 통한 요양과 보상만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재해자의 재활과 사회 복귀 지원, 원인 분석을 통한 재해 예방도 매우 중요한 기능이다. 그러나 최근 수년간 산재보험 행정은 신속 처리에만 몰두한 나머지 재활과 예방 사업 분야를 등한시하고 있다. 경영계 자료에 따르면 조선업종 근골격계 질병자 평균 요양 기간이 380일을 초과하는 등 재활을 통한 조기 복귀가 과거보다 더 요원해지고 있다. 또 10년 이상 일했다는 이유로 조사도 없이 산재 승인하는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면서 오히려 사업장의 작업환경 개선 투자가 위축되었다는 평가가 많아졌다. 무리한 신속 처리 시도가 역설적으로 근로자에게 피해를 주는 부메랑이 된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속도는 하나의 척도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충분한 신문과 변론 없이 졸속 처리된 재판을 정의로운 판결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산재 결정도 언제나 공정하고 정확한 판정으로 내려져야 한다. 처리 기간 단축이 마땅히 해야 할 검토와 검증을 외면하면서 추구하는 것은 퇴보에 가깝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산재보험의 공정성 제고에 관심을 두고 조사 인력 확충 및 역량 강화, 인공지능(AI) 기반 분석 체계 구축 같은 질적 개선에 적극 나서줄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

김수근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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